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속의공간] ⑧ 제부도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서 주인공 홍길동은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을 세운다. 박지원의 한문소설 <허생전> 역시 허생이 동해상의 무인도에 낙원을 건설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편, 남쪽 섬 보길도에 자신만의 낙원을 꾸몄던 윤선도는 `가어옹'(假漁翁)을 자처하면서 <어부사시사> 등의 노래를 남겼다.
허균과 박지원 그리고 윤선도의 작품들은 한국문학에 나타난 `섬' 이미지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 허균과 박지원의 소설에서 섬은 현실의 모순을 일소한 바람직한 이상국가의 건설지로 꿈꾸어지며, 윤선도의 연시조에서는 세속 잡사에 휘둘리지 않는 채 자연의 풍요와 아름다움을 구가하는 자족의 낙토(樂土)로 묘사된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섬사람들의 삶의 실상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 시인·소설가들이 어찌 됐든 지배층인 양반의 일원으로서 기층민의 삶의 조건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했기 때문일 터이다.
현대문학에서의 섬의 형상화가 그곳 사람들의 삶의 애환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태준의 단편 <바다>(1936)와 전광용의 단편 <흑산도>(1955)가 대표적이다. 두 작품은 모두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실종된 뒤 홀로 남은 젊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끼니를 때우기 어렵도록 가난한 두 주인공에게 위협 혹은 유혹이 닥쳐온다. 그것들이 나란히 뭍으로부터 온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바다>의 주인공 옥순이는 대처의 술집으로 팔려나가게 되며, <흑산도>의 북술이는 육지에서 온 선원을 좇아 섬을 떠날 결심을 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옥순이는 바다에 몸을 던지고 북술이는 선원이 기다리는 약속 장소로부터 도망친다.
이들의 후배 소설가인 송기원과 한창훈은 거꾸로 뭍에서 섬으로 들어온 여자들의 얘기를 들려준다. 송기원의 단편 <수선화를 찾아서>에서 “더 이상 갈 데가 없이 끝까지 와버린 술집 여자” 숙희는 섬 생활 7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아름답다고 말해 준 육지 손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한창훈의 <숭어>에서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자를 따라 섬으로 들어 온 성자가 “평생 섬에서 썩어야 될 것 같”은 두려움에 틈만 나면 뭍으로 나가자고 남편을 졸라댄다.
이태준과 전광용 소설의 주인공들이 연인의 죽음과 집안의 가난이라는 사태를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 감내하는 데 비해, 천승세의 중편소설 <낙월도>와 <신궁>에는 사태를 계급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대처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특히 <신궁>의 주인공인 단골레 왕년이는 어민들을 착취하고 자신의 남편을 죽게 만든 선주 판수에게 신의 활(神弓)을 쏨으로써 공통의 복수를 수행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송기숙의 장편 <암태도> 역시 소작인들의 계급적 각성과 싸움을 그린 소설이다.
하근찬의 <낙도>와 홍성원의 <마지막 우상>은 다같이 뭍에 대한 섬사람들의 피해의식과 적대감을 다루고 있지만, 각각의 강조점은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낙도>에서는 가난 속에서도 학예회라는 마을 축제를 준비하는 교사들과, 육지에서 구호물자를 싣고 오는 서양인 선교사의 대리인인 `전도 부인' 사이에 대립점이 형성된다. 가난한 섬과 부유한 뭍 사이의 길항은 같은 시각에 예비된 학예회와 세례식 사이의 충돌로써 대행되는데, 작가의 애정은 가난한 섬사람들 쪽에 쏠려 있다. 반면, <마지막 우상>의 작가는 육지와 육지 사람들을 적대시하며 고립과 폐쇄를 택하는 가막도 사람들에 대해 “닫힌 바다를 섬기지 않고 열린 바다를 사랑할 것”을 권고한다.
섬과 뭍의 대립과 충돌이 역사적 구체성을 얻은 곳에서 현기영과 임철우의 소설이 탄생한다.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은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와 <바람 타는 섬>, 그리고 4·3 항쟁을 다룬 <순이삼촌> 등의 작품에서 줄기차게 `외세'와 토착민 사이의 대립·투쟁을 형상화한다. 임철우 역시 단편 <곡두 운동회>와 장편 <붉은 산, 흰 새> 등에서 평화로운 섬마을을 풍비박산 낸 외래의 이념을 고발한다.
<붉은 산, 흰 새>에서 섬을 뒤흔든 야만적 폭력과 참혹한 비극을 겨냥했던 임철우가 같은 섬을 무대로 한 후속 장편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는 가난하지만 평화로웠던 유년기의 섬을 되살린 것은 인상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섬 출신인 젊은 시인 장석남 역시 <덕적도 시>에서 자신의 유년기를 아름답게 회고하고 있다.
“아버지는 종일 모래밭에 와서 놀더라/아버지는 저녁까지 모래밭에 숨을 놓고 놀다/모래알 속에 아들과 딸을 따뜻이 낳아두고 놀다 가더라/해당화밭이 애타는 저녁까지”
허균과 박지원이 꿈꾸었던 이상향으로서의 섬이라는 주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작가가 이청준이다. 나환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소록도를 배경으로 한 장편 <당신들의 천국>에서 그는 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선의가 어떻게 지옥을 낳을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그려 보인다. 이밖에도 그는 <섬> <이어도> <노송> 등 섬을 제재로 삼은 단편을 여럿 썼는데, 이 가운데 <이어도>는 현실과 허구, 고통과 구원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설파한 문제작이다.
소설가들이 섬의 역사와 현실을 붙잡고 고투를 벌이는 한편에서 시인들은 세파의 찌든 때를 벗어버릴 무욕과 초탈의 땅으로서 섬을 노래한다. 그것은 무책임한 `외부인'의 시선일 수 있지만, 동시에 매력적인 공상이기도 하다.
“맑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간, 섬의 별이란 별은 하늘로 전부 올라가 있는 시간, 그는 무인도 한복판으로 바람 부는 대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우뚝 서서 그를 인간이게 하는 겉껍질을 깎는다, 깎을수록 투명한 하나의 돛이 될 때까지.”(신대철 <다시 무인도를 위하여>)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화장도 해탈도 없이/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바람과 놀게 해다오.”(황동규 <풍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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