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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탐진강’이지만 원래는 '예양강(汭陽江)'이었듯이, 조선시대에는 '제암산‘이 아니라 ’사자산(獅子山), 사산(獅山),
사악(獅嶽)'이었다. <정묘지>에도 '부동방, 용계방, 장동방, 부산방, 웅치방'에 獅子山이 있고 제암산은 없었다. <부산팔경(八景),
안양八景, 부춘八景>에도 '사악고운(孤雲), 사산귀운(歸雲), 사악제월(霽月)'이었다. 장흥府 8경詩에도 '사자귀운(獅子歸雲)'이었고, 그
獅子山 안에 ‘제악(帝嶽)’이 들어있다. 1925년경 외지인 '최남선'은 <심춘(尋春)순례>에서 '장흥 獅子山'을 돌아 '광양
백운산'을 바라보았다 ( 그런데 왜 장흥 일부책자에 <욕춘순례>라 오기되는가? ) 그 獅子山 '삼봉(三峰)'이라 함은
'사자두봉(頭峰),사자미봉(尾峰), 제암(帝岩)'일 것이다. 그 獅子山에 있다는 봉수대는 '전일산 봉수'를 지칭한다. 예전에도 '제암(霽巖)' 또는 '제암산'이 간혹 말해지기도 했으나, 그 정해진 산명은 ‘獅子山’이었다. 안양방에서는 더불어 '어병산,착정산'을 말하기도 했다. 그 獅子山 일대에는 '원효암,의상암,금강사,정흥사,어병사,취령암,고산사,봉림사, 일림사'가 있었다. 그 사자산록에는 '위계정, 이침, 백광홍, 정경달'의 묘소가 있다. 그러다가 일제기에 ‘제암산(帝巖山)’ 명칭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1933년에 장흥군수가 제암유상(遊賞)행사를 주관하여 <제암시집>이 출판되었고 '제암산'이 본격화되었다. <조선환여승람 장흥,1933>은 '제암산'을 독자적 산명으로 기록하였다. 세상이 바뀐 오늘날에는 '제암산'과 '사자산'이 따로 병립한다. 장동출신 시인 이대흠은 詩 <제암산을 본다>에서 "제암산을 보면 장흥땅 전체가 그 산으로 집중된 느낌이 든다."고 노래했다. 장흥읍출신 사진작가 장선기(장흥중고23회)'는 사자尾峰쪽에서 사자頭峰을 지나 장흥읍쪽을 멀리 바라보는, 웅크린 獅子山을 잡아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제암’과 ‘사자’와 ‘천관’의 아들들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제암산 철쭉을 저 獅子山 쪽으로 옮기거나 번지게 하여 獅子山의 갈기와 등마루에 새로운 봄불 꽃불로 활활 타올랐으면 한다. 덧붙인다. 1)일제당국이 사자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풍설(이규태 칼럼)의 근거 없음을 오래전에 기고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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