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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꽃이요 축제라고 하는 국회의원 선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사람 마다 선거 결과에 대하여, 정부의 독선과 오만과 무능에 대한 심판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일부 후보들의 막말과 위선까지도 덮어버릴 정도로 그 분노와 심판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가 추락한 우리 사회의 도덕성의 단면을 보여주었다며 걱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번 선거의 결과를 좀 더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디딤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쓴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편지형식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편지에서 흔히 보이는 발신인, 수신인도 밝히지 않고, 첫 인사나 끝인사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편지라기보다는 한편의 설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발신인과 수신인을 적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의 교인들이 잘 알고 존경하는 한 교회 지도자가, 당시 기독교 공동체에게 써 보낸 글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는 이단 사상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아직 기독교의 교리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체험하고 깨달은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자신의 철학적인 지식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믿으려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 이단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이단은 영지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정신과 물질이라고 하는 두가지 실재를 우주의 근본 원리라고 주장하는 희랍의 철학입니다. 이 이원론에 따르면 세계는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상에는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고, 사람도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질에 속하는 인간의 육은 결국은 소멸되고, 영혼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영혼만 구원을 받기 때문에, 육신으로는 어떤 짓을 해도 상관이 없게 됩니다. 육체라는 것은 어차피 썩어 없어질 거니까,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이 너무나 쉬워졌습니다. 범죄를 저지르는데 아무 거리낌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회개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자기 멋대로 본능과 정욕을 따라 죄짓고 악한 일을 해도 상관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과 영혼을 구분하다보니, 실제의 삶과 신앙은 별개가 됩니다. 육신은 벗어버리고 영만 구원을 얻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는다.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일 잘 지켜 예배드리고, 헌금 잘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함으로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믿음 생활만 잘 하면 축복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생활과 사회 생활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한국교회에 퍼져있다 보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의식이나 도덕 수준이 일반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비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은 잘못된 이단의 미혹을 받는 당시의 그리스도 공동체와 교인들을 향하여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그래야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가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그 앞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의로우심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의를 행하는 자를 볼 때,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난 사람인 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보라!” 일종의 감탄사입니다.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베푸셨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 희생의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이 사랑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나 아닙니까?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 아닙니까?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하도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그 피흘림의 공로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랑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입은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 사랑을 입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영접하고 대속의 은혜를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래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미 얻은 구원과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우리를 심판하실 ‘미래’ 라고 하는 시간 가운데,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내일의 운명을 알지 못합니다. 청소년 대학생 시절, 젊은 시절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도 하고, 제자훈련도 받고, 전도도 하며 열심히 주를 섬겼는데, 학교를 마치고 결혼도 하고 사회생활도 하면서, 점차로 믿음이 식어지고, 신앙과 담을 쌓고, 교회 생활 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래에 언젠가 그가 나타나실 때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일지, 어떤 신분일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말씀하였습니다. 장차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 그분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는 소망입니다. 그날에 우리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을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진 자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3절 말씀대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그날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을 만나뵐 소망을 가진 자라면, 오늘 그리스도가 깨끗하심과 같이, 전혀 죄가 없으셨던 그분과 같이 자기를 깨끗케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예수의 특징을 ‘깨끗하심’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오늘을 살아가며, 그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 부활과 영생에 참여하는 소망을 가진 자라면, 마땅히 스스로를 깨끗케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깨끗하심 같이 우리 또한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하심’이라는 말은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하그노스’입니다. 이 ‘하그노스’는 ‘의로움’을 뜻하는 ‘디카이오스’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번역은 이 하그노스, 깨끗하심이란 말을 pure라고 했습니다. cleandl 아니라 pure입니다. pure는 ‘순수하다’는 의미도 있고, ‘완전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순수하고 완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면 마땅히, 힘써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순수한 신앙과 순수한 영혼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 또한 순수하고 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였는데, ‘깨끗함’은 구약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혹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자 할 때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출애굽기 19장 10절과 1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날에 여호와 하나님은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하셔서 백성들에게 친히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제 삼일에 여호와를 뵙기 위해서 오늘과 내일, 백성들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준비는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성결하게 하고 옷도 빨아 입어야 합니다. 성결한 몸과 마음으로, 그리고, 성결의 옷을 입고 그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수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수기 8장 21절에 보면, 레위인들이 회막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서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자신들의 옷을 빨고, 먼저 여호와 앞에 제사를 드려서 속죄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한 후에 비로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나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거나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스스로를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우리가 어떻게 될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날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어서 부활과 영생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스스로를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영혼,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될 수 있도록, 순수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죄사함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나는 과연 어떤 존재로 그분 앞에 서게 될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삼일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다만 오늘과 내일,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죄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에 많은 분들이 당황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어떤 공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를 가지고 이루어가는 것, 공로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라고 하는 그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말은 ‘죄로 인하여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9절에 보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말합니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죄로 인하여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 이 구원은 미래시제입니다. 지금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우리는, 장차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을 얻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마지막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구원얻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과 내일, 그 믿음과 확신과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뿐 아니라 외적으로 드러나는 삶에 있어서까지 죄에서 떠나서, 깨끗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성화‘라고 말합니다.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3절)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소망은 온통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 날 우리의 구원은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 소망으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를 애를 씁니다. 그리스도가 깨끗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의롭고 성결하게 살아가기를 힘을 쓰는 것입니다.
7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 죄로부터 구별되고, 의를 행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야 한다고 오늘 요한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