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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묵상글 들 ( 부활 8부 월요일 - 두려움 없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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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부활 8부 월요일-두려움 없이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대체로 욕망이나 재미나 성공을 추구하기에
건강을 신경 쓰지 않는 편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러니까
건강이 나빠지면서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지요.
그래서일까 마라톤 대회나 등산을 가면
젊은 사람들은 많지 않고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은 편인데
대체로 50이 넘으면 등산이나 마라톤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50이 넘어가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인생의 지혜도 생기는데
지금까지 돈이나 성공에 최우선 가치를 두다가
이제는 건강에 최우선 가치를 두게 되고 그러면서 다른 가치 있는 것들도
덩달아 제자리 정렬을 하는 부수효과가 있지요.
이것이 지혜로운 인생의 건강 생활이라면 지나친 건강 생활도 있지요.
우리가 흔히 건강 염려증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이 정도가 되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건강 염려증과 지혜로운 건강 생활을 가르는 기준이 뭘까요?
그것은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 없으셨다고
하는 것처럼 건강에 사로잡히느냐, 사로잡히지 않느냐 바로 그것입니다.
보통 사로잡힌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다고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두려워할 때 사로잡히고 그래서 건강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건강한 인생을 위하여 건강을 추구해야 하는데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나 정신이 병이 들고 그래서 어떤 경우
몸까지도 망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그것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아플 수도 있는 것인데 절대로 아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아픔은 고통이나 두려움이 되고 이것이 마음이나 정신의 병입니다.
우리가 자주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픔과 괴로움을 동일시하는 것인데
아픔이 그저 통증 정도라면 괴로움 또는 고통은 마음이나 정신으로
확장된 아픔이고 삶의 질이나 인생의 행불행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지요.
사실 아프다고 다 괴로운 것이 아니고,
아프니까 내 인생은 불행하다거나 괴롭다고 할 때 괴로운 겁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아플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아파도 행복할 수 있어야 건강하고 행복한 거지요.
오늘 독서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스스로 죽으실지언정
죽음에 사로잡히지는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사랑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사랑 때문에 죽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도 죽음까지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이 두렵지 않도록 사랑을 살아야겠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자기 사랑이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이런 묵상을 오늘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며칠 전 어떤 분으로부터 미사 예물을 받았는데
당신의 선종을 위해 미사를 드려달라는 거였습니다.
받으면서 무슨 이런 미사를 벌써 드리냐는 투로 제가 대꾸를 했는데
사실 저도 벌써부터 선종을 생각하고 대비하기에 공감하는 바였지요.
'고통 없이'가 선종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가 선종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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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마태 28,7)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을 극심한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이라는 당혹스런 사실 앞에서, 믿음의 흔들림과 의혹과 허탈감으로 절망과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붙잡혀 죽게 될까 봐 불안에 떨어야 했고,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그 깊은 어두움 속에서도 결코 갈망이 식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두려움보다 컸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깊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움이 되어 이른 새벽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게 했고, 거기서 그들은 천사를 만나 놀랍고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마태 28,7)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면서 ‘평안하냐?’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천사를 통해 사명을 주었건만, 굳이 열절하신 사랑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주 오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향하여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인간을 향하여 계신 분”(본 훼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나 여기 있노라.”(이사 58,9;이사 66,1) 하시며, 이미 찾아와 우리 앞에 계십니다.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셔서, 우리가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예수님을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붙잡혀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당신 앞에, 항상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당신 면전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어, 막달레나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당신 부활을 선포하는 첫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달아나버린 제자들을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떠났어도 진정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이미 그들을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내 형제에게로 가라” 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부활하시어 첫 사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제들 안에서 예수님을 뵈올 것입니다. 척박한 땅 갈릴래야,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로 이 땅, 바로 여기,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형제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할 때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서 피어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형제를 사랑하게 하소서.
형제들 안에서 당신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주님!
당신은 제가 가는 곳에 항상 먼저 와 계십니다.
항상 먼저 오시어 나를 기다리시는 분, 결코 저를 떠나지를 못하시는 분
제가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고, 제가 찾으면 ‘나 여기 있노라’ 하시고,
제가 숨으면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고,
먼저 제 안에 들어와 ‘어서 가자’고 이끌어 가시는 분.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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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첫인상은 소통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심리 때문에 일단 형성된 첫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저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첫인상에서 느낀 감정을 계속 만날 때마다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에도 예외가 있듯이, 첫인상이 쭉 간다는 것 역시 분명 진리는 아닙니다.
