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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번역의 탄생
저-이희재(1961년생, 20년간 전문 번역가로 활동, 영국 옥스퍼드대학 동양학부에서 동아시아 영어사전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논문 씀
출-교양인
독정-2020. 5.3. 일
· “번역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 뿐이다. 번역자가 저자를 제 자리에 두고 독자를 최대한 저자 쪽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과 독자를 제자리에 두고 저자를 최대한 독자 쪽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이 다른 하나다.” -독일 신학자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앞의 방법은 어색해도 원문에 충실하려는 직역, 뒤의 방법은 원문에서는 좀 벗어나더라도 매끄러운 번역문을 중시하는 의역이다. 같은 영국 진보지라도 지식층이 읽는 <가디언> 과 노동자층이 읽는 <미러>는 문체가 다르다. 아이가 읽는 동화책이라면 의역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마치 저자가 직접 쓴 것처럼 매끄럽게 번역해주어야 훌륭한 번역가로 평가받는다.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번역가라야 뛰어난 번역가라며 번역가의 이름조차 책에 밝히지 않는 번역서도 적지 않다.
· 르네상스를 한자로 번역하면 문예부흥이다. 문화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고대인의 문화를 되살린다는 뜻이다.
· 영국왕 찰스 1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자 아들 찰스 2세가 프랑스에 망명하며 프랑스의 번역 풍토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영국 귀족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고전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출발어인 고전어보다는 도착어인 영어에 충실한 번역을 하기 시작. 찰스 2세의 심복 17세기 영국 내전에서 청교도와 맞싸웠던 존 데넘 같은 왕당파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주제로 쓴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영어로 옮기면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라는 고유명사를 그냥 왕이라는 보통 명사로 옮기는 방식으로 작품에서 그리스의 색채를 될수록 지우고 영국 분위기를 내려고 애썼다.
· 최인훈은 <광장>을 개작하며 한자어를 최대한 고유어로 바꾸든지 <총독의 소리>에서 마침표와 쉼표 없이 한 문장을 몇 쪼이나 길게 끌어간다든지 하면서 한국어의 표현 가능성을 다각도로 모색한 작가다. 김원일은 품위 있고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작가다. 번역 하다가 타성에 젖어 하누어 감각이 무디어지면 흐트러진 한국어 감각을 되살리고 싶어 이 두 작가 작품을 읽는 버릇이 있다. 최인훈 <광장>은 집단 구호만 남무하는 광장만 있지 개인 배려 밀실은 없는 북쪽과 개인 사익 추구밀실만 있는 공익 추구 남쪽 광장에 절망하여 한구 전쟁이 끝나 포로 신분으로 남과 북이 아닌 제 3국을 선택한 이명준 젊은이의 이야기다. 1960년 4월 혁명이 없었다면 이런 소재를 다루지 못했을 거라며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이 보람이라고 했다.
한국 번역자와 출판사는 영어로 도니 어린이 책 앞에 실린 작가의 감사의 글-책 자료수집도움준 사서. 작업을 독려한 아무개 편집자. 친구, 아내 자식들에게 감사하다는 사사로운 번역까지 하는데 어린이 독자에게 굳이 그런 내용가지 읽힐 필요가 없다.
· 새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고 불교 경전이나 의학서, 실용서를 꾸준히 한글로 번역했지만 조선 지식층은 한글을 인정하지 않았고 19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서양 문화와 접해 중국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책을 일부만 한국어로 번역했고 나중에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 책을 읽고 한국어로 번역했다(세계문학 번역도 원어에서 직접 번역하지 않고 일본어 번역본을 보고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오히려 세련된 번역이 되엇다) 이 과정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근대어가 한국어에 대가 들어와 어휘뿐 아니라 표현, 어법도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이 서양어를 본격 직접 번역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다. 영어 경와감이 심해 이역보다 직역을 중시. 그런 풍토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괄호를 쳐서 그 안에 원어를 집어넣는(예: 지유주의(liberralism) 관행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런 한국어로 원문을 옮기려는 노력은 소홀해졌다. <조선왕조실록.은직역주의를 고수해 듣자하니를 “측문하니”라고 옮였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이가 한국에 강하다. 북한은 <조서왕조실록>을 한국보다 먼저 완역. 번역 원치은 의역이다. 한자는 쓰지 않고 어려운 말은 다 풀어서 써주었다. 북한 사전 편찬자는 딱딱하고 어려운 한자어보다 토박이말로 풀이어를 제시하려고 애썼다. 영한사전은 수축시키다. 축소하다. 제한하다. 단축하다처럼 한자어가 많지만 영조사전에는 ‘조이다, 찌푸린다, 좁히다, 오그리다, 줄이다’ 같은 토박이말도 많다.
· 지나친 직역에서 벗어나 균형 감각을 되찾을 때도 되었다.조리법이나 요리법이라는 한국어가 있는데 영어 ‘레시피’를 더 많이 쓴다. 직역보다 의역을 더 많이 하려는 것은 거시적 배경를 의식하며 한쪽으로 치우친 균형을 바로 잡아야한다는 생각에서다.
