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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 「본론」의 유가 예의(禮義)와 불교 축출 및 성리학의 제약
2026년 9월 21일
중국 양송(兩宋) 시기에 성리학은 중국 역사상 생이지지(生而知之) 성인(聖人)이 없었다고 결정하였고 그래서 성리학에는 돈오(頓悟) 또는 불립문자의 수양 공부가 없고 누구도 본체를 깨달았다고 오도성(悟道頌)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불교 배척과 함께 생이지지와 돈오를 엄격히 제한하였고 학이지지(學而知之)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라는 점진적 학습 방법 원칙을 굳게 준수하였습니다.
이러한 제한과 제약을 설정한 학자들 가운데 구양수(1010-1071)가 가장 강력한 주장을 내놓았고 인종 가우(嘉祐) 2년(1057) 정월에 예부 공거(貢擧)를 맡아 진사 시험을 담당하여 훌륭한 인재들을 선발하였습니다. 당시 인종 황제(仁宗)와 고급 관원들도 구양수 축불론(逐佛論)을 동의하여 양송 시기 학계가 지킬 원칙이 되었고 남송 시기에도 지켜졌습니다. 어긋나면 위학(僞學)이며 금학(禁學)을 당하고 퇴출당하였습니다.
북송 시기 구량수 이래로 설정된 배불 원칙은 뒤에 성리학에서 본심 돈오 또는 본체(仁)의 돈오에 관한 학술 주장과 언론을 금지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리학은 『중용』에서 말하는 이발(已發)을 연구하되 미발(未發)의 문턱을 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미발의 경계선 앞(未發之幾)까지 다가가더라도 넘지 않았고 또는 다가가서 넘자고 주장하였더라도 결국에는 이발입니다. 이발의 끝 곧 미발의 문턱까지 가려는 수양 공부가 주경(主敬) 공부입니다.
또한 도교에서 유(有)를 넘어 무(無)에 들어가야 한다고 소옹(邵雍)이 선천 체험을 주장하더라도 성리학은 이를 배척하고 경계선(有無之分際)을 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성리학자들은 『주역』을 연구하더라도 복괘의 “일양복래(一陽復來)”를 넘지 않았습니다. 주자학에서 아무리 미발을 해석하고 설명하더라도 이발에 그치는 이유는 북송 구양수 이래로 결정된 제한 원칙에 있었습니다.
북송 초기 태조와 태종 및 진종 여러 황제는 삼교의 대화(對話)를 허용하였으나(三敎調和) 인종 연간에 고문운동(古文運動)이 일어난 뒤부터 사라지고 관원들은 원칙적으로 배불을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관원 개인들은 불교를 믿고 귀의하였고 황실에서도 불교와 도교에 경제적 지원을 끊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당나라 말기와 오대 시기에도 불교 배척 주장이 많았고 인종(仁宗) 연간에도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부흥시키자는 여론이 강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을 외국과 구분하여 유가 문화를 지키자는 여론(華夷之辨)입니다.
구양수는 젊은 나이에도 정계와 학계의 두터운 신임과 기대를 받았기에 후학에 끼친 영향력이 대단히 컸습니다. 구양수가 32살(1042)에 쓴 「본론(本論)」 3편 가운데 제2편(中)은 유가의 예의(禮義)를 발전 보급하여 불교를 몰아내자(修本勝佛)는 유가 문화 독존론 또는 유가 문화 자립론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양수의 「본론」(中)을 한유(韓愈)의 「원성(原性)」 이래로 최고 견해라고 높이 꼽았습니다.
