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201 소재. 1900년 9월경 갓등이(현 왕리) 본당에서 분리 설정되었으며, 주보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관할구역은 의왕시 청계동, 학현동 일부 지역, 원터 마을.
하우현 일대에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지방은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들과 깊은 계곡이 있고 수목이 울창하여 박해를 피해 살 길을 찾던 천주교 신자들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따라서 박해를 전후하여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하우현으로 낙향한 전교회장 김기호(金起浩, 요한)는 1901년에 지은 “봉교자술”(奉敎自述)에서 “하우현에는 군난을 전후하여 가난한 교우들이 모여 살았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찍부터 교우촌이 헝성된 이 지방은 박해 때에 여러 명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는 광주 의일리(義一理, 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체포되어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참수되었고, 1845년 9월에는 하우현에서 살던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이 체포되어 12월에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광주 묘론리(卯論里 혹은 山畓里, 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서 머물던 볼리외(B. L. Beaulieu, 徐沒禮) 신부는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청계산 중턱 둔토리 굴아위 동굴에 숨어 지내다 체포되어 1866년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볼리외 신부는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한덕운 토마스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후 하우현 지역의 교우촌은 와해되었고, 1884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공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888년 7월 갓등이 본당이 설립되면서 하우현은 갓등이 본당의 관할이 되었다. 갓등이 본당 2대 주임인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는 하우현 신자들이 공소 강당 없이 교우집에서 공소 예절을 행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94년 5월에 알릭스 신부가 협조한 금액과 하우현 신자들이 모금한 1,500냥으로 초가 목조 강당(10칸)을 신축하였으며, 그 후 하우현 지역의 교세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아울러 서울에서 거리가 가까운 데다 경치가 좋아 신부들의 휴양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또는 신부들의 휴양을 겸해 며칠씩 하우현에 체류하고는 하였다.
본당 설정 및 성쇠 하우현 공소는 1900년 9월경에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으로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였다. 설립 당시 관할구역은 광주, 용인, 과천 등지였으며, 16개의 공소에 신자수는 1,105명이었다. 샤플랭(O. Chapelain) 신부는 기존의 공소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하는 한편, 사제관을 신축하는 등 본당의 기틀을 잡아 나갔으나 신자들과의 갈등으로 해임되고, 1906년 3월 르 각(C. Le Gac)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11년 4월에 갓등이 본당의 알릭스 신부가 프랑스로 휴가를 떠나자 수원으로 거처를 옮겨 두 본당을 함께 관리하다가, 1912년 4월 27일 페랭(P. Perrin) 신부가 하우현 본당의 3대 주임으로 임명되면서 갓등이 본당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페랭 신부는 부임 2년 만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소집되어 프랑스로 떠났고, 이에 따라 하우현 본당은 행주 본당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갓등이 본당을 돌보면서 함께 사목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 1920년 5월 23일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윤 신부는 부임 후 교육 사업의 일환으로 본당 내에 4년제 초등과정의 경애 강습소를 열어 주민들의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는 한편 신개화 사상을 교육하였다. 하지만 윤 신부가 옥천 본당으로 전임된 후에는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1930년 10월 5대 주임 부이수(P. Bouyssou, 베드로) 신부가 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된 뒤 하우현 본당은 수원(현 북수동)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1937년 8월에 김경민(金慶旻, 루도비코) 신부가 6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부활되었지만, 1943년 1월에 김경민 신부가 황해도 재령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다시 공소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7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활동하던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는 1944년 4월부터 논산(현 부창동) 본당으로 파견되어 논산 본당의 사목까지 담당하다가 1944년 10월에 하우현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1951년 10월에 황 신부가 평택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하우현은 영등포(현 도림동)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53년 12월 구천우(具天祐, 요셉) 신부가 8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하우현 공소는 다시 본당이 되었다. 그러나 구 신부는 산간 지역에 위치한 하우현보다 발전 가능성이 있는 안양 읍내로 본당을 옮기려고 하였고, 결국 1954년 3월 7일에 안양에 성당을 세운 뒤 9월 7일에 안양(현 중앙) 본당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이로써 하우현 본당은 안양 본당 관할 공수가 되었고, 성당과 사제관은 그대로 보존되어 신부들의 휴양지로 제공되었다.
한편 은퇴 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는 하우현 성당이 퇴락하여 붕괴 위험이 있음을 보고 1965년에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는데, 이때 구로동(현 구로3동) 본당 주임이던 스피스 신부가 김영근 신부와 미군 부대 사이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1975년 12월 안양 본당으로부터 군포(현 호계동) 본당이 분리 설정되면서 하우현 공소는 군포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본당 부활 및 현재 1978년 6월 25일자로 하우현 공소는 본당으로 부활되어 9대 주임으로 스피스(R. Spies, 라이문도) 신부가 부임하였다. 스피스 신부는 사제관, 회의실 수리(1979. 7), 14처 동산 조성(1983. 9), 성당 수리(1984. 10), 성 루이 볼리외 성상 건립(1987. 6), 성당 내 예수성심상 건립(1989. 10) 등 본당 환경 조성에 꾸준히 노력하였고, 1991년 10월 1일에는 수녀원 건물을 마련하였으며, 1993년 10월 16일에는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10대 주임 한연흠(韓然欽, 다니엘) 신부 재임기인 2001년 1월 22일에는 초대 주임 샤플랭 신부가 세운 옛 사제관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7월과 2005년 6월에는 사제관 보수 공사와 조경 공사를 각각 실시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본당에서는 교회사적으로 의미가 큰 이곳을 성지로 개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2012년 이후 성당 뒤편 언덕에 성모동산과 묵주기도 길 등을 조성하고, 지속적인 성지 개발을 위해 신자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하우현 카페와 성물방, 치유의 집(가족과 소규모 단위 피정집) 등도 마련되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출처 : 백병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2권, 2006년,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2월 18일)]
한편 1906년에 샤플랭 신부가 세운 옛 사제관은 그 몸체가 서양식 석조 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전통 한국식이다. 20세기 초반에 성당 사제관을 건립하면서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이 혼용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로, 평면 및 구조ㆍ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편 사제관 앞마당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의 기념비와 FRP 소재의 동상이 있었는데, 2010년 태풍 콘파스로 인해 크게 파손되자 청동 소재를 이용해 새 성인상(엄종환 요셉 작)을 복원 제작해 그해 10월 31일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볼리외 신부는 주로 하우현 인근에서 사목하다가 인근 청계산의 둔토리 동굴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최종수정 2016년 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