중국 루쉰은 중국이 열강에 먹힌 것은 봉건 전통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라며 일부러 전통과 결별하고 직역을 고집했지만 한국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성찰과 반성보다는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미니 대접을 받았고 그대마다 그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자기 전통 살리기보다 모방에 급급, 한국어는 이미중국어와 일본어와 영어의 영향를 많이 받아 남아있는 한국어의 개성을 지키는 쪽, 의역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균형 잡은 의미에서도 옳다.
· 원래 한국어는 추상명사가 주어나 목적어 자리에 오는 걸 꺼린다.
예
x 무분별한 개발은 자연 파괴를 낳는다 보다
-무분별하게 개발하면 자연이 파괴된다가 좋다
X 보호를 요청했다 보다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좋다
(명사를 주어로 삼은 앞의 문장이 뒷문장보다 힘차고 새련되게 들리는 것은 번역문에 익숙해져 있어서다.)
· 동사를 좋아하는 한국어는 영어보다 동적이고영어는 프랑스어보다 동적이다. 그래서 내용이 같은 글이라도 명사가 들어간 프랑스어 문장을 그대로 영어로 직역하면 글이 딱딱해진다. 마찬가지로 명사가 한국어보다 헐씬 많은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글이 어렵다. 일본어는 한자를 많이 써서 일본어 문장을 그대로 직역해서 한국어 문장으로 옮기면 글이 어렵다.
목적어 자리에 오는 명사도동사로 풀어 옮겨주는 것이 좋다. “환경ㅇ르 지키려면 목재오 금속의 사용을 줄여랴 한다.”는 글도 어린이책은 “환경ㅇ르 지키려면 나무와 쇠붙이를 적게 써야 한다.”고 옮기면 더 좋다.
직역과 의역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차이는 명사는 동사로, 형용사는 부사로 바뀐 점이다. 자연스런 한국어 번역문을 만들려면 영어형용사는 될수록 한국어 부사로 바꿔주는 것이 좋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보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가 좋다
주어자리가 아니라 목적어자리에 오는 형용사와 명사도 부사와 동사로 바꾸면 좋다.
데통령은 지지도의 감작스러운 하락을 경험했다 보다는
대통령 인기가 뚝 떨어졌다가 더 친근하다.
한국 전통의 아름다운 재현이었다 보다
영화는 한국의 전통을 아름다운 재현했다가 좋다.
현대 한국 작가는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보다
“나는 굳은 마음을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가 더 세려되다할지 모르나 한국의 동사와 부사를 영문에서도 그대로 동사와 부라로 살리면 세련된 번역이 안되므로 번역문에서 형용사보다 부사를 더 많이 쓰려고 노력한다.
“여자는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보다
“여자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아쉽게 웃었다.”가 좋다.
· 동사의 명사화, 부사의 형용사화, 새 시제 수용과 ‘의’의 비중이 커졌다. 영어는 명사와 명사를 이어주는 전치사가 발달했고 of는 가장 애용되는 전치사다. 일제시대 ‘고향의 봄’가사도 ‘나의 살던 고향은’이 아닌 ‘내가 살던 고향‘이 맞다.
3인칭 대명사는 아직 한국어 일상 회화 속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영어를 한국어로 버역할 /대는 이런 3인칭 대명사의 처리에 신경 써야 한다, 구어가 아닌 문어라면 대명사가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바꾸려 한다.
영어에서 대명사를 안 쓰고 똑같은 명사를 반복해서 쓰면 글이 유치해보인다. 대명사의 적절 한 구사는 영어라는 언어 개성이다. 이런 영어의 전통표현 양식을 지켜야 한다는 암묵적 요구가 영어는 아주 강하다, 한국어 번역에서 대명사를 명사로 고치려는 생각은 영어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몇 분의 일이라도 한국어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를 바라는 균형감각 때문이다, 영어에 대명사가 많은 것은 똑같은 단어 반복을 싫어해서다. 영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다르니까 번역을 하다보면 영문에 명사로 나오는 것을 한국어 대명사로 받아주고 대명사로 나오는 것을 명사로 바꾸어야 하는 경우가 생겨 순서가 바뀐다.
에로
피렌체에서 이름을 날린 유명인의 유골을 어디에 묻어야 하는가에 대한 피렌체 시민의 뜨거운 관심은 한 세기 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죽었을 때 이 위대한 조각가의 시신을 양털 뭉치 속에 숨겨 피렌체로 호송해 온 사건에서 재연되었다,
-영어 문장에서는 미켈란젤로가 먼저 나오고 나중에 위대한 조각가로 받지만 번역문에서는‘이위대한 조각가가 로마에서 죽었을 때’로 하지 않고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죽었을 때‘로 미켈렌젤로의 시신을’이라 하지 않고 ‘이 위대한 조각가의 시신을’이라 했다. 똑같은 명사르 반복해 써주는 한국어 방식이 꼭 나쁜 것만 아이다 영문에서 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대명사보다 명사를 쓰는 한국어가 지루할지 몰라도 글을 명료하게 해준다. 대명사보다 명사를 쓰는 한국어가 좀 지루해도 글을 더 명료하게 해준다 영어권에서 나오는 글쓰기 입문서에서도 대명사가 어떤 명사를 가리키는지 독자가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한다고 충고한다.
