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키소스의 죽음
(송현 로마노 신부)
그리스 신화에 보면 나르키소스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의 미모에 반한 많은 처녀와 요정들이 그에게 구애를 하지만
정작 그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숲의 요정인 에코는 어찌나 애간장을 태웠던지
결국 목소리만 남아서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르키소스가 목을 축이려 샘에서 물을 떠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순간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얼굴이 수면 위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그는 그 얼굴에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수면 위의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르키소스는 그날부터 샘터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물위에 비친 그 사람을 껴안아보았습니다.
결국 나르키소스는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그의 죽은 몸은 한 송이 꽃으로 변했고
그 꽃이 수선화라 전해옵니다.
그래서 수선화는 죽음 혹은 죽어야 할 자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래한 영어 나르시시즘은
자기 용모나 재능을 과대하게 평가해서
자신에게 빠져버리는 자아 도취증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자신에 대한 사랑은 죽음의 시초이며
신과 만인에 대한 사랑은 삶의 기초라 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만을 바라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심으로써 완전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인간 창조는 그 자체로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역시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께 이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사랑을 알고 있으며 또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생명과 같아서
누구나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탄생과 더불어 주어진
그 순수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완전한 것이 오면 온전하지 못한 것은 자취를 감추는 법입니다.
밤하늘을 무수히 수놓은 별들도
아침의 태양 앞에서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위대한 사랑 앞에 미움과 탐욕.
이기와 교만은 제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러기에 성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악마는 자기만 사랑한다..는
말이 생겨났는가 봅니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