심리학에서 처음에는 비호감이었지만 자주 보게 되면 차츰 호감으로 변하는 현상을 ‘에펠탑 효과’라고 합니다. 19세기 말,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320m 철탑 계획은 당시 파리의 예술가와 시민들의 엄청난 반대를 가져왔습니다. 파리 한가운데에 엄청난 흉물이 탄생할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기념탑이 지어지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 갔습니다. 계속 보면서 탑의 모습에 익숙해지고 친밀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 탑이 바로 ‘프랑스’ 하면 떠오르게 하는 ‘에펠탑’입니다.
사람의 첫인상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첫인상이 나빴어도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면서 바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금씩 친밀해지는 과정이 편견을 벗겨버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한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계속 만나면서 친밀감을 키우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만남에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과의 관계가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도록 우리의 노력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무덤을 찾아온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당신의 몸을 보여주십니다. 그 큰 사랑을 준 제자들에게 먼저가 아니라 여인들에게 먼저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서 주님께 대한 사랑을 접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주님을 찾으면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계속된 만남을 통해 주님을 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여러분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편견과 부정적인 마음으로 그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계속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고통과 시련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돈독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복음의 여인들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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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더 사랑하는 것밖에는 사랑의 치료법이 없다(H.D. 도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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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의 중요성.
전쟁은 어마어마한 손실과 희생을 초래합니다. 그래서 ‘평화’는 모두를 잘살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경제적 피해를 떠나서 인명 피해는 다시 복구할 수 없기에 절대로 전쟁이 나서는 안 됩니다.
1983년 9월 26일, 당시 소련과 미국이 서로 전쟁할 뻔했던 엄청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냉전 시대의 긴장이 극에 달했을 때였지요. 소련(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중령이 근무하고 있던 관제소에 비상경보가 울렸습니다. 미국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 5기가 발사되었다는 긴급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곧바로 반격해야 우리 측의 피해를 줄일 수 있기에, 곧바로 소련에서도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페트로프 중령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3차 세계 대전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그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선제 타격으로 겨우 5기의 미사일만 쏘았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조기경보시스템 오류’를 상부에 보고했고, 햇빛에 반사된 인공위성이 시스템 오류로 미사일로 오인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의 판단으로 몇천만 명을 살린 것입니다.
이렇게 판단은 매우 중요합니다. 판단의 원칙은 바로 상황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더 정확하고 모두에게 유익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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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신부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자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사건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기쁨과 두려움을 안고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이 그분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주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해진 부활 사건은 두려움을 이겨 수 있는 기쁨이 되고, 누군가에게 전해진 부활 사건은 거짓말이 됩니다. 전해 받은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부활은 달라집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 매순간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하겠습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 그분이 우리 인생 안에서 행하신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업적을 잊지 말기로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을 잃고 희망이 없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기억, 그분의 선하심과 우리 마음을 울리던 그 생명의 말씀을 기억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징표들을 알아볼 줄 아는 새벽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되기 위하여 그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듭시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열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고 그분이 주시는 희망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희망을 향하여 우리를 개방하고 걸어가기로 합시다. 그분의 말씀과 업적에 대한 기억은 찬란한 빛이어야 하며 그 빛은 영원한 그 파스카를 향한 우리의 신뢰 어린 발걸음을 인도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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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8,8-15: 병사들에게 많은 돈을 집어주며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8절) 그들은 상상도 못 한 놀라운 일들을 보았다. 그 여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였다. 바로 얼마 전에 그분이 안장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 무덤이 비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빈 무덤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천사들이 그들을 무덤으로 데려간 것이다.
그 여자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9절) 하신다. 그들은 몹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았고 확신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0절) 주님께서는 이 여인들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
경비병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하러 왔을 때, 사제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며 부정한 일이 일어났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13절) 라고. 그러나 무덤은 권력자의 명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무덤 주위에는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리고 무덤을 막고 있는 거대한 돌을 옮길 수 있었을까? 그들이 돌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 몰래 그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설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안 된다. 유다에게 돈을 주어 배신하게 했던 사제들은 경비병들에게도 돈을 주고 입을 막아 신앙을 무덤 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칠 생각이었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장되고 무덤이 봉인되기 전에 시신을 훔쳐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무덤에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골방에 숨어있었다.
수석 사제들은 무덤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빌라도에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치고서는 부활하셨다고 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렇게 되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마태 27,64)이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돈을 주고 그분의 목숨을 사더니, 그분이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시니, 또다시 돈을 주고 그분이 부활하신 증거를 지우려 했다. 그들은 돈만 쓰고 말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진리를 은폐하려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마치 태양을 손으로 가려보려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비병들만 매수해서 가릴 수 있었다면, 그 진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현실적으로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은폐하기보다 진리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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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 10)
있어야 할
우리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새로운
시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두드리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갈릴래아가
더더욱
아름다워진다.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면
모든 일상은
아름다운
선물이 된다.
아름다운
생명의
선물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듯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부활의
시작이다.