· 영어는 아주 짧은 문장에도 주어가 들어간다 한국어는 배고파 죽겠다. 너무 춥다하며녀 그만이다. 물론 영어에서도 명령문은 주어를 안 쓴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을 뻔히 알고 있으니까) 한국어도 주어를 쓰긴 한데 바중이 영어보다 작다. 영어는 문장마다 주어가 있지만 한국어는 한 문단 안에 주어가하나 있으면 충분할 때가 많다.
<총각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믐밤의 하늘읒 머루 속 같았다. 더듬더듬 숲을 헤치며 산자락을 내려갔다. 멀리 반딧불 같은 불빛이 깜박거렸다. 반가웠다. 물빛이 흐르는 쪽으로 걸음을 재우쳤다. 어둠 속의 빛이 실제보다 몇 곱 더 밝아 보인다.
· 어떤 동작이 있을 때 한국어는 그것을 주체의 능동적 행위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a big school with over 2,300 pupils
1. 2,300 명이 넘는 학생을 가진 학교
2. 학생이 2,300명이 넘는 학교
1. 자연스러운 대화체는 어떨 때는 라블레가 떠오르게 하고
2.자연스러운 대화체를 따라가노라면 어떨 때는 라블레가 떠오르고
한국어는 이렇게 능동적으로 표현할 때 안정감이 든다. 떠오르고라는 능동태를 써주기 위해 그 앞에 원문에는 없는 따라가노라면이라는 동사를 번역문에 집어넣었다. 영어 동사를 형용사처럼 쓰는 분사의 경우에도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수동의 뜻을 지닌 과거분사라도 능동의 뜻을 지닌 현재분사처럼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티동사는 주어가 목적어에게 어떤 작용을 했는지 나타내는 동사이니까 결국 주어 때문에 목적어가 어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은 목적어는 주어 때문에 어찌 되었다라는 구조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런 방식을 적용하면 “이 신발 대문에 네 뒤꿈치가 까진다”가 된다. 적극으로 사람의 관점을 고려해 이 문장을 고치면 “이 신발을 신으면 네 뒤꿈치가 까진다가 무난하다. 더 한국어다운문장으로는 ”이신발은 뒤꿈치가 까진다“로 하면 능동성을 좋아하는 훌륭한 한국어 문장이 된다. ”이 신발은 뒤꿈치를 까지게 한다.“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한국어로는 “육식 동물은 몸 빛깔이 화려한 동물은 잘 공격하지 않는 것으로 관찰된다.”라고하기보다 “육식 동물을 관찰해보면 몸 빛깔이 화려한 동물은 잘 공격하지 않는다.”처럼 능동문으로 옮기는 쪽이 한결 자연스럽다.
한국어는 주어는 안 쓰더라도 문장은 될수록 능동문으로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역동적이 고 힘차다. 일본어는 될수록 수동문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동문>
한국 작가와 독자는 ‘-게 하다’라는 사역 표현에 무척 익숙하다. 변역서에서 워낙 그런 문장을 많이 보아서다. 대표적 에로 국어 교과서에 실린 독일 작가 안톤 슈나크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제목부터 ‘-게 하다’는 사역 표현이 많다.
첫 문장이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시작되어 ‘슬프게 한다’표현이 여러번 나온다.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보아도 철책기를 왔다 갔다 하는 범의 그 빛나는 눈, 그 무서운 분노, 그 괴로운 부르짖음, 그 앞발의 한없는 절망, 그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이렇게 ‘슬프게 한다’의 주어에 해당하는 것들이 죽 나열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공통 분모를 한꺼번에 이어주려면 역시 ’슬프게 한다‘라는 사역형을 써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수필에 나오는 또 다른 ’-게 하다.‘는 좀 과용이다. “너의 소행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가.’라는 표현은 ”너이 소행이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가져왔는가“하면 충분하다. 불면의 밤을가져온 것은 내가 아니라 너의 소행이므로 타동사 ‘가제오게 하다’는 필요없고 사역형이 아닌 타동사로 충분하다.
한국 번역 문화는 너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선호해서 한국어 논리보다 영어 논리에 충실한 번역으로
“이것은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 선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로 원문의 사역도사를 정확하게 살렸지만
“이것을 보면 항상 나는 창 앞에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 선 내 고향이 생각난다.”
이렇게 원문에 충실한 번역에서는 주어가 사물인 ‘이것’이지만 한국어에 충실한 번역에서는 주어가 사람인 ‘나’로 바뀐다. 물론 경우에 따라 ‘나’를 지워야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가 된다.사물이 주어로 오는 영어 타동사 문장을 사람이 주어로 오는 자동사 문장으로 바뀐다. 이것이 좋은 한국어 문장을 만드는 비결이다.
