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에 앞서 -
고등학교 동창 전 연호군과는 올 겨울(2005년 1월)에 덕유산 종주를 목표로 향적봉 산장에서 1박을
한 후에 호기롭게 남덕유산을 향해 출발했으나 눈보라와 거친 바람의 방해로 어쩔 수 없이
삿갓재대피소 에서 황점 쪽으로 탈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탈출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장모님 임종도 못 본 사위가 되어 집사람에게
한동안은 고개도 한동안 못 들 뻔 했으니 말이다.
또, 2월 말에는 전 연호 집사람까지 모시고 한계령으로 오르는 설악산 등반 계획을
세웠으나 1m가 넘는 폭설로 오색 쪽으로만 등산로가 열리는 바람에 그곳으로 해서 대청봉을 올라
설악동으로 하산했으나 이 또한 계획대로의 산행은 아니었다.
이번 산행도 결론부터 말하면 계획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산행이 되었다.
- 산행 계획 -
보름 전쯤 친구들과의 우연한 술자리에서 설악산이 안주로 올랐었다.
다른 친구들은 개인 사정들이 있어 못가고, 여름 가기 전에 설악엘 한번 들어가기로 연호 군과 약속을 하였다.
일정은 4박5일로 잡고 남교리에서 시작하여 12선녀탕을 지나 서북능선과 공룡능선을 넘어 곰골이라는 계곡으로 내려오는 장장 50Km 가까운 내설악과 외설악을 모두 아우르는 대장정이다.
거사 일을 8월1일로 잡고 준비에 들어갔다.
서북능선상과 공룡능선에서의 야영野營을 위한 텐트와 침낭, 취사도구는 내가,
나머지 먹을거리와 술은 연호군이 준비하기로 한다.
그러나 술 깬 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무 무리한 계획이다.
내 짐무게는 당연히 20kg이 훨씬 넘을 것이고 연호군의 짐도 15kg은 될 것이다.
장수대 부터 오르기로 계획을 수정한다.
그러나 계획을 재수정하여 용대리 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아침 첫차를 타야 일정이 순조로운데 피서 철이라 장수대행 첫차는
이미 매진이었기 때문이다.
- 산행 일 -
8월1일 아침.
6시 15분발 거진 행 버스에 두 노구老軀를 싣다.
피서객들로 첫차인데도 만원이다.
10시 40분 쯤 용대리에 내리니 비가 엄청 내린다.
그렇지만 어쩌랴?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서 비 맞는 것이야 다반사茶飯事이거늘.
배낭에 커버도 씌우고 연호는 판쵸 우의 나는 오버 트로우져와 자켓으로 무장을 하고
씩씩하게 *백담사百潭寺를 향해 출~~~~~~~~~발~~~~~~~~.
매표소를 지나자니 허연 수염의 늙은이들이 키만한 배낭들을 메고 있으니 관리인이 조심
산행을 당부한다.
셔틀버스를 타니 백담사 중간 까지만 가던 버스가 이제는 백담사 경내까지 간단다.
편해져서 좋기는 하지만 진정한 산행 재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우중인데도 백담사 구경 가는 피서객들로 버스 또한 만원이다.
*백담사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北面) 용대2리 설악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 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진덕여왕 1) 자장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한계사라고 하였다.
690년(신문왕 10년)에 불타버려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는데, 《백담사사 적기》에 이때의 중건과 관련된 전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다.
낭천현(지금의 화천군)에 비금사가 있었는데 주위의 산에 짐승이 많아 사냥꾼들 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 때문에 산수가 매우 부정해졌는데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 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루 밤사이에 절을 설악산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 터로 옮겼다.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앞뒤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이 이전과 달라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 터로 옮겼노라”고 일 러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며, 이 지방 사람들은 춘천시 부근의 절구 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려 생 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구전으로 미루어 보면 한계사를 중창 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790년에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옮겨 서 중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에 다시 불타버 려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로 개명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다가 1432년 4번째 화재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심원사지 아래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선구 사라 하였으나 1443년에 불타버렸고, 1447년 옛 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 시 절을 세워 영축사라 하였다. 그러나 1455년 6번째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여 백담사라 하였다.