첫걸음
첫만남
첫마음을
다시
떠올린다.
마음을 울린
뜨거운
갈릴래아의
마음이다.
마음은
그 만남을
잊을 수 없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음을 만난
갈릴래아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갈릴래아는
뜨거운
만남이다.
뜨거운
만남이
눈물겨운
부활이다.
아름다운
부활 인사를
건네신다.
"평안하냐?"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주님께서
주시는
이 마음이다.
마음을 만나면
길이 보인다.
마음을 만나는
것이 주님과
형제들을 만나는
것이다.
부활은 마음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아름답게 하시는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일상의
마음으로
되살아나신다.
일상안에서
보게 되는
다채로운
마음이다.
일상안에서의
기쁜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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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직접 본 이들은 없습니다. 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그분을 증언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오십일 동안 이 부활의 기쁨을 노래할 것입니다. 특별히 부활 팔일 동안 말씀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증언하는 이들과 함께 축제를 지낼 것입니다.
여인들은 아직 어두운 새벽녘에 집을 나서서 무덤을 보러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천사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6)라는 놀라운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다음의 말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태 28,7). 이 소명을 받은 여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소식을 전하러 달려 나갑니다.
이 여인들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소명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닮아 자신에게서 나와 아픈 이에게 다가가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거기서 당신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이 있는 곳이자 그 울부짖음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뽑으시어 함께 사람들을 섬기기 시작하신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첫 자리로, 첫 마음으로 돌아가 섬김의 삶을 새로이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날마다 삶을 새롭게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는 다가오시어 조용히 인사하십니다. “평안하냐?”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게 마주 오시며 인사하십니다. ‘평안하냐’는 그리스 인사말로 ‘기뻐하시오, 기쁘냐?’라는 뜻입니다. 장엄한 축복의 말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로, ‘잘 지내니?’ 정도의 인사말입니다. “평안하니? 잘 지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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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한 예언자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한 믿음과 굳센 용기를 갖춘 사도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증언하며 자신들도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오늘 독서가 소개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도 그러합니다.
공생활 동안 불 같은 성급함과 소심한 비겁함을 아울러 보여주었던 모습도 베드로의 진실이었겠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담대한 믿음과 신중한 처신을 보여주는 모습도 베드로의 진실입니다.
부활 전보다는 부활 후의 진실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베드로의 참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는 다윗 조상에 대하여 그의 공과 과를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목동이라든지 임금이었다든지 하는 인간적 포장을 다 걷어내고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예견했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하느님의 예언자로 예우하였습니다.
그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독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에서도 부활 체험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며
부활 이후에 참모습이 드러난다는 관점을 견지하는 입장은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체험한 사람들이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성과 평신도들이 남성과 성직자에 비해 사도직에 있어서
더 부활체험에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들은,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 헤로데의 집사인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등(루카 8, 2-3)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 일행을 도와드린 후원자이자 은인들이며
또한 봉사자들이었는데, 그들의 전력이나 집안에 대한 소개도 역사적 사실일 것입니다만,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 그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더 먼저
만나 뵈옵고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해 주었다는 사실을 높이 보셨습니다.
그 여인들은 제자들을 사도들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여인 중의 한 사람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를 위한 사도’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교령 「사도들을 위한 사도(Apostolorum Apostola)」, 2016.6.3.).
이러한 영예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몫으로 봉사와 증언에 불리운 요안나, 수산나 등
다른 여인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져야 합당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보다
부활 체험 이후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관한 진실입니다.
실로 개인이든 집단이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토록 부활을 둘러싼 진실이 중요하고
또 중요한 만큼 위력적인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신앙의
열기가 식어 있거나 활기를 띠고 있다면, 그 원인은 단연코 부활 체험에 달려 있습니다.
부활 신앙의 영향력이 개인 인생이나 인류 역사의 원동력(原動力)인 동시에 추동력(推動力)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죽게 한 악인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스승을 은전 서른닢에 팔아 넘긴 유다, 협잡과 조작으로 재판한 카야파, 진실을 무시한
빌라도 그리고 협박한 바리사이들과 그 선동에 놀아난 군중까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으로 앞당겨진 당신의 죽음을
도약대로 삼아서 인간의 죽음을 쳐 없애시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창조 이래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믿음과 자유를 제한하는 장애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어서 마귀에게 그리도 쉽게 넘어 갑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믿기가 그리도 어려운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서 삽니다. 믿음 대신 얻은 이 겁이야말로 사람들의 진실입니다.
믿는 이들은 의로울 것이요, 믿지 않는 이들은 비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쳐 없애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어차피 한 번은 다가옵니다. 누구나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운명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더군다나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을 믿는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체험이 있는지, 그 체험에 따라 세상의 현실
저 너머에 있는 그 나라와 그 생명을 갈망하는지 여부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시인 성찬경 사도요한은 한국 천주교 200주년에 순교 성인들을 기리며
<부활>을 이렇게 노래한 바 있습니다(시집 「황홀한 초록빛」).