영어는 타동사를 좋아한다. 어느 나라 말에서나 동사가 가장 중요하다. 영어도 문법의 절반이 동사에 관한 것인데 영어 문장의 주인은 언뜻 보면 주어처럼 보인다. 영어 문장에서 동사는 문장 전체의 모양을 죄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한국어는 동사의 비중이 영어보다 더 크다. 한국어는 영어와는 달리 주어의 비중이 아주 작은 말이기 때문이다. 영어는 감탄문과 명령문을 제외하고는 문장 안에 주어가 꼭 있어야 하지만 한국어는 주어에 별로 기대지 않는 언어다.
영어에서도 한국어에서도 동사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목적어가 필요 없는 자동사이고 또 하나는 타동사이다. 몸이 움직인다하면 자동사지만 몸을 움직인다하면 타동사다. 이 경우 영어에서도 한국어에서도 자동사면 자동사 타동사면 타동사를 기본으로 삼아서 새로운 타동사나 자동사를 만들어 간다.
감정을 나타내는 동사만 해도 한국어는 ‘놀라다’‘흥분하다’ 같은 자동사를 그대로 써서 내 감정을 나타내지만 영어는 기본 출발점이 타동사인 surprise, excite 이다. 그래서 내 감정을 자동사 형식으로 나타내고 싶으면 “I was surprisd"나 ”I was ecited"라고 해준다.
한국어와 달리 영어에 수동태가 많은 이유는 영어에 타동사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타동사가 발달했다는 것은 어떤 행위나 작용의 주체를 따지는 데 민감하다는 뜻이다.
한국어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가령 “너 어떻게 여기 왔니?”할 것을 영어에서는 흔히 “What brings you here?"이라 한다. 한국어는 그 소식을 듣고 놀랐다라고 사람이 느끼는 놀라움의 감정을 자동사로 나타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영어는 ”The news surprised us."처럼 타동사가 기본이다. 단순히 자기의 놀라움을 나타내기보다 무엇이 그런 놀라움을 만들어냈는지 그 작용의 주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말하는데 더 익숙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어는 그냥 ‘걱정했다’‘화났다’라고 사람을 주어로 삼아 자동사로 나타내지만 영어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목적어 자리에 두고 무엇이 그런 감정을 그 사람에게 일으켰는지 그 인과 관계를 타동사로 나타내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걱정시키다’라는 뜻을 지닌 worry, 화나게 만들다‘라는 뜻을 지닌 anger 같은 타동사를 써준다. 영어는 걱정이나 노여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체가 무엇인지 주어로 드러내려는 의지가 무척 강하다.
하지만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사람을 주어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The cold doesn't worry me'를 ‘나는 추위는 걱정하지 않는다.”식으로 영어의 목적어를 주어로 삼아 능동문으로 번역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은 일장 써와서 타동사가 들어간 사역문을 능동문으로 바꾸는 게 자연스럽다.
<한국어에서 자동사와 타동사에서 출발하여 자동사를 만드는 경우>
-쌓다, 잡다, 밀다. 담다는 모두 타동사다. 이 기본형에다 ‘-이, -히, -리, -기를 집어넣어서 자동사로 만든다. -
타동사 ’쌓다‘에 이를 넣으면 자동사 ’쌓이다‘가 된다. ’놓다‘는 ’놓이다‘ ’섞다‘는 ’섞이다‘ 쓰다는 ’쓰이다‘가 된다. 타동사 ’잡다‘에 히를 넣으면 자동사 ’잡히다‘가 된다. ’닫다‘ ’닫히다‘ ’묻다‘ 는 ’묻히다‘가 된다. ’뽑다‘는 ’뽑히다‘ ’묻다‘는 ’묻히다‘가 된다. 타동사 ’밀다‘에 -리를 넣으면 자동사 ’밀리다‘가 된다. ’풀다‘는 ’풀리다‘ 타동사 ’담다‘에 ’-기‘를 넣으면 자동사."처럼 ’담기다‘가 된다.
<자동사에서 출발하는 경우>
‘속다’‘익다’ ‘돌다’‘웃다’ ‘깨다’ ‘낮다’는 모두 자동사다. 이 기본형에다가 -이, -히, -리, -기, -우, -추를 넣어 타동사로 만든다.
자동사 ‘속다’에 -이를 넣으면 ‘속이다’가 된다. 자동사 ‘익다’에 ’-히‘를 넣으면 타동사 ‘익히다’가 된다. ‘숨다’는 ‘숨기다’ ‘남다’는 ‘남기다’가 된다. 자동사 ‘깨다’에 ‘우’를 넣으면 타동사 ‘깨우다’가 되고 ‘비다’는 ‘비우다’가 된다.
<사역 동사란?>
타동사 중에 let, make, have, get처럼 목적어로 하여금 어떤 행동이나 작용을 하게 만드는 타동사를 ‘사역 동사’라고 한다.
사역동사 자체는 타동사지만 사역동사가 거느리는 목적어 다음에 오는 동사는 반드시 타동사일 필요는 없다.
“The poverty made them cry.”처럼 자동사인 cry를 얼마든지 목적어의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로 쓸 수 있다.