북송 신종(神宗) 황제가 희녕 2년(1069)부터 왕안석을 임용하고 변법을 실행하였고 왕안석은 1058년부터 변법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몇몇 원로 관원들과 젊은 관원들이 반대하였습니다. 구양수도 인종 경력신정(慶曆新政)의 포기를 보았기에 왕안석 변법을 반대하였습니다. 반대하던 젊은 관원들은 지방 관직으로 좌천되거나 관계를 물러났습니다. 이들이 점차 강학 활동을 펼치면서 왕안석을 반대하는 학술이 나왔는데 나중에 보수파 가운데 강경하였던 정이천 학술이 성리학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현재 구양수 「본론」을 읽어보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사례와 증거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국가와 사회를 경영하는 사회과학에 너무 치충한 것이고 개인의 행복을 증진하고 고통을 해소하는 소위 인문학에는 잼병입니다. 더구나 32살에 썼기에 학술 수준이 떨어지고 견해도 좁은 내용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향력은 대단히 컸습니다.
다시 말해 구양수의 「본론」 3편은 현대 학술 눈으로 보면 사회과학에 속합니다. 구양수는 국가(황제)가 관리자 계층(官員, 士)을 운용하여 생산자 계층(農工商)을 관리하는 정치적 사회적 관점이 강합니다. 맹자의 말처럼 국왕과 황제는 국가를 잘 경영하기 위하여 농공상 계층이 생산 수확한 농산물과 수공업품 및 교역 이익에서 일부(10%)를 징수하여야 하며 지속적인 징수를 위하여 이들 계층이 배고프고 춥지 않도록 잘 관리하자는 인정(仁政)입니다. 구양수는 백성을 잘 관리하기 위하여 유가의 예의(禮義)가 부수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구양수의 가장 큰 잘못은 사람을 하나하나씩 개인으로 보는 관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산 의욕과 목적은 국가 운영을 위한 납세와 군대에 징발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물질적 정신적 생활과 행복을 위하여 생산합니다. 유가는 국가와 사회를 경영하는 경세(經世)에 치중할 수 있으나 개인의 행복을 증진하고 불행과 고통을 해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들어와서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효과를 설명하였기에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한당(漢唐) 시기에 불교는 백성 개개인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구양수가 개인의 행복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는 인종의 경력 신정((慶曆 新政)이 실패하여 감옥에 갇혔다가 경력 4년(1044)에 저주(滁州)로 좌천되었던 것입니다. 이듬해(1045)에 구강(九江)에 들러 여산(廬山)을 유람하고 운문종 거눌(居訥, 1010-1071) 선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탄복하였습니다. 거눌 선사는 오심(悟心)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설명해주고 평등심을 갖고 자만심(我慢)을 버리라고 일러주었습니다.(『佛祖統紀』,卷第四十五) 이때부터 구양수가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고 알려졌으나 불교 배척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닙니다. 구양수가 계숭(契崇) 스님도 만났다고 알려졌습니다. 소순(蘇洵 1009-1066)도 1047년에 거눌선사를 찾아와 즐겁게 담론하였다고 합니다.
구양수 「본론」에는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구양수는 요순 이제(二帝)와 하은주 삼왕(三王) 시기에 정전법이 실행되고 모든 통치제도가 완비된 중국의 황금시대라고 굳게 믿는 신고(信古) 견해가 강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장 전체에서 지나치게 시고비금(是古非今) 태도가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이제삼왕(二帝三王)을 지나치게 미화한 견해가 많습니다. 따라서 한당(漢唐) 시기를 무시하였습니다. 왕조 경쟁에서 북송 시기의 인구 숫자와 경제 규모가 한당시기를 넘어섰다고 보는 견해를 반영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요순과 삼왕은 백성이 성악(性惡)하니까 교육에 힘썼다고 구양수가 미화하였습니다. 결국에 맹자의 성선설에 어긋나기에 뒷사람들은 구양수의 심성론이 순자(荀子)에 가깝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셋째, 역사 변화의 원인이 추세(勢)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변동(social change)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넷째, 구양수는 불교의 교리(佛敎)를 비판하지 않고 불교와 연관된 의식과 풍속(佛法)을 비판하였습니다. 아마도 불교가 중국에 끼친 영향이 모두 부정적이었냐고 되묻는 것을 미리 방어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다섯째, 구양수가 화이지변(華夷之辨)을 넘어 중국 고립의 화이지방(華夷之防)까지 주장하였습니다. 외래문화를 저울질하지 않고 무조건 배척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여섯째, 구양수가 유가의 왕도(王道) 정치와 예의(禮義)를 부흥하여 외국 불교를 몰아내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중국에 맞는 유가 본래 예의를 부흥하자는 견해에는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을 고립시켜서 유학 독존으로는 발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구양수의 말이야 들으면 간단하지만 실제 현실사회에서는 간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젊은 패기와 과격한 태도가 넘칩니다.