세상에 의인이 가득 찰 때
땅에 하늘나라가 세워지리니
아름다워라 하느님의 뜻.
세상에 의인이 안 차는 것은
너도 나도 그런 생각 안하기 때문.
우리 모두 의인이 되도록 하세.
우리나라 의인으로 가득 찬 나라.
하느님의 평화 깃든 고요한 나라.
그 기운이 차츰 널리 퍼져서
온 세상에 의인이 가득 차리라.
그때엔 땅 위에
빛과 사랑의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리라.
이 땅에 빛을 내려주시는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
영원한 찬미와 영광.
피에서 피어오른 영광.
사랑하는 오늘의 겨레들이여,
여러분께 무한한 축복을 보냅니다.
우리 복음 역사를 순교로 이어주신
주님께 더욱 감사를 드립시다.
순교는 은총의 꽃 중 꽃이기에,
여러분도 순교정신 이어가시오.
치명의 순교 말고
말씀을 위해 양심의 피 흘리는 순교도 있소.
이렇게 모두가 순교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주님께서는 다시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넘치는 광명을 주실 것이오.
교우 여러분! 부활의 은총이 가득하시어 의롭게 살아가는 다윗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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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선진국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일 수 있습니다. 과학과 문명이 발전한 나라일 수 있습니다. 사회복지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나라일 수 있습니다. 시민들의 참여의식이 높은 나라일 수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적은 나라일 수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적은 나라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선진국이 보여주는 결과들입니다. 선진국에는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 3가지를 가진 나라들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풍요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시련과 고통이 다가와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던 나라들이 다시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군인들이 정권을 빼앗고, 부정과 부패로 얼룩지는 것은 3가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3가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기본기’입니다. 운동선수들에게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기술을 익히기 전에 체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의 야구선수들은 어린나이에 변화구를 익히고, 던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게임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지만 어깨가 다치기 쉽고, 부상당하기도 쉽다고 합니다. 대학생이 되어서 빠른 공을 던질 수 없다고 합니다. 결국 프로의 세계에서는 경쟁 할 수 없다고 합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4강으로 올려놓았던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이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약하다고 하였습니다. 체력을 키운 후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학생들은 선행학습으로 미리 배우고, 암기하기에 좋은 성적을 내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과도한 학습으로 지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신뢰와 예의는 선진국이 되는 기본기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기본기’가 필요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지식은 많았지만 신앙의 기본기가 적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제생활에 기본이 되는 것은 기도의 생활화입니다. 수영은 이론만으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직접 물속에 들어가서 연습을 해야만 수영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본기가 부족한 사제들은 쉽게 지치기 마련입니다. 수영과 마찬가지로 기도는 책으로만 배울 수 없습니다. 직접 기도를 하면서 기도의 맛을 느껴야 합니다. 성체조배를 자주 하는 사제, 묵주기도를 자주하는 사제, 아침 일찍 묵상하는 사제, 강론을 성실히 준비하는 사제는 기본기가 충실한 사제입니다. 기도가 생활이 되는 신앙인은 기본기가 충실한 신앙인입니다.
둘째는 ‘움직임’입니다. 자신의 얻은 부와 재물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에게는 가치와 의미를 물려주고,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은 나라는 부정과 부패가 적습니다. 욕망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한 가지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매일 한 시간씩 운동을 하는 학교와 매일 한 시간씩 공부를 더 하는 학교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수학 시험을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매일 한 시간씩 운동을 한 학교의 학생들이 수학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뇌도 운동을 해야만 더 활성화 되고, 자란다고 합니다. 한국의 학교는 체육시간을 없앤다고 합니다. 움직임이 없으니 아이들의 비만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움직임이 없으니 평균 키도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지,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였던 사제와 레위 사람은 실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치료해 주었고, 돈이 부족하면 다음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모두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왜?’라는 질문입니다. 선진국은 당면한 문제에 정의를 내린다고 합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선진국이 아닌 나라는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모방을 한다고 합니다. 정의를 내려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고 살기에 바쁘기 때문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따라 하기 마련입니다. 코로나19을 겪으면서 한국은 ‘왜?’라는 질문을 던졌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효과적인 방역으로 코로나19의 위기를 잘 극복하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한국의 방역 시스템을 따라하였다고 합니다. 효과적인 검사를 하기 위해서 ‘드라이브 스루우와 워킹 스루우’를 만들어 냈습니다. ‘추적, 검사, 치료’라는 시스템을 만들어 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왜?’라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묻지 않는 신앙은 자칫 광신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묻지 않는 신앙은 이단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어떤 신앙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왜?’는 질문에 답변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는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살려주셨는지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갈릴래아는 복음을 전하셨던 곳입니다. 많은 이적과 표징을 보여주셨던 곳입니다.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던 곳입니다. 가파르나움,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 절름발이, 소경, 세리, 죄를 지었던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갈릴래아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움, 근심, 걱정, 절망, 아쉬움, 불평, 불만을 던져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편안하십니까?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 이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다시금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이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은 변해 있었습니다. 내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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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 파스카의 삶 -
어제의 잊지 못할 일들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대축일 미사에 앞서 제의방 미사예물 봉투에 적힌 말마디에 마음이 순간 환해 졌습니다. “감사미사, 김기쁨 글라라”, 파스카의 기쁨으로 살아가야할 우리들 모두가 일명 참 좋은 이름, ‘기쁨’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어제는 두분의 죽음 소식도 들었습니다. 피정을 마치고 간 어느 자매로부터 귀가 즉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연미사를 드려달라는 부탁이 있었고, 얼마전까지 카톡을 나누던 바로 저보다 2살 위의 정다운 ‘해철’ 사촌형의 죽음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의 죽음이 웬지 기쁨의 부활로 연결되는 듯 생각에 슬픔도 감소되는 듯 했습니다.