한국어에서는 이런 사역의 의미를 어떤 모양으로 나타낼까? -게 하다의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돈이 그들을 집을 짓게 했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그들을’과 ‘집을’ 겹치면 어지러워서
“돈이 그들로 하여금 집을 짓게 했다.‘가 된다.
한국어 짓다는 타동사이고 ‘-게 ㅎ다’는 사역문 표현이다.
타동사 ‘짓다’와 ‘-게 하다’가 합쳐져서 ‘짓게 하다’가 되는 것이다.
”가난이 그들을 울게 했다“는 ”가난이 그들을 울렸다“로 할 수 있다.
‘먹이다’는 직접 먹여주는 것. ‘입히다’는 직접 입혀주는 것을 뜻한다. ‘먹게 하다’는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는 것, ‘입게 하다’는 입어도 좋다고 허락하는 것을 뜻한다.
직접성과 간접성의 차이다.
<되다의 남용>
·현대 한국어에서는 수동이나 자동의 뜻을 안 써도 될 상황에서 ‘-되다’같은 표현을 남용 한다. ”아프리카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집값이 크게 하락했다”하면 될 것을 “아프리카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되었다.” “집값이 크게 하락되었다”라고 쓴다.
마찬가지로 사역이 특인 아닌 그냥 평범한 타동사의 뜻으로 자꾸만 ‘시키다’같은 표현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무분별한 개발이 환경을 훼손한다.“ ”저항 의식을 고무했다.“하면 될 것을 “무분별한 개발이 환경을 훼손시킨다.“ ”저항 의식을 고무시켰다.“ 라고 쓴다.
‘고립’이라는 말은 ‘고립하다’라는 말은 없고 ‘고립되다’와 ‘고립시키다’를 자동사와 타동사로 쓰며 ‘무산’도 ‘무산하다’란 말은 없고 ‘무산되다’무산시키다‘를 각각 자동사와 타동사로 써준다. 그렇지만 대체로 현대 한국어 동사가 한쪽으로는 너무 수동적으로 ’-되다‘일변도로 나가고 다른 한쪽으로는 너무 강압적으로 ’-시키다‘ 일변도로 나간다. 표현이 극단화되는 경우이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죽은 문장 살려내는 부사> -추상에 강한 영어, 구체성에 강한 한국어
<동사>
동사는 움직임을 담나내는 말로 동적이다. 배가 떠났는지 멎었는지, 탬스 강이 넘쳤는지 말랐는지, 속도가 빨라졌는지 느려졌는지. 부사는 동사가가리키는 변화를 좀 더 자세히 묘사할 때 쓴다. 배가 꾸물꾸물 떠났는지 느릿느릿 멎었는지. 강이 콸콸 넘쳤는지 바짝 말랐는지. 속도가 확 빨라졌는지, 뚝 떨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싶을 때 부사를 쓴다. 동사처럼 부사도 정적이지 않다. 동사와 부사는 시간 속에서 어떤 대상이나 나타내는 변화를 순간순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데 알맞은 말이다. 동사와 부사의비중이 한국어에서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은 한국어가 대상이 변화 과정에서 드러내는 순간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나타내는 데 상대적으로 강한 언어라서다.
부사는 영어보다 한국어에서 비중이 훨씬 크다. 영어에서는 부사를 형용사 뒤에 -ly f를 붙여 나타낸다. 한국어는 부사가 기본형이고동사형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두근두근’부사에서 “두근거리다‘라는 동사가 나오고 ’찰랑찰랑‘ 부사에서 ’찰랑대다‘ 동사가 나온다. 한국어에도 ’곱다. 밉다. 밝다. 어둡다처럼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쓰이는 형용사가 많지만 ‘지혜롭다. 공교롭다. 자랑스럽다, 사랑스럽다’처럼 명사에서 나온 형용사도 많다. 부사가 영어에서 들러리 취급 받는 것처럼 형용사는 한국어에서 조연 취급을 받는다. 더구나 이런 형용사 끝에 부사형 어미 ‘-게’를 붙여서 ‘지혜롭게’ ‘공교롭게’ ‘자랑스럽게’ ‘사랑스럽게’처럼 부사어로 써주는 경우까지 한국에서 부사의 활동영역은 훨씬 넓다. 그리고 한국어에서 부사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영어에서보다 섬세하게 쓰인다.
경찰이 갑자기(suddenly) 나타났다 보다 갑자기 대신 -불쑥 나타났다로 옮기면 가슴이 더 콩닥콩닥 뛰지 않겠나?
갑자기기 껴안았다보다- 와락 껴안았다. 덥석 낚아챘다. 기온이 뚝 떨어졌다. 왈칵 울음을 터뜨렷다. 버럭 화를 냈다가 그때 상황을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그리는 부사를 많이 거느린 한국어의 강점을 잘 살린 번역이 된다.
completely(완전히)라는 부사의 자연스런 번역 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완전히 대신) 홀딱 빠졌다. 불이 나서 집이 (완전히 대신)홀라당 탔다.
