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민심은 이미 불만으로 가득 차 폭발 직전이었다. 거듭된 흉년으로 농민은
화전을 찾아 떠났고 더러는 도적이 되어 산중으로 들어갔다. 지방의 관리들은 전전긍긍하며 대꼬챙이
처럼 말라갔다. 선비들의 드높던 기개도 빛이 바랬다.
선조 24년 정월 통신사 황윤길(允吉1536년~?)과 김성일이 일본으로부터 귀국했다.
(황윤길) "머지않은 장래에 왜구가 반드시 침략해 올 것입니다."
(김성일) "신은 그러한 정형(情)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선조 임금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臣)의 사람됨을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력과 지략이
있을 것이라고 했고, 반면에 학봉 김성일은 쥐눈을 하고 있어서 보잘것없는 인물이라 평했다.
어전회의가 끝난 뒤 서에는 담담히 학봉에게 물었다.
"만일 변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리지오?"
김성일이 답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린 것입니다."((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김성일의 말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나도 역시 어찌 왜)가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겠습니까? 다만 황사(황윤길)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지방(백성)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
김성일은 서인인 황윤길과 당파가 달라 짐짓 반대의견을 냈다고 알려져 있으나 선조에게 "걸주 같은
폭군이 될 수도 있다"며 서릿발처럼 훈계한 김성일의 문중은 400년이 흐른 지금도 불편한 심사일 수
밖에 없다.
마침내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구가 부산포에 상륙하자 선조는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있던 학봉을 잡아 오라고 명했다. 류성룡은 "인심(人)을 진정키 위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니 깊이
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선조를 설득했다. 당시 학봉은 불철주야로 백성을 달래고 장수를 격려하고
있었다. <징비록>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김성일이 떠나서 직산에 이르렀을 때 임금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또 김성일이 경상도 사민
(士民)의 인심을 얻은 것을 알고 그의 죄를 용서하고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초유사-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던 임시 벼슬)로 삼아 도내의 백성들을 타일러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라고
명하였다.>
- 월간 조선 발행, ‘서애 류성룡’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