일곱째, 구양수는 개개인의 고통과 행복에 관심이 덜하였습니다. 아마도 젊고 자만심과 명예욕이 컸기 때문입니다.
구양수, 「여산 스님 거늘에게 올림」 :
네모 눈은 물처럼 맑으시고 어깨에는 승복을 걸치셨는데,
오랜만에 만나 뵈니 저의 마음이 시원합니다.
오백 나한 가운데 일심을 깨달으신 스님이시니,
총림에 현자가 계신 것을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歐陽修,「贈廬山僧居訥」︰
方瞳如水衲披肩,邂逅相逢爲灑然。
五百僧中得一士,始知林下有遺賢。
출처︰『歐陽修集』,卷五十二,『居士外集』,卷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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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 「본론」(中) 번역 :
불교 의식(佛法, 法은 ritual and institutions, 佛敎보다 貶稱)이 중국에 들어와서 재앙을 끼친지 1천 년이 넘었는데 우뚝하게 나타나서 불법에 속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불법을 없애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과거에도 불법을 없애면 다시 승려와 신도들이 모이고 공격하여 잠시 해체하면 더욱 견고해지고 때려잡더라도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하면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 활활 불탔습니다.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과연 불법을 없앨 수 없겠습니까? 없앨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질병에 대하여 반드시 먼저 질병의 원인(病因)부터 찾아낸 뒤에 질병 부위를 치료합니다. 사람이 병에 걸리는 까닭은 사람의 건강 상태가 나빠져 저항력이 약한 틈을 타고 병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훌륭한 의사는 질병 치료보다는 먼저 건강하도록 예방 의학(養生)에 힘씁니다. 건강하면 질병도 낫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효험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쇠퇴 상태를 구제하려면 반드시 먼저 국가 쇠퇴의 원인을 찾아낸 뒤에 문제가 심각한 부분부터 개혁합니다. 불법은 외국(夷狄) 것이며 중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요순임금과 하은주 삼대에는 왕도 정치(王政)를 밝게 잘하여 예의(禮義) 가르침이 온 세상에 잘 보급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불법이 중국에 들어왔더라도 받아들일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은주 삼대가 몰락하고 왕도 정치도 사라지고 예의도 버려진지 2백여 년 뒤에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불법이 우리 중국에 재앙을 일으킨 원인은 중국에서 왕도 정치가 사라지고 예의가 버려진 틈에 들어왔다는 것입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재앙을 일으킨 근본 원인입니다. 왕도 정치를 재건하고 예의를 다시 보급하여 왕도 정치가 밝아지고 예의가 널리 보급되면 아무리 불법이 있더라도 우리 백성에게 해를 끼칠 까닭이 없습니다. 이것도 자연스러운 사회추세(勢)입니다.