카메라에 (완전히 대신) 고스란히 담았다. 큰물이 (완전히 대신)죽 빠졌다. 불고기를 (완전히 대신) 바싹 익혔다로 표현하는 것이 개별 상황을 구체로 묘사하는데 강한 한국어의 강점을 살리는 일이다.
<한국어 부사의 정수-의성어와 의태어>
영어에도 찰칵(click), 칙칙폭폭(chug chug) 마개를 펑(cloop),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drip-drip) 자동차 급정거 소리(screech)로 나타낸다. 같은 의성어라도 한국어는 모음을 변형한 의성어를 만들어내니 좀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 무거운 카메라는 찰칵이 아닌 철컥. 물방울이 똑똑이 아닌 ‘뚝뚝’으로.
동물 울음소리도 다양하다. 한국소는 ‘음매’ 말은 “히힝‘하지만 영어로 크게 우는 소리는 neigh, 작게 우는 소리는 whinny라고 한다. 한국 개는 멍멍. 영어로는 bellow, low, moo라고 한다. 그런데 앞의 동물울음소리로 영어는 모두 동사로 쓰이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어는 멍멍 짖즌다. 왈좔 짓는다. 컹컹 짖즌다. 짖다라는 동사를 기본 요소로 삼고 거기에다 멍멍, 왈왈,ᅟᅥᆼ컹 컹컹 부사를 덧붙여 소리 특징을 나타낸다. 영어는 의성어를 동사 하나로 나타내는데 한국어는 부사+ 동사로 나타낸다. 즉 한국어는 부사가 정교하게 영어는 동사가 정교하게 발달했다. ’바람이 집을 휘감으며 울부짖었다‘보다 ’우우 울부짖었다‘하면 더 좋다. 영어 동사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한국어동사 하나로만 번역하짐 kf고 부사를 과감히 덧붙여라는 말이다.
<소리를 나타내는 무사> 즉, 의성어가 들어간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옮기려면?
학생들은 우당탕탕 계단을 내려갔다는 내려가다. 올라가다. 가로지르다 같은 움직임을 down, up, acrosss 같은 기본적 전치사나 부사로 나타내 줄 수 있으니까 앞의 한국어 문장은
“The students clattered down the stairs ”라 하면 된다. 영어에서는 부사의 ‘모이다’라는 동사를 한 몸에 지닌 throng라는 동사가 있다. 그러므로 의태어나 의성어 같은 부사가 들어간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번역할 때 부사의 뜻과 동사의 뜻을 한 몸에 지닌 영어 동사(throng)를 찾아야한다. 결국 영어를 한국어답게 잘 번역하려면 어휘를 많이 알아야 한다.
<적(的)과 ‘의’에 대하여>
① 적(的)이라는 문장의 적(賊)-형용사는 부사로 잡는다
어린이 책을 번역할 때 형용사절은 부사절로 바꾸는 게 좋다. “살려 달라는 소리를 들은 나무꾼이 다가와서 말했다.”보다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고 나무꾼이 다가와서 말했다.”가 안정된 문장이다.
“엄마를 잃은 어린 양을 본 늑대가 군침을 흘렸다.”는 ‘-은과 ’-는‘이라는 관형사형 어미가 잇따라 왔가때문에 “엄마를 잃은 어린 양을 보고 늑대가 .....”가 안정된 문장이다.
영어와 달리 한국어는 관형사형 어미가 겹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a melon that is big sweet, and cheap."eh 크고 달고 값싼 참외로 옮긴다. 영문에는 형용사가 여럿 나열되었더라도 한국어로 옮길 때는 명사를 꾸며주는 마지막 말을 빼고 앞의 꾸밈말은 모두 부사형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
한국어 관형어는 끝이 ‘-적’으로 끝나는 것이 많은데 19세기 후반에 서양어에 대응하는 한자어를 일본과 중국에서 만들어내면서 추상 명사의 관형사형은 끝에 무조건 접미사 ‘-적’을 붙여 만들었다. 문화(적), 과학(적), 추상(적), 이(적), 경제(적), 사회(적), 객관(적), 말하는 중에도 ‘보편적으로’ ‘일반적으로’ ‘인간적으로’처럼‘-적’이 들어간 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 글의 주인공은 주어와 서술어이지 관형사나 부사어가 아니다. 그런데 ‘-적’이 들어가는 딱딱한 말로 써주면 독자는 글의 중요한 내용이 담긴 서술어와 주어에 집중 못 한다. 한국어는 명사와 명사의 결합력이 높은 언어라서 꼭 ‘-적’에 기대지 않고 그냥 명사만 갖다 붙여도 관형어 역할을 충분히 한다. ‘생태적 천이’보다‘생태 천이’로 ‘필수적인 요소‘보다 ’필수 요소‘로 ’이색적인 문화‘보다 ’이색 문화‘ ’돌발적 사고‘보다 ’돌발 사고‘면 족하다.
‘-적’ 대신 한국어에는 ‘-롭다’ ‘-답다’처럼 명사를 형용사호 만들어주는 좋은 접미사가 있다.
‘야만적인 짓 ’은 ‘야만스런 짓’으로 ‘남성적인 매력’은 ‘남성다운 매력’ ‘지도자적 풍모’는 ‘지도자다운 풍모’로 쓰면 좋다.