이어 요즘 유명인사들의 죽음도 생각났습니다. 3.27일에는 ‘신라면, 새우깡, 짜파케티’ 국민식품의 작명의 달인이자 농심의 창립자인 성실했던 ‘신춘호’ 사업가가 91세에 영면에 들었고, ‘시대의 어른’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 4.2일 노환으로 향년 86세에 별세하였으며, 제가 바둑에 심취해 있던 젊은 시절 그 인품과 기풍을 참 좋아했던 한국 바둑계의 거목, ‘영원한 국수’ 김인9단이 어제 4.4일 향년 78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입니다.
너무 확실한 죽음인데 평소 까맣게 잊고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죽음을 대할 때 마다 우리의 부활 신앙은 더욱 간절할 수 뿐이 없습니다. 생사를 넘어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삶과 영성을 체화體化하여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은 끝부분으로 세부분, 즉 ‘예수님 부활, 여자들에게 나타나심, 경비병들이 매수됨’으로 순서로 구성되어 있고, 제1독서 사도행전은 성령강림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입니다. 앞으로 부활 제7주간 까지 계속될 예수님 부활 선포에 관련된 제1독서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천사로부터 주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자들은 두려움과 큰 기쁨을 안고 귀가 도중 결정적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엎드린 여자들에게 친히 부활의 기쁜소식을 친히 전하는 주님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가 상징하는 바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현장이요 믿는 우리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형제가 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맏형으로 모신 형제들인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주님 부활을 체험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부활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매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복음 선포의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증인’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대표 베드로가 그 모범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주님 부활을 체험한 초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에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어 베드로는 다윗 시편(16,8-11)을 들어 주님 부활을 입증한 후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주님 부활을 선포하며 성령의 선물을 통보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에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생생한 예수님 부활체험인지요! 그대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주님 부활이요 성령임을 깨닫습니다. 이보다 확실한 사실은, 진실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경비병들은 수석사제들에게 매수되어 예수님 부활은 유언비어임을 전하게 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전하여라.”
정말 믿지 않는 이들은, 주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이들은 유언비어에 현혹될 수 있겠습니다. 많은 경우 유언비어가 진실로 드러나지만 오늘 경비병의 경우는 분명 사실에 대한 왜곡임을 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믿지 않는 이들은 이 사실까지도 유언비어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처럼 참으로 주님 부활을 체험한 믿는 이들에게는 이보다 분명한 사실은, 진실은 없습니다. 돈을 받고 매수된 비겁한 경비병들 역시 약한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유언비어가, 거짓 프레임이 범람하는 세상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날마다 하루하루 주님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삶과 영성을, 진리와 지혜, 진실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은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시편118,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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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부활을 대하는 여러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마태 28,8)
천사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이 그 소식을 전하러 서둘러 떠납니다. 두려움과 기쁨.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지요. 게다가 일생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을 자기 입으로 전해야 하는 메신저의 역할까지 부여받은 터입니다.
"평안하냐?"(마태 28,9)
그런데 진짜로 예수님이 마주 걸어오시며 말을 건네십니다. 평안하고요... 참, 그 험한 일을 겪고 죽으셨던 분이 당신을 사랑하던 이들의 처참한 고통을 모르실 리 없는데, 평안하냐고 물으시다니요...