옛날 요순임금 이제(二帝)와 하은주 삼대의 왕도 정치는 정전법(井田法)을 실행하였는데 먼저 천하의 인구를 호적에 등재하고 노동력(口, 경작 능력이 있는 성인 남자)을 계산하여 토지를 분배하였습니다. 경작할 수 있는 성인 남자들은 누구나 토지를 받아 경작하였습니다. 국가는 경작자에게 수확량의 1/10(10%)을 거두는데 풍년과 흉년 정도에 따라 세율에 차등을 조절하였기 때문에 경작자의 생산 의욕을 북돋아주었습니다. 따라서 농민은 밭에서 경작에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일에 신경 쓰거나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농민이 과로하거나 태만해져 살기 위하여 삐뚤어진 미신(邪僻)을 믿을까 걱정하고 가축과 술을 만들어 건강을 증진하고 여러 악기와 제사를 만들어 눈과 귀를 즐겁게 하여 정서를 순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겨울철 농한기에는 예의를 가르쳤는데 사냥을 좋아하는 습성에 따라 군사 훈련의 예의를 만들고, 시집가고 신부 맞는 습성에 따라 혼인 의례를 만들고, 죽으면 장례 치르는 습성에 따라 상례와 제사의 예의를 만들고, 모여서 음식을 먹고 마시며 노는 습성에 따라 활 쏘는 운동경기의 예의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예의들은 백성의 반란을 미리 방지하고 또 습성에 따라 예의를 만들어 가르쳐서 관직과 신분의 높낮이와 나이의 순서 같은 중요한 윤리를 알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산 사람을 잘살게 하고 죽은 사람을 잘 보내는 모든 도리(예의)는 백성의 욕구(『荀子』, 「禮論篇」)에 따라 만들었고(制) 의례에서 꾸미는(飾) 물품들도 다양하고(采) 세련되었기(文)에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들이 습성과 취향을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백성의 성정(性情)에 따라 예의를 조절하였기에 백성들이 예의를 방어하여 예의의 등급(禮數)을 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국가는 이러한 예의 제도화도 부족하다고 여겨서 학교를 세워 알아듣도록 설명해주었습니다. 위로는 천자의 직접 지배지역부터 아래로는 향당(鄕黨) 단위까지 학교를 세우고 백성들 가운데 똑똑한 사람들을 뽑아 배우게 하여 이들이 서로서로 알려주고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들에게도 착하게 살도록 권유하도록 하였습니다.
아! 얼마나 잘 갖추어놓았습니까! 하은주 삼대의 왕도 정치가 이와 같습니다. 백성을 이해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아주 치밀하였고 백성을 다스리는 제도가 잘 갖추어졌고 백성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방어하는 정책도 범위가 넓었고 백성을 유도하려는 방법에도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국가는 이러한 정책들을 아주 꾸준히 실행하였기에 혜택을 입는 백성들도 만족하여 정책에 협조하였고, 정책을 점진적으로 실행하였기에 백성들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 박혔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일상생활은 밭에서 농업 생산에 힘을 쏟거나 농한기에는 예악(禮樂)을 즐겼으며 집에 있지 않을 때는 학교에 갔습니다. 백성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모두 인의(仁義)이며 즐겁게 따랐고 지칠 줄 몰랐습니다. 평생에 이상한 문물을 본 적이 없는데 어찌 외국 문물을 숭상할 틈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앞에서 “불법이 들어왔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이렇게 좋은 문물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주(西周)가 멸망하고 춘추전국시기를 거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까지 삼대의 좋은 제도를 모두 없애버려서 왕도 정치가 끊어졌습니다. 