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조는 시조의 가락에 동심을 담아 낸 현대시조의 한 갈래이다. 그것이 시조이기 때문에 옛스러움으로의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이다. 전통적인 시조에 비해서 현대시조는 소재가 다양해졌고, 그 내용도 교훈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동시조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암묵적으로 순종하는 소극성을 탈피하여 자유로운 자아표현을 전제로 하면서 그 가락 또한 현대화한 것이다. 이것은 동시조가 가지는 형식적·내용적 특징이 된다. 정리하면 동시조는 가락의 규격성을 유지하면서도 의지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시조는 현대사회의 해체 속에 이기적인 자기 분열을 끊임없이 좇아가는 자유분방함을 자제하는 그 경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이를 넘나들면서 시조에 동심을 심어 박경용 시인은 그의 시력 50주년에 맞추어 연작 동시조 「음악 둘레 내 둘레」와 「속편 음악 둘레 내 둘레」, 「나, 할아버지의 대변인」을 한꺼번에 발표하였다. 이 중 음악관련 작품을 따로 모아서 『음악 둘레 내 둘레』라는 동시조집을 냈다.
이 시조집에는 총 104편의 작품이 발표되어 있는데, 차분히 읽으면 한 가족의 일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속에는 연휴를 맞이하는 가족의 모습, 지친 아빠의 생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다정함, 제삿날 등 가족의 일상사가 담겨 있다. 하나의 특징은 이러한 일상 한가운데 음악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서 대상에 동화되고 대상과 합일하고 있다. 음악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을 먼저 살펴보자.
난데없이 날아든
‘아이네 클라이네’를
칭얼대던 아기가
낚아채어 싱긋 빙긋.
기분이
가벼워진 버스가
숨 고르게 달려가요.
-박경용의 「싱긋 방긋」 전문
버스 안에서 아기가 음악을 듣고 싱긋 빙긋 웃고 있다. 흔들리는 버스 안은 아기에게는 고통의 시간이다. 이 순간에 음악을 듣고 아이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를 아기가 이해하면서 들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 곡의 아름다운 선율과 명쾌함은 힘든 상황에서 잠시라도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웃음을 띤 아기가 음악 소리에 웃는 것은 음악이 이루는 조화로움이 동심의 순수와 통한 것이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달랜 음악은 버스의 흔들림 마저 진정시키고 있다. 이처럼 음악의 조화는 순수와 통하고 마침내 흔들리는 버스마저 숨을 고르게 한다. 즉 음악은 혼탁한 세상도 함께 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모습은 인간이 바라는 아름다움이다. 이처럼 일상의 한 가운데 음악을 둠으로써 시인은 세계와 소통하고 또 자아와 세계를 융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시적 사유를 살펴보는 것이 이 동시조집을 읽는 재미가 될 것이다.
시인의 시적 사유를 밝히는 것은 시적 주체형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의 주체형태는 시인이 시적화자를 내세워 세계와 교섭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주체형태를 파악함으로써 시정시의 현실 인식을 알 수 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인용 동시조에서 ‘아이네 클라이네’를 낚아채어 싱긋빙긋 웃는 아기는 현실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는 시적주체가 된다. 이것이 박경용 시인의 동심이다. 즉 동심의 표상체계에 자신을 동화시키지 않고 또 자신의 이미지를 동심에 투사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낚아채어”라는 중장의 시구에서 확인된다. 음악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린다. 특히 시적상황으로 보아 ‘아니네 클라이네’는 어디선가 날아든 것이다. 이것을 아기가 낚아채고 있다. 이 시적 상황의 중심에 있는 아기는 어머니의 손길에 의해서 보호되고 달래야 할 동심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의 주어진 여건을 자기화할 수 있는 적극적인 동심이다. 그래서 이 동시조에서는 ‘음악-아기’가 가지는 조화와 순수가 세계(버스)를 순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절대 개인보다는 상호관계적인 융화를 강조한 시인의 의지로 볼 수 있다. 이 융화는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서구의 개인적 사유가 아니다. 아이네 클라이네의 감미로움에 아기가 싱긋빙긋 웃고, 버스의 기분이 덩달아 가벼워진 시적 상황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융화는 개성까지 소멸시키는 희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다음의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마다 부신 별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어깨를 낮추고는
스스로 빛을 아껴
받드는 빛무리 하나를
살찌운다는 거예요.
-박경용의 「고향악단 연주를 보며」 둘째 수
이 동시조에서 화자는 음악 맛도 맛이지만 “표정조차 지워버린/ 늙수그레한 악사들”이 펼치는 고향곡에 가슴 뭉클함을 느낀다며 옷깃을 여미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하나의 빛을 향해서 스스로 빛을 아끼는 자기희생은 교향곡의 웅장함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박경용의 『음악 둘레 내 둘레』에는 ‘음악’이 서정적 화합을 이루는 근원이 된다. < ‘동심의 표정 동시의 미학(김종헌, 소소담담, 2017)’에서 옮겨 적음. (2019.02.26.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