예수님이 평안하신 겁니다. 혹독한 수난 여정을 건너 죽음을 받아들이신 뒤, 모두가 끝이라고 여기는 그 죽음을 이기고 이렇게 살아오신 예수님께서 평안하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흔히 죽음을 각오한 이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지요.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죽음에 짓눌리지 않는 힘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 이는 담대하고 초연하며 평안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여인들의 두려움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을 다독이십니다. 초현실적인 사건은 으레 두려움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예수님과 함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언급하십니다. 그분의 구원 사명이 시작된 곳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희망으로 전율했던 첫마음의 장소입니다.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고, 가난한 이들과 이방인이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한 곳입니다. 구원이 눈물과 피땀이 뒤범벅된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짐을 깨달은 곳이기도 하지요.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부활의 원리와 근거에 대해 설교합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사도 2,23)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사도 2,2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2,24)
먼저 이 엄청난 부활 사건은, 성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과 예지였음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당시 재판권과 처형권을 가지고 있는 로마인의 손을 빌어 그분을 죽인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대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죽음을 순종으로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지요. 이로써 생명과 죽음은 예수님 권능 아래 복종하게 됩니다. 이 모두를 이루신 하느님의 계획과 예지야말로 부활의 원리입니다.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사도 2,30-31)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다윗을 성왕으로 여겨 믿고 자랑합니다. 그 다윗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편에서 이미 부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고, 베드로 사도는 유다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부활의 근거를 성경 안에서 찾아 짚어 줍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마태 28,13)
아마도 이것이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믿고 싶은 바일 겁니다. 그들에게 부활 사건은 기존 종교 질서의 전복과 직결되니, 어떻게든 자신들의 주장을 지켜야 했을 겁니다.
사실 마태오는 '경비병들이 천사의 발현을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라쳤다'(마태 28,4 참조)고 앞 대목에서 언급했지요. 그러니 경비병들은 예수님 부활 사건의 직접 증인입니다. 하지만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기득권을 위해 진실을 은폐했듯이, 경비병들은 "많은 돈"을 위해 입을 닫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이렇듯 각자의 이익을 위해 각색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어떤 의미를 주는지 숙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배층들이나 경비병들처럼 기득권과 이득 앞에서 진실에 눈감지 않고, 첫마음으로 돌아가 기득권의 경계 밖에서, 가난과 불안정한 현실에 발을 딛고, 예수님과 함께 새 복음화의 길에 헌신할 열정을 일으키는지요.
진정 우리가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 변모되길 바랍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안고 갈릴래아로 달려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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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
'갈릴래아!'
그리고 '삶의 자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갈릴래아'로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
그 중요한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지구 건너편에 있는 이스라엘 땅 갈릴래아인가?
갈릴래아는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마태오복음 28장 10절의 말씀'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도 '삶의 자리'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할 곳도 '삶의 자리'라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삶의 자리'는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삶의 자리에 '하느님'이 계시고,
삶의 자리에 '나의 이웃'이 있습니다.
'삶의 으뜸 자리'는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 공동체 안에 있는 내 부모와 내 자녀 그리고 내 남편과 내 아내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내가 사랑해야 할 가장 가까운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삶의 자리에 계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삶의 자리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증인입니다."(사도2,32)
이는 오늘 독서(사도2,14.22-33)가 전하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핵심입니다.
갈릴래아인 나의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도 그곳에서 부활하도록 합시다!
삶의 자리에서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춤들을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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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끌어당김의 법칙’(시크릿) 완결판, ‘갈릴래아의 법칙’
오늘 복음은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과 대비되는 인물들도 나오는데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이나 경비병들 모두 천사를 보았습니다.
여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하였고 경비병들은 까무러쳤습니다.
여인들은 천사들의 말대로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러 가는 중이었고 경비병들은 유다인들에게 돈을 받고 예수님을 제자들이 훔쳐 갔다고 거짓을 말하며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여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천사가 말한 것과 똑같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여인들은 천사들의 말대로 갈릴래아로 가면 거기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알리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말은 갈릴래아로 가라고 복음을 전하는 삶이 바로 갈릴래아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갈릴래아는 받은 물을 내어놓아 생명이 풍부한 호수이고 사해는 받는 것을 자신만 가지려 해서 죽어버린 바다입니다.
여인들은 갈릴래아처럼 가진 복음을 전하고 있었고, 경비병들은 가진 복음을 돈으로 바꿔치기하며
자신 안에 들어온 생명력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경비병들이 아닌 여인들에게 나타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 여인들을 통하여 두 가지 갈릴래아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의 법칙은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끌어당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전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원대로 예수님을 끝까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끌어당김의 법칙’(시크릿)을 믿습니다. 누구나 무언가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종교 서적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무언가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비밀을 적은 책입니다.
그리고 이 법칙으로 기적과 같은 결과를 끌어들였다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유튜브에 있는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목이 ‘7000억 매출 사업가가 되기까지 60번 읽은 한 권의 책’입니다.