뒷날 황제들이 왕도 정치를 회복하려고 힘들게 애써도 회복할 수 없었던 까닭은 통치제도가 잘 갖추어지지 않았고 또 백성들이 예의의 분수를 넘지 않도록 방어하는 점진적 정책 실행도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법이 이때 틈을 타서 들어왔고 1천여 년 동안에 불법을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고 중국의 왕도 정치와 예의는 날로 무너졌습니다. 정전법이 가장 먼저 무너졌기에 토지를 겸병하는 대지주와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간사하게 생겼습니다. 이로부터 순수(巡狩), 혼인, 상례와 제례, 향사례 등 백성을 교화하는 제도가 하나둘씩 무너져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나쁜 백성들은 한가하게 다른 문물에 관심을 가졌고 착한 백성들은 예의를 직접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쁜 백성들은 경제적 여력을 갖고 삐뚤어진 미신을 생각하였고 착한 백성들은 예의를 경험하지 못하여 어디로 갈지를 몰랐습니다. 불법이 이때 틈을 타서 들어와 과장되고 황당한 주장을 북을 치듯이 널리 알리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았기에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불법에 귀의하였습니다. 또한 왕족과 귀족 및 정치인도 수시로 크게 떠들며 사람들을 몰아가며 “불법은 정말로 귀의할 만하다”고 부추겼습니다. 그렇기에 중국 백성들이 어찌 의심하지 않고 귀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불법에 속지 않는 사람(韓愈)이 나타나서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며 “불법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기를 들고 몰아내야 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또 “내가 글을 지어 불법을 배척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천년에 걸쳐 불법의 재앙은 세상 구석구석까지 퍼져있는데 어찌 한두 사람이 하루 이틀에 몰아낼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도 불법을 믿는 신앙심이 뼛속까지 박혔는데 어찌 입 안의 혓바닥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대답은 우리 중국 본래의 예의를 발전시켜서 불법을 이기는 것입니다. 옛날 전국시기에 양주(楊朱)는 이기주의를 주창하고 묵적(墨翟)은 겸애주의를 주창하여 세상을 어지럽혔습니다. 맹자가 이것을 걱정하여 오로지 인의(仁義)를 주창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인의 주장이 이겼고 양주와 묵적의 주장이 사라졌습니다. 한(漢)나라 시기에는 제자백가가 흥성하였는데 동중서(董仲舒)가 이것을 근심하여 물러나서 공자를 연구하였습니다. 결국에 공자의 학술(道)이 밝아지고 제자백가의 학술은 식어서 꺼졌습니다. 이것은 우리 중국 본래의 예의를 발전시켜서 이단 학술을 이긴 성공 사례입니다.
