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청춘과 사랑.
1951년 강릉 경포대에서 육영수와 데이트를 즐기는 사진 한장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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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1950년 12월 결혼식을 올리고 5일 만에 강원도로 올라가서 전지를 전전한다.
그 와중인 1951년 강릉 경포대에서 육영수와 함께 하며 '춘삼월 소묘'라는 시를 지었다.
(전문은 여기에)
벚꽃은 지고
갈매기 너울너울 거울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 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英
(이하 생략)
1951년4월25일 강릉 경포대에서
이 시를 증거하는 사진을 발견했다. 아마 처음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리라.
강릉 경포대의 기둥 난간에 군모를 쓴 남자는 서있고, 여자는 내외하며 다소곳히 앉아 있다.
오후 햇살은 청명하여 기와의 올록볼록함을 그대로 바닥에 드러내고 있다.
경포대 아래 그 허다한 사진 중에서 이런 '근대적' 앵글은 처음 보게 된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수많은 상념을 낳게 한다.
게다가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 아닌가.
전쟁의 한복판에, 인생편력도 둘다 만만치 않은 청춘 남녀인지라 사진은 더 복잡해진다.
이번에사 그들 둘이 34세와 26세가 되기까지 각각 겪어야 할 부침을 처음 찬찬히 새겨보게 되었다.
'청춘시절', 이들보다 더 부침이 심한 인생사, 격랑의 근대사를 겪은 이가 또 얼마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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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조선에서 2017년 박정희 관련 두권의 책을 냈다.
사진 중심인 "100대 화보, 100대 어록 그리운 박정희"와 평전인 "내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대충 그의 인생은 알고 있다고 보아, 사진 중심의 전자만 구입했다. 사진은 여기에 들어 있다.
그런데 나는 그의 내밀한 '청춘'은 몰랐다.
1917년 박정희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46세 어머니는 45세로 지금 보아도 상당히 만산이다.
'내밀'하다고 한 건 그의 어머니 백남의(1872 - 1949년 8월 12일) 관계를 함께 놓고 보아서일 때다.
1932년 당시 명문이었던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졸업했다. 만 15세에서 20세때다.
사진은 대구사범 재학시절, 어머니와 함께 한 사진이다.
얼굴에서는 그리 보이지 않는데 어머니는 만 60에서 65세 사이의 할머니이다.
1936년 병을 앓던 아버지의 간청으로 16세의 김호남과 결혼을 하고 이듬해에 딸 박재옥을 낳는다.
그러나 사이는 좋지 않았다.
1939년 문경공립보통학교 선생을 하던 시절이다.
참고로 당시 초등학교 선생은 훈도(訓導), 중고등학교 선생은 교유(敎諭)라고 불렸다.
벚꽃이 분분하던 시절 6학년 여핵생들이 봄놀이 가자고 졸라 학교앞 잣발산에 올랐다.
돈을 깍아주겠다는 사진사의 말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놀이가 없던 시절, 벚꽃놀이가 어떤 위상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선생이라는 평탄한 인생에 만족하지 않았다.
1938년 9월 아버지는 돌아가신다. 그럼에도 그는 11월 제1기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다.
이듬해 재수를 하여 1939년 10월 제2기 만주군관학교에 합격을 한다. 홀어머니의 나이는 70이다.
"1940년 3월 하순에 구미역 북행선 플랫폼에서 어머니와 헤어졌다.
"칠순 나이의 어머니가 '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 먼곳에 가려고 하느냐'라고 했다.
눈물이 맺히는 것을 뒤로 하고 박정희는 기차에 올랐다."(책에서)
언제 죽어도 호상일 늙은 어머니를 뒤로 두고, 중일 전쟁의 한복판으로 성큼 들어간다.
수석졸업을 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을 하여 1944년 졸업을 한다.
개천에서 용이 난거다.
당시 일본은 신분제 사회였다,
평민이 사족(士族)이 되려면 고등문관시험(고등고시)에 합격하거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경성제대에 그리도 들어가려는 이유는 그거였으며, 육사의 의미 또한 단순히 일제의 주구가 아니다.
