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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려면 이렇게
마가복음 12:13~17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 제 생애 최고의 찬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요 4:44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제 둘째 사위로부터 존경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기분을 맞춰주는 것으로 생각하여 귓등으로 들었지만 사위는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조목조목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전하는 설교를 듣고 탁월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다른 목사님들은 자기 생각과 철학을 섞어 말하는데 저는 오직 말씀으로 풀어나가는 점이 남다르고, 영상 설교를 준비하는 모습이 무척 진취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것이기에 아무리 제게 좋은 말로 힘을 실어주고 싶어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 안에 사랑이 담겨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할 사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의 기도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사랑의 교제를 나눕니다. 제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이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간절하게 구합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하였습니다. 사랑은 이 땅에서뿐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도 기초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베푸시고 내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찾으시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우리 안에 생명으로 머무는 사랑을 하나님께 풍성하게 열매를 맺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함께 나눈 오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것은 생명을 말하며 이 생명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사랑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며 대적하여 죄를 찾아내어 죽음에 내몰려는 의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해서 보낸 사람이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대표를 뽑아서 보냈습니다. 그냥 아무나 보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책잡기 좋은 상반된 두 부류의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동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썼으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독선과 외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반면 헤롯 당원들은 유대인이었지만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이방인 로마의 권력에 의지하고 아부하는 정치집단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극우와 극좌에 속한 대척점을 이룬 그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여 없애려는 데는 한마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막 12:13절에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책잡는다’라는 말의 헬라어 ‘아그류오’는 ‘사냥하여 잡다.’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책잡으려” 대신 “올무에 걸리게”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무’는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하여 만든 올가미를 말합니다.
이들은 곤란한 질문으로 올무를 놓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말을 흠잡아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며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여 신성모독 죄를 범한 사람으로 몰아서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민감한 사항인 납세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공개질문하게 한 것입니다.
서기 6년에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로마가 직접 개입하여 지배하였습니다. 유다와 사마리아는 로마의 통치를 받으며 세금을 로마 황제에게 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나와 사악한 질문을 했습니다.“가이사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법망에 걸리게 하려는 간교한 유도 질문이었습니다. 유대인 통치자는 하나님이신데 이방인 나라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유대 전통에 어긋날 뿐 아니라 반민족적이라는 죄명을 덮어씌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이는 반정부, 반체제 인사로 몰아서 처형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은 이 질문 하나로 예수를 함정에 빠뜨려 곧 체포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외식과 전략을 훤히 아시고 그 이상을 내다보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동전, 곧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십니다. 이 동전에는 가이사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동전을 가져오니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물으시고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는 대답을 들으신 후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납세의 의무가 있습니다. 좋든 싫든 소득의 얼마를 국가에 바쳐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도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결산하여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난 달란트 비유에서 마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는 달란트를 가지고 결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령’이란 영어에서는 ‘a living soul’ ‘a living creature’ ‘a living being’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전인적인 생명체” 라는 뜻입니다.