현재 키 크고(八尺之夫 : 北宋 1척은 현재 31.68cm이며 출토문물은 32.9cm) 건장한 체격의 군대 지휘자들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적군들과 용감하게 싸워야 하는데 불상을 보면 엎드려 절하고 불법 강연을 들으면 무서워하고 숭모하는 신앙심은 무엇입니까? 저들이 정말로 몸이 건장하지만 마음속에는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평범한 군인은 체격도 작고 힘도 약하고 진군할 때도 두려워하지만 불법 이야기만 들어도 정의감을 얼굴에 나타내며 불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법을 몰아내 없애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이 군인들은 유가 학문을 잘 배웠고 예의에도 익숙하여 마음속에서 지키려는 것이 있기에 불법을 이기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가의 예의는 불법을 이길 수 있는 근본 방법입니다. 현재 어느 한 군인이 예의를 알고 불법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면 천하 사람들이 예의를 알도록 하여 불법을 이겨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사회추세입니다.
歐陽修,『居士集』,卷第十七,「本論」(中,慶曆三年)︰
佛法爲中國患千餘歲,世之卓然不惑而有力者,莫不欲去之。已嘗去矣,而復大集,攻之暫破而愈堅,撲之未滅而愈熾,遂至於無可奈何。是果不可去邪?蓋亦未知其方也。
夫醫者之於疾也,必推其病之所自來,而治其受病之處。病之中人,乘乎氣虚而入焉,則善醫者不攻其疾,而務養其氣,氣實則病去,此自然之效也。故救天下之患者,亦必推其患之所自來,而治其受患之處。佛爲夷狄,去中國最遠,而有佛固已久矣。堯舜、三代之際,王政修明,禮義之教充於天下,於此之時,雖有佛,無由而入。及三代衰,王政闕,禮義廢,後二百餘年,而佛至乎中國。由是言之,佛所以爲吾患者,乘其闕廢之時而來,此其受患之本也。補其闕,修其廢,使王政明而禮義充,則雖有佛,無所施於吾民矣。此亦自然之勢也。
昔堯舜、三代之爲政,設爲井田之法,籍天下之人,計其口而皆授之田。凡人之力能勝耕者,莫不有田而耕之。斂以什一,差其征賦,以督其不勤,使天下之人力皆盡於南畝,而不暇乎其他。然又懼其勞且怠而入於邪僻也,於是爲制牲牢酒醴以養其體,弦匏俎豆以悅其耳目。於其不耕休力之時而教之以禮,故因其田獵而爲蒐狩之禮,因其嫁娶而爲婚姻之禮,因其死葬而爲喪祭之禮,因其飲食群聚而爲鄉射之禮,非徒以防其亂,又因而教之,使知尊卑長幼,凡人之大倫也。
故凡養生送死之道,皆因其欲(欲求,『荀子』,「禮論篇」:人生而有欲,欲而不得,則不能無求。)而爲之制,飾之物采而文焉,所以悅之,使其易趣也;順其情性而節焉,所以防之,使其不過也。然猶懼其未也,又爲立學以講明之。故上自天子之郊,下至鄉黨,莫不有學,擇民之聰明者而習焉,使相告語而誘勸其愚墯。
嗚呼,何其備也!蓋三代之爲政如此,其慮民之意甚精,治民之具甚備,防民之術甚周,誘民之道甚篤,行之以勤,而被於物者洽,浸之以漸,而入於人者深。故民之生也,不用力乎南畝,則從事於禮樂之際,不在其家,則在乎庠序之間。耳聞目見,無非仁義,樂而趣之,不知其倦,終身不見異物,又奚暇夫外慕哉?故曰“雖有佛,無由而入”者,謂有此具也。
及周之衰,秦并天下,盡去三代之法,而王道中絶。後之有天下者,不能勉彊,其爲治之具不備,防民之漸不周,佛於此時乘間而出,千有餘歲之間,佛之來者日益衆,吾之所爲者日益壞。井田最先廢,而兼并游惰之姦起,其後所謂蒐狩、婚姻、喪祭、鄉射之禮,凡所以教民之具,相次而盡廢,然後民之姦者有暇而爲佗,其良者泯然不見禮義之及已。夫姦民有餘力,則思爲邪僻,良民不見禮義,則莫知所趣。佛於此時乘其隙,方鼓其雄誕之說而牽之,則民不得不從而歸矣。又況王公大人,徃徃倡而毆之曰:佛是真可歸依者,然則吾民何疑而不歸焉?幸而有一不惑者,方艴然而怒曰:“佛何爲者?吾將操戈而逐之!”又曰:“吾將有說以排之!”夫千歲之患徧於天下,豈一人一日之可爲?民之沈酣入於骨髓,非口舌之可勝。
然則將奈何?曰:莫若修其本以勝之。昔戰國之時,楊墨交亂,孟子患之,而專言仁義,故仁義之說勝,則楊墨之學廢。漢之時,百家並興,董生患之,而退修孔氏,故孔氏之道明而百家息。此所謂修其本以勝之之效也。
今八尺之夫,被甲荷戟,勇蓋三軍,然而見佛則拜,聞佛之說,則有畏慕之誠者,何也?彼誠壯佼,其中心茫然無所守而然也。一介之士,眇然柔懦,進趨畏怯,然而聞有道佛者,則義形於色,非徒不爲之屈,又欲驅而絶之者,何也?彼無佗焉,學問明而禮義熟,中心有所守以勝之也。然則禮義者,勝佛之本也。今一介之士,知禮義者,尙能不爲之屈,使天下皆知禮義,則勝之矣。此自然之勢也。
『佛祖統紀』,卷第四十五︰
(慶曆)四年(1044),六月,……諫議歐陽修,為言事者所中,下詔獄窮治,左遷滁州。明年(1045)將歸廬陵,舟次九江,因托意遊廬山,入東林圓通,謁祖印禪師居訥(1010-1071)。與之論道。師出入百家而折衷於佛法。修肅然心服,聳聽忘倦,至夜分不能已,默默首肯。平時排佛為之內銷,遲回逾旬不忍去。或謂此與退之見大顛正相類。
修初至,師揖就座曰︰足下遠臨,豈以西竺聖人之道有合於心乎?
修盛氣以答曰︰修學孔孟之道,竊有慕於韓子(韓愈)之攘斥佛老者,西竺之法何所取焉?
