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25]
길선주(吉善宙, 1869-1935)②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가 된 길선주는 부흥회를 하는 동안 참석한 신자들 앞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내가 얼마 전 한 친구의 돈을 빌렸는데 갚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라며 자신의 죄를 자백했고, 이 일로 인해 부흥회에 참석한 신자들과 초대된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으며,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며 눈물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평양 대부흥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회개 운동은 평양에서 시작되어 북쪽 지역은 물론 조선 전역에 걸쳐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기에 길선주 목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가 비록 종말론에 대해서 세대주의 해석을 적용한 부분은 있지만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고, 설교를 통해 큰 감화를 끼쳤습니다. 교회 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고 당시 조선교회가 선교사들을 의존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05인 사건(1911년 일제가 저항적인 민족주의 및 기독교계 항일세력에 대한 통제를 위하여 데라우치총독 암살모의사건을 조작, 최후로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 때 전국적으로 6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검거되었는데 여기에 장남 길진형이 포함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후유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숭실학교와 숭덕학교도 설립했습니다.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기독교를 대표한 인물이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나중에 2년의 옥고를 겪었습니다. 출옥 후 북간도를 포함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사(復興師)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1935년 평안남도 고창교회에서 설교 후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67세에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