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홍성남의 속풀이처방 중앙일보 입력 2022.12.01 00:26
이태원 참사, 그 무감각과 몰이해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가방 124개, 옷 258벌, 신발 255켤레. 주인 잃은 물건들의 집합소가 된 다목적 실내체육관. 귀하디 귀한 젊은 생명 158명이 인파에 밀리고 넘어져서 세상을 떠났다. 세월호 이래 가장 많은 우리 아이들이 떠나갔고, 전 세계가 애통해했다.
이 참담한 시기에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갑작스레 죽은 영혼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아직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많을 텐데 얼마나 살고 싶어 했을까 생각하면 그 억울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희생자 부모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놀러 나간 아이가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의 심정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자식 먼저 보낸 부모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그때 내가 말렸더라면’ 하면서 자책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친구와 연인을 잃은 생존자들도 돌봐야 한다. 살아남은 사람 역시 미안함과 자책감에 일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곁에서 함께해야 한다. 죽은 아이들도 우리가 그래 주기를 바랄 것 같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유족들에게 2차 가해를 가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제삿밥을 차려준 주민에게 우상숭배니 무속신앙이니 하며 돌을 던지는 자들은 공감능력 부재자이다. 그들은 신심이 깊은 자들이 아니라 종교 성격장애자, 광신도이다. 마음에 사랑과 연민이 없는 믿음은 선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기인한다.
자칭 도사라는 천공이란 자의 발언도 상식의 선을 넘었다. 아이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에 앞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망언은 세월호 때 하느님께서 아이들을 대한민국의 희생 제물로 삼으셨다고 한 목회자를 연상케 한다. 하류 무속인이 권력에 아부해 입지를 다지려는 모습이 해괴하고 끔찍하다. 대통령에게 용의 기운이 넘치는 용산으로 가라고 권한 것이 천공인데, 지척에서 참사가 벌어져 점괘가 어긋나자 문책당할 것이 두려워서 둘러대었다는 이야기도 떠돈다.
또한 놀다가 죽은 애들에게 정부가 무슨 책임이냐면서 정부를 두둔하는 자들에게는 ‘네 자식이 죽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되묻고 싶다. 잔인한 말을 내뱉는 자들은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 부메랑이 되어 재앙이 들이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참사의 재발을 막기 위해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청년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번 참사의 첫 번째 원인은 정부가 청년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어 하는 노인들과는 달리, 청년들은 붐비는 곳에서 몸을 부대끼면서 살맛을 느낀다. 노인들은 심리적 안정을 중시하면서 흥분하지 말라 하지만, 청년들을 살맛 나게 하는 건 짜릿한 흥분이다.
왜 그런가? 청년들은 가진 것이 없고 미래도 불안정하다. 이런 상황에 혼자 있으면 점점 더 우울해진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살맛을 느끼기 위해 인파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또한 개인이 집단 속에 파묻히면 이성을 잃기도 하고, 질서가 깨지기도 하므로 미리 더 많은 경찰 병력을 투입해서 통제했어야 한다. 청년들에 대한 몰이해가 참사를 부른 것이다.
두 번째로 대통령보다 국민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한다. 대통령과 청년 중 더 중요한 사람은 당연히 청년들이다. 대통령은 몇 년 후면 임기가 끝나지만, 청년들은 이 나라를 이끌어 갈 미래의 기둥이다. 당연히 그 누구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청년들보다 대통령 한 명의 안전을 더 우선시한다. 엄청난 수의 청년들을 위해서는 소수의 경찰만이 투입된 반면, 이태원 근방 대통령 집무실에는 이중삼중의 경호벽이 세워졌다. 경호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참사 이후 정부의 대응은 바람직했나? 조직의 내실은 역경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지금 정부는 각료들이 이구동성으로 책임을 회피하며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토끼머리띠를 한 희생양을 찾고, 경찰에게 덮어씌우고, 소방관을 문책하며 온갖 치졸한 모습을 보인다.
동물학자들의 한 실험이 떠올랐다. 뜨거운 바닥에 새끼를 놓았더니 암컷들은 새끼를 안고 자기가 뜨거운 데 앉는 반면, 수컷들은 새끼를 깔고 앉더라는 실험. 그 수컷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이렇게 무책임한 자들이 앞으로 몇 년 더 대한민국호의 국정운영을 한다니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따뜻한 편지 2331)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은 ‘공동’, ‘협력’, ‘협업’, ‘협조’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보와 데이터를 비롯해 메시지, 의견 등을 서로 전달하는 것이라면, 컬래버레이션은 바로, 이 커뮤니케이션에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컬래버레이션이란, 두 상대가 더욱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서로에게 합리적으로 납득시키는 것입니다.
세대와 세대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 발생하는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서로의 생각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이른바 컬래버레이션을 한다면 맞닥뜨린 눈앞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가족 구성원 사이에도 컬래버레이션이 필요한데 현대 사회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반인륜적 범죄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가족 구성원 사이에도 서로의 생각과 말과 입장 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방증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가 긴밀히 지내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조금씩만 노력한다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 ‘몸을 닦고 집을 안정시킨 후에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정한다.’
나라의 안정이 가정에서 시작한다고 볼 만큼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가정의 화목을 중요시했습니다. 가족 구성원 간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납득시키려는 노력이 건강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모든 싸움이 자취를 감추고 사랑이 싹트는 곳이요.
큰 사람이 작아지고 작은 사람이 커지는 곳이다.
– 하버트 조지 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