② ‘의’of에 대하여
한국어는 ‘-의’에 별로 기대지 않는다. ‘의’를 넣이 않고 그냥 명사를 나열하면 얼마든지 소유 관관게나 수식 관게를 나타낼 수 있다. ‘수영장의 길이’가 아니라 ‘수영장 길이’ ‘세익스피어의 작품’ 아니라 ‘세익스피어 작품’ 이면 좋다. 물론 of는 소유격 뿐 아니라 목적격도 나타낸다. ‘민비의 시해’가 아니라 ‘민비 시해’‘고종의 퇴위’가아니라 ‘고종 퇴위’라고 하면 된다. ‘의’를 써야할 곳에 일본어 ‘에’로 쓰는 경향도 있다.
‘나는 나만의 원칙이 있다.’라고 써야할 곳에 ‘나는 나만에 원칙이 있다.’ ‘눈앞의 이익’을‘ 눈앞에 이익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내가 살던 고향‘을 ’나의 살던 고향‘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참 좋다.‘보다 ’이 책은 내용이 참 좋다.‘가 좋다. ’민주주의라는 뜻을 도대체 모르고들 있다.‘보다 ’민주주의가 무엇을 뜻하는지(무엇인지를) 도대체 모르고들 있다‘가 좋다.
‘의’나 ‘적’ ‘-적인’을 남용하는 것은 영한사전에서 이런 표현이 남발되는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한사전부터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살아있는 풀이말을 올려야 한다. 어떤 영한사전은 ‘진실의, 정말의, 진짜의, 진품의’처럼 전부 ‘의’를 붙여놓았다. 나는 지금까지 ‘정말의’ ‘진짜의’ 같은 말이 쓰이는 것을 ‘정말로’ ‘진짜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실제로 안 쓰는 말을 영한사전에 풀이말로 올리는 건 문제가 있다. 굳이 형용사를 밝히기 위해서 ‘-의’ ‘-적’ ‘적인’을 덧붙이는 것은 지면 낭비다. 사전에 불필요한 글자를 단 한 글자라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영한사전도 한국어 개성을 살려 만들어야 한다. 언제까지 일본에서 만든 영일사전에 질질 끌려가야 하나?
창조적인 영한사전 일면 의외의 접사를 풀이어에 덧붙여도 된다. ‘식량부족’이라 할 것이 아니라 ‘식량난’‘식수난’‘구인난’‘자금난’으로 니타내면 더 간결하다.
감정을 나타내는 ‘-감’이나 ‘-심’을 남용하는 경향도 있다. 우월, 열등애, 행복, 초조는 감정이 깃들어 있으니까 절망감, 비애감, 행복감, 초조감이라 하는 것은 모순이다. 공포, 분노도 공포심, 분노심을 느꼈다고 할 까닭이 없다. ‘-함’이나 ‘-스러움’도 불핑요하게 남용된다. 중국어는 동사와 명사가 형태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한국어에 많이 쓰이는 용언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중국 한자어에 ‘하다’나 ‘스럽다’를 붙여서 동사나 형용사처럼 만들었다. 탐욕스럽다. 비겁하다. 무정하다 같은 말이 그렇다. 따라서 영문을 번역할 때 탐욕스러움, 비겁함, 무정함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탐욕’ ‘비겁’ ‘무정’으로 해주는 것이 좋다. 탐욕스러움, 비겁함, 무정함은 원래 명사에서 유래한 동사형을 다시 동명사형으로 만드는 격이다 그냥 명사형으로 나타내주면 되지 번거롭게 동명사형으로 해줄 이유가 없다.
<들>에 대하여
영어는 단수와 복수를 민감하게 구분하지만 한국어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딱히 밝히지 않아도 된다.
“요즘 손님이 너무 많다.”하면 되지-“요즘 손님들이 너무 많다.”할 필요가 없다.
민중이다 대중은 그 자체가 집단을 가리키는데 민중들이라 하면 안 된다. 업적.실적도 업적들, 실이라 들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영어가 복수형이라 해서 한국어를 복수형으로 해줄 필요 없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새들이 떼 지어 난다,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각종 야채들을 판다, 는 흐드러지게라는 말, 떼 지어라는 말, 여럿이라는 말, 각종이라는 말에 이미 복수의 뜻이 들어가는데 굳이 ’들‘을 명사에 덧붙일 이유가 없다. 특히 의패어 같은 부사로 어 수 있는 경우에도 명사 다음에 굳이 들을 써줄 필요가 없다. “초가집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다.” “사과들이, 책들이’서 들이는 군말이다. 들을 붙이지 않아야 자연스러운 한국어가 나온다.
형용사 다음에 ‘-어 있다’를 써도 곤란하다. ‘집이 너무 낡아 있다.’보다 ‘집이 너무 낡았다’가 맞다.
