나의 분신 나의 첫 작품집
임병식 rbs1144@daum.net
접두사 ‘첫’자는 보거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어디서 접해보지 못했다는 사전적 의미 말고도 처음이라는 미지의 세계가 마냥 호기심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첫’이라는 말을 들으면 귀가 흘리고 관심을 갖게 된다.
나는 이 첫 자를 떠올리면 처음으로 책을 출판하던 일이 생각난다. 설익은 글을 내놓았는데 기대이상의 호평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다소 무모하게 등단하고 나서 일 년 만에 작품집 냈다. 그때가 1991년. 이전부터 작품을 써 모으기는 했지만, 문단사정도 잘 알지 못한 때였다. 속담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는데 마치 그런 격이었다.
하기는 이전에 예행연습삼아 지방에서 조그마한 수상집을 낸적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작품집이라기보다는 가벼운 단상을 모은 글이었고, 책 부수도 100여권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다가 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검찰로부터 수사권 독립이라고 해야 할 것을 ‘사법권독립’이라고 오타를 쳐놓고 만 것이다. 그것은 두고두고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얼굴이 뜨거워서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다니지 못했다.
그것이 정식 첫수필집을 내면서는 경각심을 주었을까. 이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첫 수필집은 1990년 4월에 상재하였다. 제목은 <지난 세월 한 허리를>.
출판사와 평론가도 신중하게 접촉했다. 내 단독으로 결정하지 않고 중앙에서 활동하시는 이기진 원로수필가에게 부탁했다.
그리하여 출판사는 미리내(김진식 수필가 운영), 그리고 평론은 국민대학교 2부대학장이신 장백일 평론가에게 부탁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는 평가가 돌아왔다. 묶어낸 글이 평소에 내가 쓰고 싶었고, 비교적 내 체질에 맞는 소재를 골라서 쓰기도 했지만 표지가 그럴 듯 했다.
나는 이 책을 내면서 거주하는 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판기념회다운 행사를 가졌다. 사실로 그러하기도 했는데 이전에는 책을 내면서 누가 행사를 가진 일도 없었던 것이다.
행사는 직장에서 거서적(擧署的)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석주 경찰서장님은 현수막을 만들어 달아주는 한편 안내자를 배치해 주고 직접 전 참모진을 대동하여 참석해 주셨다.
서울에서 이기진 수필가, 장백일 문학평론가, 김진식 출판사 사장이 참석하고, 한국수필가협회에서는 이숙 사무국장이 먼 길을 마다않고 내려오셨다.
그리고 한국수필 작가회에서는 신일수 회장이 진주에서, 류인혜 사무국장이 서울에서 참석해 주었다. 거기에다 백형조 전남 지방경찰국장님은 축하메시지를 보내주셨고 임병찬 MBC문화방송국님은 대형화환을 보내주셨다.
특히 경찰국장님은 “이 책은 정서함양을 위해 필독할 책”이라고 산항 적극 권장해 주시는 바람에 직원들이 모두 한권씩 사주고 덩달아 공단기업체에서도 호응하여 다수의 책을 구입해주었다.
그 바람에 당초에 다소 많은 부수인 2,000부를 찍었으나 금방 팔려나가서 이후에 추가로 1,500를 더 재판하기에 이르렀다. 나중 듣을 이야기지만 경찰국장님은 집무실 책상에 오랫동안 내 수필집을 놓아두고 한편씩 읽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 수필집에 향토색이 짙은 고향정서를 많이 담아 놓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잡다하게 엮기보다는 하나의 테마 수필로 내가 겪은 한 시대를 담아놓는다는 생각으로 집중시킨 것이었다. 당시는 내가 수필문학에 그리 조예가 깊지를 못해서 어떤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내가 가장 자신 있게 생각하고 직접 겪은 것들을 택하다보니 그랬던 것이었다.
작품의 경향은 평론가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다음은 평론가의 글 한 대목. ‘(전략) 임병식의 수필은 다양한 고향 제재를 통해 개성의 자조적 문학성을 고양시키되 재생적 상상의 랜즈로써 잃어버린 우리들의 아름다운 회상을 일깨운다. ’
이 수필집이 직장에서 호응을 얻는 건 아마도 딱딱한 직무환경에 노출된 직원들에게 순화된 감정을 맛보게 해준 것이 하나의 동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무튼 나의 수필집 ‘지난 세월 한 허리를’은 그 전에 연습 삼아 낸 문집이 통렬한 반성자료가 되어서 태어난 셈이다.
그런 만큼 이 수필집은 여간 애정이 가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재판을 함으로써 간간히 보이는 오탈자까지 바로 잡았으니 얼마나 잘된 것인가.
이러한 사연 때문에 나는 그 후로도 네 권의 수필집을 더 냈지만 첫 수필집을 가장 아끼고 잊지를 못한다. 좋은 작품을 담아 놓았다기 보다는 이 작품집을 볼 때마다 등단초기의 열정과 순수, 글 쓰는 자세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무언의 교훈을 주어서다. 그래서 이 작품집을 보면 무한히 힘이 솟고 출판기념회 때의 감격이 여전히 밀려온다.(2009)
첫댓글 벌써 33년 전의 일대사건이군요
첫 수필집 출판기념회를 그렇게 성대하게 베푸신 줄 몰랐어요 직장 상사와 동료들은 물론이고 수필계 주요 인사들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자리를 빛내주셨으니 세월이 흘러도 감회가 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많은 부수가 판매되기도 했으니 더욱 뜻 깊으시겠어요
얼떨결에 책을 냈는데, 다행이 책이 좀 팔려서 출판비와 다과의 경비를 빚없이 치렀습니다.
특히 백형조전남 경찰국장님이 격려해 주시고 이석주 경찰서장님이 크게 도와두셨지요. 서울에서 참석해 주신 이숙 한국수필사무국장님, 이기진, 장백일, 김진식선생님, 한국수필작가회 신일수 회장님 류인혜총무님이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여수시민회관에서 행사를 개최했는데, 에술행사로는 새 건물을 짓고 나서 제가 첫 테이프를 끊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