‘켈리 최’라는 중년 여성인데, 저는 이분이 어떤 분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이 동영상에 나온 대로만 정리하자면, 켈리 최의 우리나라에서의 학력은 중졸입니다.
어린 시절 고단하고 가난했던 가정환경 속에서 열일곱 살이 되던 해부터 서울에 올라와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사업에 실패해 10억 원의 빚더미에 앉기까지 했습니다.
마흔이 넘어 무일푼으로 다시 수많은 책을 읽었고 그중에 60번 읽고 항상 틀어놓은 동영상도 ‘시크릿’이었습니다.
시크릿은 세상에서 성공한 모든 이들이 가진 비밀을 말해 놓은 책인데 간단히 정리하면 이런 법칙입니다.
1. 원하는 것을 간절하게 구하고 원하라
2. 영감이 떠올랐을 때 즉시 행동하라
3. 언제나 기분 좋은 마음을 유지하라
켈리최는 미국에서 도시락을 팔아 성공한 김승호 회장을 모델로 유럽에서 도시락 사업을 모델로 하여
유럽에서 창업 10년 만에 연 매출 7천억 원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책을 추천하라면 자신이 쓴 책, 『파리에서 도시락을 파는 여자』 보다 『시크릿』을 더 추천한다는 것입니다.
‘시크릿’은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끌어당기는 법칙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끌어당긴 여인들을 이 법칙에 적용해봅니다.
1. 원하는 것을 간절하게 구하고 원하라: 여인들은 그리스도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2. 영감이 떠올랐을 때 즉시 행동하라: 여인들은 남자들이 주저할 때 즉각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천사를 만났을 때 그 천사들의 말대로 즉각 움직였습니다.
3. 언제나 기분 좋은 마음을 유지하라: 여인들은 천사들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면서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빠진 핵심요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분 좋기 위해 그들이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4. 기쁘게 내어주어라.’입니다.
기쁘게 내어주는 것이 더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갈릴래아는 사해와는 다르게 받아들인 것을 내어주어 생명력이 있는 바다입니다.
여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달려갈 때 참 복음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만나지 못한 사람은 전할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이미 충만히 가지고 있기에
복음과 동시에 가진 것도 내어줍니다.
결국, 끌어당김의 법칙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만, 갈릴래아의 법칙은 기쁘게 내어주려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참 기쁨을 얻고 싶다면 지금 알고 있는 복음을 기쁘게 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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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때에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진정한 부활의 경축
요 몇 년 사이 참으로 큰 스승들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가 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정확하게 이정표를 제시해주시던 분들, 지난 시대 우리들의 빈약한 정신세계를 그나마 정화시켜주시던 분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마더 데레사 수녀님, 선우경식 원장님,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
그런데 이런 분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마다 참으로 특별한 느낌 한 가지가 마음에 남습니다.
분명 그분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의사로부터 명확하게 물리적, 신체적 죽음이 판명되었고, 우리들 눈앞에서 장례를 치뤘고, 땅에 묻혔습니다.
분명히 그분들은 더 이상 여기, 이 세상에, 우리들 눈앞에 안계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분들은 분명히 우리들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우리 정신 안에, 우리 영성 안에, 우리의 사고 안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그분들이 살아 생 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절절한 사랑, 그 따뜻한 인간미, 그 소박함, 그 인자로움,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은 아직도 생생하게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 앞에 어렴풋하게나마 부활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한다는 것,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의 자취가 우리 안에 남아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분께서 남겨주셨던 사랑의 삶을 우리 생활 안에 재현시키는 일이 아닐까요?
그분께서 온 몸으로 보여주셨던 섬김과 봉사의 삶이 내 삶 안에서 되풀이되는 일이 아닐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수의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낸 후 빈 무덤에 남겨놓고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셨듯이, 우리도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껍질 (불신의 껍질, 의혹의 껍질, 죄의 껍질, 죽음의 껍질, 교만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힘차게 일어선 후 밝은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는 것이 우리 각자가 이뤄내야 할 부활이 아닐까요?
비관적이고 수동적이고 적대적이던 우리의 사고방식을 빈 무덤 속에 내려놓고 긍정적이고 호의적이고 수용적인 사고방식으로 새 출발하려는 마음이 우리 각자에게 해당되는 부활이 아닐까요?
아무리 큰 풍파가 닥쳐온다 할지라도, 아무리 상황이 꼬이고 꼬인다할지라도 관대한 시선, 낙천적인 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 삶을 직면하려는 모습이 부활의 영성을 살아가는 길이 아닐까요?