1772년(영조 51)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 태현, 태수 등이 초암을 짓고 6 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라 하였다가 1783년 (정조 7년)에 절 이름을 다시 백담사로 바꾸었다. 근대에 이르러 한용운이 머물 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등을 집필하였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전 두환 전 대통령과 부인 이순 자 여사가 이곳에서 사실상의 유배 생활을 해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두산백과사전 중에서 -
백담사에 내리니 우리 둘만 산 쪽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백담사로 향하고, 우리는
언제 보아도 정겨운 *수렴동계곡水簾洞溪谷을 따라 한가한 발걸음을 옮긴다.
*수렴동 계곡은 백담사에서 수렴동대피소까지의 약 6km구간의 계곡을 말한다.
이곳은 ‘물(水)로 발(簾)을 들인 계곡’ 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수많은 담과 소, 기암괴석 등이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계곡이다.
외설악의 천불동계곡과 더불어 설악산의 대표적인 계곡으로 꼽힌다.
오늘의 일정은 *오세암五歲庵까지니 시간이 널널하다.
아침을 일찍 먹어 출출하기에 백담계곡의 한 물가에 자리를 펴고 라면을 끓인다.
용대리에서 산 인제 막걸리가 주식이 되고 라면이 부식이 된 점심이 정말 꿀맛이다.
*오세암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백담사에서 약 6㎞ 떨어진 곳에 있으며, 영시암을 지나 마등령으로 가는 길에 있 다. 647년(신라 선덕여왕 13) 자장(慈藏:590~658)이 이 곳에 선실禪室을 지은 뒤, 관세음보살이 언제나 함께 있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관음암觀音庵이라고 하 였다. 1445년(조선 세조 1)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이 곳에서 출 가하였고, 1548년(명종 3) 보우普雨가 이 곳에서 기도하다가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판사로 발탁되었다. 1643년(인조 21) 설정雪淨 이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 름을 바꾸었는데, 이름을 바꾼 데 따른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정이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암자에서 키웠는데, 어느 날 월동 준비를 하 기 위해 혼자 양양까지 다녀와야 했다. 그 동안 혼자 있을 4세된 어린 조카를 위 하여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조카에게 밥을 먹고 난 뒤 법당에 있는 관 세음보살상에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면 잘 보살펴줄 거라고 일러 주고 암자를 떠났다. 그러나 설정은 밤새 내린 폭설로 이듬해 눈이 녹을 때까지 암자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눈이 녹자마자 암자로 달려간 설정은 법당에서 목탁 을 치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 조카를 보게 되었다. 어찌된 연유인지 까닭 을 물으니 조카는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밥도 주고 재워 주고 같이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그때 흰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관음봉에서 내려와 조카의 머 리를 만지며 성불成佛의 기별을 주고는 새로 변하여 날아갔다. 이에 감동한 설 정은 어린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암 자를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856년(고종 2) 남호가 해인사의 고려 대장경 두질을 인출하여 1부는 오대산
상원사에, 1부는 이곳에 봉안하였다. 1888년(고종 25)에는 백하가 2층 법당을 짓고 응진전을 건립하여 16나한상과 각종 탱화를 조성, 봉안하는 등 크게 중건하였 다. 그 뒤 6·25 전쟁 때 일부 소실되었으나 지금도 수선 도량과 관음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두산백과사전 중에서 -
술이 어느 정도 오르니, 알딸딸함은 알딸딸함을 부르는지 수렴동계곡 끝자락에 있는 수렴동대피소의 맥주 맛 생각이 간절하다.
몇 년 전 직장 동료 두 사람과 천불동계곡을 거쳐 백담사쪽으로 내려오며 대피소마다 들려 맥주 두 캔씩을 마신 적이 있었다.
동료들은 아직도 가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 맛이었다고... 말을 하곤 한다.
드디어 수렴동대피소가 보인다.
맥주여~~~~~~~맥주여.
그런데 이제는 술은 못 팔게 되었단다.
아쉬움을 달래며 오세암 길을 오른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 오세암에 도착하여 으슥한 곳을 찾아 텐트를 치고 저녁을 준비한다.
산들산들 부는 시원한 바람 속에 꽁치 김치찌개를 곁들인 만찬 시간.
어찌 소주가 술술 넘어가지 않으리오.
어느 호텔의 음식이, 술이, 이보다 더 맛 좋으리오.
산속의 어둠은 일찍 온다.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텐트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침낭을 펴고 누우니 어느 호텔의 스위트룸이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있으랴.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날씨가 좋지 않아 별들의 향연을 볼 수 없음이나,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이 그리 흔하겠느냐고 자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