‘-에 관해’도 남용하고 있다. ‘환경위생에 관한 법’보다는 ‘환경위생법’이 ‘명예에 관한 법’보다는 ‘환경위생법’이 ‘명예에 관한 문제’보다는 ‘명예 문제’가 한결 낫다. ‘감세 정책에 대해 찬성하세요?“ 보다 ‘감세 정책을 찬성하세요?“가 낫다 ”상수원 주위의 개발 금지에 대한 피해’보다 ‘상수원 주위의 개발 금지로 인한 피해’가 훨씬 나 내가 말했다는 밝히지 않는다. ‘깨닫다’‘알아차렸다’‘느끼다’도 번역을 안 해주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어느새 비가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보다 ‘어느새 비가 멎어 있었다’가 훨씬 자연스럽고 또 정확하다.
<빛깔에 대하여>
carmine을 영한사전에서 찾으면 ‘양홍색’‘진홍색’‘심홍색’‘카민’ 이라 되어있는데 색채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르고 어린이는 더 알기 어렵다. ‘벽돌빛’이나 ‘붉은 벽돌빛’이라 하면 된다. crimson은 적포도주빛이라 하면 쉽다.
전치사가 들어간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동사를 덧붙여주어야 자연스럽다. ‘나에 대한 관심’보다는 ‘나에게 보여준 관심’이 자연스럽다.
‘한국은 제국주의를 추구하기는커녕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다. 배경이 다르다 제국주의를 추진한 나라의 nationalism 은 애국주의다. 그들에게는 팽창을 지향하는 국가가 있었다. 식민지가 되어 나라를 잃은 공동체에게는 민족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라를 잃었으님 민족이라도 지켜야 한다. 침공의 역사로 얼룩진 나라들의 nationalism 과 침탈 역사로 얼룩진 나라의 민족주의를 똑같은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 작가 움레르토 에코는 번역가인데 프랑스 <실버> 작품을 번역하며 작중 화자는 꿈에 본 고향 마을이 문득 가고 싶어 한밤중에 무작정 마차를 타러 집을 나선다. 그런데 밤중에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마부는 차선책으로 ‘우체국까지 바대라 드리지요.’한다 그 당시로는 심야에 차가 없으니 우편물을 실어 나르는 우편 마차를 타고 가라는 뜻이다.그렇다면 번역할 때 우체국까지라고 하지 말고 ‘우편 마차가 있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지요.’로 번역해야 한다.
‘시계에 눈이 고정되어 있었다’보다 ‘시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가 자연스럽다. ‘나는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다.’보다 ‘나는 목석이 아니다.’가 자연스럽다.
어린이책을 번역할 때도 토박이말로 써주면 쉽게 이해한다. 한글 전용으로 글자만으로 구별이 안 될 때 토박이 말로 써주면 된다. 토박이말은 귢형감 있게 쓰는 것도 중요하다 한자어는 한자어와 어울리고 토박이 말은 토박이 말과 어울린다. ‘목마름과 허기를 채웠다’ 보다 ‘갈증과 허기를 채웠다.’거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웠다.’가 낫다. ‘믿고 기대한다’보다 ‘믿고 바란다.’가 안정감을 준다.
한국은 불과 100년 전까지 조상이 써놓은 수많은 한문으로 쓴 책을 후손이 읽을 수 없다. 해독력이 없어서. 원문을 그대로 읽을 수 없으니 한 다리 거쳐 읽다보니 활용성이 떨어진다. 한글은 우리가 입말로 쓰는 한국어를 담아내기에 너무 안성맞춤 글자다. <한불자전>은 표제어로 한글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알파벳으로 발음을 적어준다. 한글은 다양한 음을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소리 글자라서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 기독교가 중국, 일본보다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조선에서 한글을 주로 여자들이 편지나 일기를 쓸 때 썼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가나는 주로 여자들이 썼다. 오늘날 쓰이는 뜻 글자로는 한자가 유일하고 나머지 글자는 모두 소리 글자다. 영어 알파벳, 한글과 일본어 가나도 소리 글자다. “그 남자 참 웃기데.‘써야 할 것을 “그 남자 참 웃기대.‘로 쓰면 안 된다.
자기 현실에 대한 주인 의식 없이는 사전 편찬의 전통도 이어지기 어렵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전혀 습작을 안 했어도 마음만 먹으면 금세 좋은 글을 쓸 수 있짐ㄴ 책을 안 읽은 사람은 아무리 습작을 많이 해도 좋은 글을 쓰기 어렵다. 번역도 결국 글쓰기이다. 좋은 번역을 하려면 좋은 문장을 머릿속에 많이 담아놓아야 한다. 그래서 독서가 중요하다. 말이라는 것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은 어떻게 해 서든 이미 아는말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 움직이는 자동차가 없었을 때 사람들은 거기에다 ‘말 없는 마차’라고 했다. 초창기 영한사전에는 balcony를 툇마루. cheese는 소젖메주;라 했다. 차아 이것은 툇마루도 아니고 메주도 아니구나 깨달아 원래이름을 그대로 불렀다.이렇게 외래어가자리를 잡는다. 발코니와 치즈는 획실한 한국어다. 오렌지는 한국어니까 그냥 오렌지라면되지 혀를 꼬아 어륀지‘라 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