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이 청석령을 걸어서 올랐다면
글쓴이 조운찬 /
지난 8월 13~19일 다산연구소의 ‘열하 기행’단에 끼어 중국 단동(단둥)에서 북경(베이징)까지 옛 연행의 노정을 밟았다. 모두 2000리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연암 박지원이 36일에 걸쳐 답파한 길을 우리는 엿새 만에 주파했다. 열차, 자동차 같은 문명의 이기 덕분이다.
조선 사신들이 명·청의 수도 북경을 방문한 횟수는 낮게 잡아도 1500회가 넘는다. 길은 외길이었다. 명·청이 허락한 노정만 이용해야 했다. 해로를 이용하던 명·청 교체기를 제외하면 조선 오백 년 내내 한양~의주~연경(북경)으로 연결되는 노정에 큰 변화가 없었다. 사신단은 궤도 위를 다니는 열차처럼 거의 동일한 경로를 밟고, 정해진 숙소에서 생활하고, 동일한 의식에 참여하고, 비슷비슷한 관광을 했다. 그래서 600종에 달하는 사행 기록의 대부분은 《열하일기》처럼 빼어난 작품 몇 종을 제외하면 비슷비슷하고 고만고만하다.
조선과 청의 조공 질서가 무너지면서 연행길은 끊겼다. 마지막 연행이 있었던 1894년 갑오년을 기점으로 삼아도 벌써 130년이 넘는다. 그런데 왜 연행길을 답사하고 열하기행을 떠나는 것일까.
어저귀 꽃 핀 청석령 옛길
‘열하 기행’은 조선의 문호 연암 박지원을 만나는 이벤트였고, 그가 남긴 불멸의 여행기 《열하일기》를 현장에서 읽어가는 독서 여행이었다. 그러나 연행이 중단된 지 오래인 데다 산업화·근대화의 여파로 길이 끊기고 대지의 용도가 바뀌어, 이제 연행의 노선이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기행단은 대형버스에 몸을 싣고 압록강, 변문(옛 책문), 봉황산 산성, 통원보에 들렀다. 노선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점과 점을 연결해 답사하는 방식이다. 끊어진 옛길은 《열하일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으로 채워갔다.
기행 이틀째인 14일, 통원보, 마천령을 지나 첨수참에서 점심을 먹은 뒤 청석령 고갯길을 걸었다. 청석령은 연행길 가운데 드물게 옛 모습을 간직한 곳이다. 산이 깊고 험해 산업화의 힘이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연행 사절단들 사이엔 험준하기로 악명 높았던 고개이기도 하다. 청석령은 백두산에서 발해만 쪽으로 굽이치며 뻗어내린 산줄기가 지나는 곳으로, 첨수참에서 10리 남짓한 거리다.
버스에서 내려 청석령이 올려다보이는 산촌 마을에서 모두들 신들메를 고쳐 맸다. 고갯길은 뜻밖에 완만하고 평탄해 흡사 강원도 평창의 목장지대 같다. 사절단들은 험하다 했지만 그리 가파르지 않고, 비포장이지만 차가 다닐 만큼 닦여 있어 1970년대 시골 신작로를 걷는 느낌이다. 아래쪽은 온통 옥수수밭이고 중턱부터는 개암나무밭이다. 토실토실 영글어가는 개암 열매가 이채롭다. 한국에선 보기 어려운 과실이 됐지만 중국에서는 대량 재배해 간식용, 약용, 기름용으로 판다고 한다. 개암의 중국 이름은 진자(榛子)다.
길가에는 마타리, 갈퀴나물, 쑥부쟁이, 익모초, 꿩의비름, 족제비싸리 같은 들꽃이 형형색색 빛깔을 뽐냈다. 고갯마루 못 미친 길가에는 어저귀가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흙벽이나 벽돌을 쌓을 때 틈새가 나지 않도록 석회에 잘게 썰어 넣는다고 연암이 《열하일기》에 기록한 바로 그 들풀이다.
연암은 246년 전 음력 7월 7일(양력 8월 6일) 청석령을 넘었다. 이번 기행 때처럼 한여름이다. 연암 역시 첨수참에서 점심을 먹고 청석령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열하일기》에는 고개를 오르는 여정은 쏙 빠졌고, 고갯마루 관제묘에서 역관과 마두들이 분향하고 복을 빌고 참외를 사 먹은 에피소드만 실려 있다. 수국, 옥잠화, 촉규화, 석류나무 등 여름 초목의 이름을 꼼꼼히 적었던 연암이 첨수참~청석령 구간을 걸어서 넘었다면 어저귀를 비롯한 들꽃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에 남겼을 것이다.
청석령 고갯길은 병자호란을 전후해 세자, 대군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 백성이 볼모로, 포로로 끌려갔던 원통의 길이기도 하다. 1637년 소현세자와 함께 청의 볼모가 되어 이 재를 넘던 봉림대군은 부슬부슬 내리는 찬비 속의 참담함을 〈호풍음우가〉라는 시로 남겼다.
청석령 지나거냐 초하구 어디메오
호풍도 차도 찰샤 궂은비는 무슨 일고
뉘라서 내 행색 그려내어 님 계신 데 드릴고.
이는 훗날 노래가 되어 널리 불렸다. 연행길의 역사지리에 해박하고 조선의 임금과 신하, 백성의 애환을 모를 리 없었을 연암인데, 《열하일기》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마을에 흩어진 기와 부스러기나 쇠똥조차 놓치지 않고 기록했던 연암을 생각하면 다소 의외다.
말 탄 연암과 걷는 자의 시선
청석령에 대한 기록의 부재는 양반사대부 문화의 한계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연암은 한글을 등한시했다. 수많은 편지를 남겼지만 한글로 쓰인 것은 한 통도 없다. 연구자들은 연암이 한글을 몰랐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중국인과 필담을 나눌 만큼 한문에 자유로웠던 그에게, 한글 시조에 담긴 이 땅 사람들의 한(恨)은 굳이 새겨둘 주제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여기에 신분의 조건이 겹친다. 연행단은 홍수에 막혀 엿새가량 통원보에 발이 묶였다가 몹시 무더운 날씨에 깊은 산중 길을 재촉했다. 연암은 당연히 걷지 않고 말을 타고 청석령을 올랐을 것이다. 뜨거운 햇볕에 일산을 드리웠을 수도 있다. 더위에 지친 그는 주위 풍광을 살필 겨를은 없었고, 고개 정상 관제묘에 이르러서야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말을 탈 수 있는 자와 말을 끄는 자의 시선이 갈린 그 길에서, 걷는 자만 볼 수 있었던 것들을 연암은 기록하지 못했다.
겸재 정선의 작품 가운데 〈단발령망금강산〉이 있다. 겸재가 단발령에 올라 처음 금강산을 대하고 그린 그림이다. 고개 위에서는 양반들이 말과 가마에서 내려 웅장하게 펼쳐진 금강산의 장관을 감상하는데, 경사진 고갯길에서는 말을 끌고 가마를 메며 고된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연암의 화려한 연행길 이면에도 마부, 종 등 하인들의 노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탈중화주의, 실사구시, 과학기술 중시 등 근대적 사유를 제시한 연암이었지만, 그조차 정작 자신의 풍성한 연행을 뒷받침했던 하인들의 시선은 안중에 없었다. 《열하일기》 청석령 기사에서 겸재의 그림이 겹쳐 보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출처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