師正色而詰曰︰退之排佛老,自比孟子之距楊墨。佛老大聖非楊墨比,退之尚不可排。況今欲慕之者?昔者文中子(王通)之言佛聖人也,而退之斥為夷鬼,此大慢之言也。
修曰︰學者廢『中說』,史家不立傳。退之絕口而弗稱。今師援之,謂佛聖人者,天下孰從之乎?
師曰︰文中子醇儒也。其得佐太宗當不愧三代之治。其職居修史,必能列佛老於聖人。昔陳叔達撰『隋史』,避嫌於當世,而司馬君實(司馬光)作傳以補之。退之蔽賢而弗稱,豈天下之公心?皮日休謂︰孟子、荀卿翼傳孔道,至於文中子、司空圖謂︰天生文中子以致聖人之用。故房杜之徒,恢張文武以濟貞觀之治。此皆足以知文中子也。荀卿之徒,韓非尚刑名以害世,李斯焚詩書以亡秦,楊墨之禍未至是也。文中子之門人,能以仁義之道,輔成唐家以致治平。若子云退之徒立空言,不聞其徒有佐漢興唐之效者。然則文中子之道,豈不愈於荀楊韓子,而後世學者顧不之知耶?
修曰︰韓子之與道文中子不合者鮮矣,使其遇太宗,必大發所蘊。
師曰︰憲宗中興之君也,退之不聞此時有所裨贊,乃以排佛老為己功,欲自比於孟子之距楊墨。其好勝取名,若是之甚。且退之斥佛為夷鬼者,請略辨之。佛聖人降自兜率天,托生中天竺聖王之家,何以夷稱?佛聖人不生不滅,曠劫常存。人天之宗仰,何以鬼稱?此非退之大慢語乎?退之七世祖韓耆,當後魏永興,自赫連屈丐來降拓跋。由西戎歸北狄,獨不為祖諱,而反敢訕佛聖人乎?退之畏修史褒貶之過(答劉秀才書),而不思貶佛之過為尤可畏,排老子為己任,而兄事毛仙服其丹,卒疽發而殂,子昶校書不材,卒黜歸,未數世而絕滅。其亦天刑人禍之不能免乎?退之倡排佛老,足下今又和之。將使後世好名之士,援韓氏、歐陽氏以為法,豈不為盛德之累?諺言︰“善罵者,人亦善罵之。”足下舊著「本論」,孜孜以毀佛為務,安得眾口不毀公於天聽之前乎?足下之言,以搜狩、喪祭、鄉射之禮為勝佛之本,是猶退之「原道」而實未知道也。
修大驚赧,為之謝曰︰修胸中已釋然。將何以見教?
師曰︰佛道以悟心為本。足下屢生體道,特以失念生東華為名儒,偏執世教故忘其本,誠能運聖凡平等之心,默默體會,頓祛我慢,悉悔昨非,觀榮辱之本空,了死生於一致,則淨念當明天真獨露,始可問津於此道耳。
修自此頗有省發,及後入參大政,每譽於公卿之前。歲時書問未嘗絕。
述曰︰孔子、文中子皆謂佛為聖人。韓氏則曰︰佛者夷狄,歐陽作「本論」曰︰佛法為中國患。二子不知佛為聖,不知天地之廣大故,不知奚為夷奚為中國;不知佛法之妙故,不知奚為本奚為患。儒宗有欲排佛者,倘未能覽其典籍質諸學者,熟復其義理之所歸,則吾恐輕肆慢易,如韓、歐一時之失言也。然退之問道於大顛,自云得入處,故魯直有云︰退之見大顛後,作文理勝,而排佛亦少沮。歐陽見祖印,肅然心服。故東坡有云︰永叔不喜佛,然其聰明之所照了,德力之所成就,真佛法也。今人徒知誦前時之抵排,而不能察後來之信服。以故二子終受斥佛之名,其不幸乎?
五年,眉山蘇洵赴汴京,舉進士不中。溯江至潯陽,登廬山謁祖印訥禪師問法(東坡云︰慶歷丁亥,先君問法於圓通,訥公得其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