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오길비라는 분이 쓴 『당신도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다』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분의 친구가 서커스단에 들어갔는데 서커스에서 보면 공중에서 붕붕 날아다니면서 그네를 타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 그네 타는 훈련을 하는 것을 구경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중에서 그네를 타려면 처음부터 그네를 타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배우는 사람은 몇 주 동안 위에서 떨어지는 훈련만을 시킨다고 합니다.
서커스를 할 때 보면 밑에 그물망이 있지 않습니까?
그 그물 위로 똑바로 떨어지고, 거꾸로 떨어지고, 앞으로 떨어지고, 뒤로 떨어지고, 옆으로 떨어지고.......
이렇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몇 주 동안 떨어지는 훈련만을 시키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떨어질 때는 무서웠겠지요?
그런데 자꾸만 떨어지다 보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재미를 느낀다고 합니다.
이렇게 내가 그네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겨야만 비로소 그네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부터는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네를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떨어지는 경험이 없이 곧바로 그네를 타라고 하면 떨어질 두려움 때문에 그네가 보이지 않아서 그네를 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떨어지는 훈련을 한 사람만이 두려움으로부터,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길비 목사님이 말하기를 그네타기에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반복되는 떨어지는 경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떨어지는 것을 경험을 해봐야 떨어지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 나는 떨어져도 안 죽는구나!
나를 안전하게 받아주는 엄마가 있구나!
우리에게는 나를 안전하게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로부터 오는 담대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 무슨 두려움이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시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사용하시기 전에 10년 넘게 아라비아 사막에서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용하시기 전에 그릿 시냇가로 보내시고, 사르밧으로 보내셔서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시기 전에 애굽으로 보내서 11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하시고 2년 동안 억울한 누명(陋名)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하셨을까요?
왜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13년 동안이나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게 하셨을까요?
바닥체험을 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바닥체험을 한 다윗이 시편 3편 6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 하리이다.”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닥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도 바닥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고난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두려움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더 넓은 세계로 이끌어갑니다.
따지고 보면 모세도 실패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모세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왕궁에서 편안하게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냥 애굽의 그 수많은 왕자들 중에 하나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궁에서 살던 모세가 광야로 갔다는 것은 인간적인 의미에서 보면 분명히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광야로 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에는 실패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실패 때문에 더 나아진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강력 접착제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실패해서 접착력이 약한 접착제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포스트잇이 되어 대박이 났습니다.
비누를 만들려고 비누재료를 넣고 혼합하는 과정에서 공기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실패했는데 그 실패로 만들어진 비누가 대박이 난 물에 둥둥 뜨는 ‘아이보리 비누’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 언뜻 생각할 때에는 실패인 줄 알았는데 그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 남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될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광야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도 고난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난당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원치 않는 광야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