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에게는 놀라운 자기 보호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나운 짐승이나 몸집이 큰 동물이 습격하면, 큰 바위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리 사납고 강한 동물이라도, 바위틈에 몸을 숨긴 다람쥐를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작고 나약한 다람쥐에게는 거대한 바위산이 천연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이렇게 하여, 다람쥐는 작고 연약하지만, 맹수에게 결코 잡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다람쥐처럼 우리도, 살아가다가 난처한 일을 겪을 때, 잠시라도 피할 곳이 있다면, 그 난관을 견뎌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광활한 벌판 위에 그대로 노출된다면, 모든 위험을 그대로 감내하는 가운데, 때로는 좌절감도 겪게 될 겁니다. 본문의 기록자인 다윗은, 본문에서 자신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구원하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반석이요, 산성이라고 고백합니다. 성도된 우리의 신앙은 믿음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신앙이 있다면서, 믿음이 있다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을 말로만 의지하는 겁니다. 이러한 다윗처럼, 또, 바위틈에 몸을 숨기는 다람쥐처럼, 우리에게도 난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대한 바위산이 있다면, 그 곳이 “하나님의 품 안”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피할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쓰나미와 같이, 또는 커다란 노도가 몰아칠 때, 항구의 배들은 단단히 결속합니다. 배들이 항구로 들어와 단단히 결속되는 것 또한 이러한 피난처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말로만 하나님을 찾고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단단히 결속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고난이나 또는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을 구해줄 피난처를 찾아 어디론가 피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그 피난처를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 삼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신뢰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본문의 기록자인 다윗이 피난처로 삼은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그 증거가, 이 땅에 성자이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신실하심의 약속을 가리켜, “횃불 언약, 소금언약”이라고 합니다. “횃불 언약”은 창 15장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체결에서 보여지며, “소금 언약”이라고 함은, 민 18: 19을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고 합니다. 또, 대하 13: 5을 보시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라고 합니다. 이처럼, 소금 언약은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한 언약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오 신실하신 주”의 가사를 보시면, “오 신실하신 주 하나님 한 번 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횃불 언약”과 “소금 언약”을 믿지 않는 다면, 어찌 이 찬양을 부를 수 있으며, 어찌 이 찬양으로 우리가 위로를 얻겠습니까? 또, 이 찬양에 우리의 소망을 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본문의 다윗과 같이, 성도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과 보호하심을 굳게 믿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세상 풍파를 뚫고 나감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 - 4을 보시면,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된 우리의 반석과 산성이 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임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을 보시면,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에 자신의 구원에 대한 근거를 두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이 간구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 단단히 결속시킵니다. 다윗이 살아간 삶 속에는, 온갖 어려움이 다 있었습니다. 찰떡같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했고, 하나님으로 징계를 받아 처절한 삶도 살았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뼈 저리는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윗에게는 든든한 반석과 산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에게 완전하고 안전한 피난처이심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어릴 적 목동으로 지낼 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을 체험했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모든 대적과 전쟁을 치룰 때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랬기에, 본문 4절을 보시면,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비밀히 친 그물”은 다윗을 헤하려는 자들의 음모나 사악한 계획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이러한 음모에, 다윗은 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다윗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지혜로워서가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다윗은 철저하게 믿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전 1: 25을 보시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합니다. 지혜로우시며, 세상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신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보호하시며, 우리의 산성이요, 반석이 되심을 굳게 믿음으로, 다윗처럼 신실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 - 6을 보시면,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다윗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듯,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맡기고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다윗의 대적이 나옵니다. 누굽니까?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입니다. 이 표현은, “신실하신 하나님”과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다윗을 둘러싸고 있는 고난이나 악한 환경 또는, 상황에서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구원과 보호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곧,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으로, 자신의 생과 사의 문제가 온전히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성도된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 이러한 신앙과 믿음이 있습니까? 다윗은, 위급할 때나 평온할 때나 변함없이 언제든지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별세에서 살아가는 별세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스데반이 바라보았던 하나님을 보아야 하며, 사도 요한이 보았던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상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근본적인 죄이기에, 하나님을 진노케 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도 본문을 통해, 다윗과 같이, 우리를 위협하거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우리의 보호처가 된다며 유혹하는 우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우상은, 어떠한 형상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하나님 대신 믿고 의지한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숭배에 대해, 우리는 본문의 다윗과 같이 증오하며, 우리의 영을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 - 8절을 보시면,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 속에 거합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다윗은, 환난과 고난이 찾아와도 또, 대적들이 자신을 에워싸도, 이에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가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자신을 돌보고, 자신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그 순간만 모면하게, 잠깐 숨겨주고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돌보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본문 8절을 보시면,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보호 속에 거한다는 겁니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촉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목회자인 “존 비비어”는,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오직,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보호를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을 보고 아셨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주셨다가 아니라,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도 잘 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거나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 41: 10절에서 우리를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며, 41: 18절에서는,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윗과 함께 하시며, 다윗의 산성과 반석이 되신 하나님께서, 성도된 우리를 이와 같이 사랑하고, 우리에게 날마다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시며,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 역시,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마음 깊은 고백을 기억하며, 우리의 산성과 반석이 되시며, 영원토록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찬양하는 가운데, 우리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고, 우리가 계획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탄탄한 곳에 이르는 형통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의 삶 가운데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