전에는 땅에 근본을 두고 살았다면 이제는 하늘에 근본을 두고 살려는 마음, 전에는 육에 몰두하고 살았다면 이제는 영에 몰두라고 살아가려는 마음,
전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발버둥 쳤다면 이제는 하느님과 이웃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려는 마음이 내 안에 부활을 되살려내는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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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5.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은 인간의 완고함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형사 재판 시스템은 ‘증거재판주의’입니다. 모든 건 증거로 재판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소송법에서도 법률로 명문화해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고한 희생자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즘 국가적으로도 많은 국민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몇 번 언론에서 히트가 된 말이 있습니다. DNA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 피의자에게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극구 부인하고 있는 사정입니다. 아직까지는 정확한 범죄 피의 사실이 소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단을 할 수가 없지만 진실은 나중에 밝혀진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시간이 좀 더 흘러야 될 것 같습니다. 한 인격에 대해 도덕인 비난을 떠나서 이 사건을 보면서 언론이나 범죄심리학 전문가의 의견을 굳이 참조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 사건을 보면서 저는 여러 가지로 많은 걸 생각해봤습니다.
아직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가 없는 사정입니다. 지금 사실 언론과 수사기관에서도 정황증거로만 가지고 범죄사실을 추론하는 사정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의 수를 가지고 생각한다고 해도 두 가지의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짓말, 하나는 진실, 이렇게 양분됩니다. 만약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서 지금의 피의자의 범죄 피의사실이 사실로 밝혀진다는 걸 전제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남의 일이지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증거보다도 형사소송법적으로도 증거능력이 가장 탁월한 과학적인 증거가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범죄사실을 부인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번에 아주 중요한 걸 하나 알았습니다.
일부에서는 피의자가 형량을 감량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면 아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조금 설득력이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아둔해서 그런지 그건 두고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보다도 좀 더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지금 나와 있는 범죄사실이 소명되는 것보다 배후에 있는 사실, 그게 다른 범죄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범죄사실 여부를 떠나서 다른 관련 어떤 사실이 노출되는 게 지금 자신의 범죄사실보다도 더 자신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피의자는 그게 두려워서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범죄사실을 극구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고 생각해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과학적인 증거인 DNA보다 더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가 나와야 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서 하나 느낀 게 있습니다. 사람의 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수치스럽지만 죄를 인정하고 죗값을 치르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일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보다도 수치입니다. 그만큼 수치가 죄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여실히 증명해 주는 케이스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어느 부분에서는 공감을 할 수가 있지만, 개개인에 따라서는 오히려 수치스러움 때문에 인정이 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지금은 수치 때문이라고 단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정확한 결과가 나온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헌법이 보장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예단을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이라는 전제를 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실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인데도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자처한다고 종교지도자들은 되지도 않은 죄명으로 신성모독이라는 미명 아래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실제 그들이 예수님께 누명을 씌운 범죄사실이 거짓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게 현실로 명명백백하게 실현된 것입니다. 설령 그땐 그들의 영안이 막혀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이젠 사실이 밝혀진 이상 하늘을 우러러보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하느님께 석고대죄를 해야 될 상황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자기들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경비병을 매수하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들이 경비병을 매수했다는 사실에서 벌써 이미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건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이지만 사실로 인정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흔히들 범죄자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렇다고 인정을 한다고 해도,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젠 최종적으로는 총독까지도 매수를 하겠다는 심산으로 자신들을 방어하려고 하는 모습을 오늘 복음은 보여줍니다.
상당한 비약을 하는 건 모르지만 어느 정도 선을 넘어가면 하느님이 하느님이심을 증거하는 명확한 증거가 나와도 회개하지 못하는 그때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종교지도자가 단순히 복음에 나오는 종교지도자만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제 생각이 아니고 우리 가톨릭에서 공인된 성경 주석의 한 부분에 나옵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 주석에서는 그렇게 설명은 되어 있지 않지만 단순히 과거의 시간이 아니고 현제의 시간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단어의 문법적인 시제를 풀이한 해석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사건은 2000년 전의 단순한 사건의 한 예가 아니고 지금도 적용되는 유효한 사건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이와 같은 결론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완고함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아집입니다. 아성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아집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은 아집이라는 게 하느님까지도 거부할 수 있게 하는 무서운 독버섯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아집의 위험성을 언급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에서' 자신이 바로 아성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아집이 될 것입니다. 불교나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아지경에 이르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야 참 부처를 만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극기승자 즉, 자기를 이기는 자가 천하승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아성과 아집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에서는 마음을 내려놓는 ‘하심’을 끝까지 수행하는 이유도 우리와는 조금은 다른 것이지만 원리는 비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보는 영광을 누린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곁을 지키려고 했던 여인들입니다. 제자들도 아닙니다. 제자들은 비겁하게 다 도망갔습니다. 이 여인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지켜서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여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에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는 게 여기서 증명이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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