관부연락선에서 기세등등한 일본형사들도 입학증만 보고도 조선인에게 기착 경례를 해야 했다.
그러나 황군의 청년장교 박정희에게 시대는 호락호락하지 않고 웃으며 주사위를 굴렸다.
일제가 패망한 것이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1946년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여 그해 겨울 소위로 임관한다.
북한이 아니라 다행히 남한이라 경력 세탁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운명의 신은 미소를 띠며 주사위를 굴린다.
위기가 곧 닥쳤다. 1948년 11월 남로당 숙군(肅軍)수사에 걸려들어 죽음을 앞두게 된 것이다.
지금 사진은 혹독한 수사를 받고 난 뒤의 모습이다. 초췌한게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알 수있다.
앞줄 좌측은 그와 동거를 하고 있던 이현란의 모습이다.
1947년 12월 한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만난 이화여대 1학년생 이현란과 약혼을 하고 1948년부터 50년까지 동거한다. 1948년 12월 전후 이현란은 아들을 출산하지만 6개월 뒤 사망한다. 여순사건 수사로 인해 박정희는 아들 얼굴도 보지 못한 사이다.
3남 박상희가 경찰에게 총살당하고 박정희마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중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1949년 세상을 떠난다.
사랑에 상처받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33살의 자기는 무기징역이라. 3류 드라마와 다름없다.
1950년 전쟁이 터지면서 운명의 페이지는 급변한다.
"위기의 소용돌이에서 그를 살려낸 이가 김일성이다.
6.25는 박정희에게 구명의 동아줄이었다."(책에서) 그는 다시 정식 장교가 된다.
같은해 그는 개인적으로도 바빴다.
반공주의자로서 월남한 이현란은 박정희가 좌익사범이라는 데에 충격을 받은데다 어린 아들도 죽고, 그리고 이혼하지 않은 유부남인 것까지 알게 되며 박정희를 떠난다.
14년동안 호적에 함께 하던 김후남과 정식 이혼한다.
그리고 8월 대구에서 옥천 부호의 딸이자 배화여고를 나온 재원 육영수를 만나 12월에 결혼을 한다.
그의 나이 34세, 육영수 나이 26세였다.
장인 육종관은 이 볼품없이 늙은 국군장교와의 결혼을 극렬 반대해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1950년 8월, 남한은 낙동강 동안만 겨우 남은 상태에 국군과 사귄다니 말이다.
아버지는 이후 육영수의 친모인 이경령과도 완전히 갈라섰으며, 경제적 지원도 일절 해주지 않았다.
육영수의 신산스러운 청춘의 삶은 생략한다(여기에)
그의 청춘은 여기서 일단락이 되며, 전쟁후부터의 박정희 인생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쿠데타. 유신. 10.26 그리고 80년대....
이제 이 사진을 보자.
그때는 몰랐겠지만 박정희의 개인사와 그가 만든 근현대사는 이 시점이 터닝포인트였으리라.
과거가 복잡하고 전도 또한 오리무중이었을 박정희에게 육영수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모든게 불확실한 그때, 그들의 인생행로가 어떻게 펼쳐질지 조금이라도 알았을까.
아마 사진사가 연출했을 이 앵글, 그들은 지금 살짝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경포대에 한번 가게 된다면, 저 곳에 한번 서보고 싶다.
왜냐고? 저곳이 경포대가 맞는지 팩트체크해보게^^
춘삼월 소묘
벚꽃은 지고 갈매기 너울너울
거울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
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英
노송은 청청 정자는 우뚝
복숭아꽃 수를 놓아 그림이고야
여기가 경포대냐 고인도 찾더라니
거기가 동해냐 여기가 경포대냐
백사장 푸른 솔밭 갈매기 날으도다
춘삼월 긴긴 날에 때 가는 줄 모르나니
바람은 솔송 호수는 잔잔
저 건너 봄사장에 갈매기 떼 희롱하네
우리도 노을 저며 누벼 볼거나
<1951년4월25일 강릉 경포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