즉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존재로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것은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인격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풍성하다는 의미는 내 생명에 사랑이 담겨져 그것이 내 인격을 변화시키고 이 땅에서의 삶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서도 가치가 있고 보배로운 존재로 세움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하여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눅 12:48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같게 임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의 상태에 따라 많이 누리고 받은 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결산하는 날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둘 수 있을까요? 먼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다음에는 사랑의 열매를 넓히고 사랑의 결실이 이루도록 오래 참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누림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셨고 그분의 존재로 사랑하십니다. 존재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특성 세 가지가 있는데 영원성, 불변성, 완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어느 무엇으로도 깨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시들거나 변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이 사랑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과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고 사랑의 표현을 하십니다. 햇빛도 공기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피조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역시 나를 절대로 필요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존재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할 때 양자의 영 성령이 내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경험하게 합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라는 것은 나의 선한 행위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분의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랑하셨음을 믿고 내가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받아들일 때 이것을 의, righteousness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의의 관계로 맺어질 때 내 안에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평강이 주어지고 하나님께 속한 기쁨이 충만해지며 하나님 나라의 신비가 내 안에서 활발하게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분께 사랑을 고백하여 나가는 사람이 비로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머물게 되면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습니다. 한 마음을 품고 그 사람의 입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흐름으로 내 영혼에는 천상에 속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내게 주어진 사랑을 흘려보내지 않고 머물게 되면 인생은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솔로몬 왕은 지혜와 총명, 그리고 부귀와 영화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런 그는 무척 행복하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는 기대와 전혀 다르게 자기 인생의 결론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전 2: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습니다. 눈으로 귀로 모든 오관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고 행복 하고자 했지만 모든 것이 헛되다 했습니다. 무엇이 그에게 헛되게 했을까요? 그 안에 사랑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잃고 우상숭배에 빠졌고 주위의 사람을 이용하였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 예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냐면 열왕기 상에서 솔로몬 왕은 성전을 지을 때 두로의 히람 왕에게 도움을 줄 것을 부탁하였고, 히람은 성전건축을 위해 막대한 자재와 비용을 냈을 뿐 아니라 기술자까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귀한 헌신이 있었기에 성전을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왕상 9:11 “갈릴리 땅의 성읍 스무 곳을 히람에게 주었으니 이는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그 온갖 소원대로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제공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히람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성읍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상 9:12 “히람이 두로에서 와서 솔로몬이 자기에게 준 성읍들을 보고 눈에 들지 아니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두로 왕 희람은 이 성읍을 보며 가불(Gabul)이라고 하였는데 이 뜻은 ‘기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솔로몬은 자기의 영화와 유익에 관심을 쏟고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음을 보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존귀와 영광을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내 중심이 되어 나만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흐르지 않게 될 때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메마르면 그 영혼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 됩니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전 11: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참 어리석게 보입니다. 물 위로 던지는 떡은 어쩌면 물고기 밥이 될 수 있고 흩어져 없이 할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농사를 지을 때인 봅철이 되면 나일강이 범람하게 되는데 그 범람한 물 위에 곡식을 던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후에 나일강의 물이 다 잦아 들 때에 하구에 퇴적물이 쌓여 그곳에서 곡식의 싹이 나서 많은 수확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때 식물을 던지는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선한 일이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나의 선한 행위가 감사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선행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속한 자들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내 육적인 한계를 넓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게 관계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54: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했습니다. 내 마음이 넉넉하여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쉼을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이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사랑은 오래 참고 견디면서 성숙해지고 열매를 맺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다려 줄줄 아는 마음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톰과 제리’라는 어린이의 만화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꾀가 많는 생쥐와 좀 어리석게 보이는 고양이와 티격태격하며 쫓고 쫓기는 이야기들입니다. 이 영화의 끝부분에 고양이 톰은 나이가 들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제리는 톰이 죽으니 당장은 좋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너무 허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눈치를 채고 톰과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 한 마리를 구해 와서 같이 지내게 하였습니다. 제리는 신이 나서 톰과 하듯 새 고양이를 놀리며 놀았습니다. 그런데 새 고양이는 톰이 아니었습니다. 장난치는 제리를 단박에 낚아채서 잡아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리는 죽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톰은 나를 잡지 못한 게 아니라 못 잡는 척해 준 거였구나.”라고 말입니다.
사랑이란 내게 주어진 힘을 다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거스르게 하는 사람에게 즉시 지적하면서 제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내려놓고 오래 기다려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행한 모든 것에 그분의 잣대로 판단하시고 정죄하셨다면 여기까지 올 사람을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고 내 모습을 보시며 정죄하지 않으시고 참고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판단하시고 형벌을 내리시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오래 참음으로 성장합니다.
내게 왜 저런 사람을 보내셔서 마음을 괴롭게 하냐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을 내 마음에서 품으면서 내 안에는 영롱한 진주처럼 빛나는 사랑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영혼이 가련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와닿지 않는다면 회개하십시오!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면 회개하십시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십시오. 그 사랑에 머물면서 사랑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오래참는 인내의 과정을 겪으면서 이뤄지는 사랑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