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는 공이 길동을 산에 있는 정자에 머물게 하고
행동 하나하나를 엄격하게 감시했다.
길동은 이런 일을 당하자 설움이 더욱 북받쳤지만
어쩔 수가 없어 육도삼략이라는 병법과 천문지리를 공부하고 있었다.
공이 이 사실을 알고는 크게 근심하여 말했다.
"이 놈이 본래 재주가 있으니, 만일 과분한 마음을 품게 되면
관상녀의 말과 같을 것이니, 이를 장차 어찌하랴?"
이때 초란이 무녀 및 관상녀와 내통하여 공을 놀라게 하고는
길동을 없애고자 거금을 들여 자객을 매수했는데, 그 이름은 특재였다.
초란은 특재에게 전후 내막을 자세히 일러주고는 공에게 가서 아뢰었다.
"며칠 전 관상녀가 아는 일이 귀신 같으니, 길동의 앞일을 어떻게 처리하려 하십니까?
저도 놀랍고 두려우니 일찍 길동을 없애 버리는 것이 나을듯하옵니다."
공은 이 말을 듣고 눈썹을 찡그리면서,
"이 일은 내 손바닥 안에 있으니, 너는 번거롭게 굴지 말라." 하고 물리치기는 했으나,
마음이 자연 산란하여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해 병이 나고 말았다.
부인과 좌랑 인형이 크게 근심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초란이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아뢰었다.
"상공의 병환이 위중하심은 길동으로 인한 것입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길동을 죽여 없애면 상공의 병환도 완쾌되실 뿐 아니라,
가문도 보존할 것이온데,
어찌 이점을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부인이 이르기를,
"아무리 그렇다 한들 천륜이 지중한데 차마 어찌 그런 짓을 하겠나." 고 하자,
초란이 말했다.
"듣자오니 특재라는 자객이 있는데,
사람 죽이기를 주머니 속의 물건 잡듯이 한답니다.
그에게 거금을 주고 밤에 들어가 해치게 하면,
상공이 아셔도 어쩔 수 없을 것이오니, 부인은 재삼 생각하십시오."
부인과 좌랑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는 차마 못할 바이로되,
첫째는 나라를 위함이요,
둘째는 상공을 위함이며,
셋째는 홍씨 가문을 보존하기 위함이니, 너의 생각대로 하려무나."
그러자 초란이 크게 기뻐하면서,
다시 특재를 불러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오늘 밤에 급히 행하라 하니,
특재가 그렇게 하겠다 하고 밤 들기를 기다렸다.
☆☆☆
한편, 길동은 그 원통한 일을 생각하니 잠시를 머물지 못할 바이지만,
상공의 엄령이 지중하므로 어쩔 수가 없어 밤마다 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촛불을 밝혀 놓고 <주역>을 골똘히 읽고 있는데,
까마귀가 세 번 울고 갔다.
길동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혼잣말로,
"저 짐승은 본래 밤을 꺼리거늘, 이제 울고 가니 심히 불길하도다." 하면서
잠시 <주역>의 팔괘로 점을 쳐보고는,
크게 놀라 책상을 밀치고 둔갑법으로 몸을 숨긴 채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사경쯤 되자
한 사람이 비수를 들고 천천히 방문으로 들어오는지라,
길동이 급히 몸을 감추고 주문을 외니,
홀연 한 줄기의 음산한 바람이 일어나면서,
집은 간 데 없고
첩첩산중에 풍경이 굉장하였다.
크게 놀란 특재는
길동의 조화가 무궁한 줄 알고 비수를 감추며 피하고자 했으나,
갑자기 길이 끊어지면서
층암절벽이 가로막자,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방으로 방황하다가 피리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한 소년이 나귀를 타고 오며 피리 불기를 그치고 꾸짖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하는가?
무죄한 사람을 해치면 어찌 천벌이 없으랴?" 하고 주문을 외니,
홀연히 검은 구름이 일어나며
큰 비가 물을 퍼붓듯이 쏟아지고 모래와 자갈이 날리었다.
특재가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길동이었다.
재주가 대단하다고는 여기면서도 '어찌 나를 대적하리오.'하고
달려들면서 소리쳤다.
"너는 죽어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
초란이 무녀와 관상녀로 하여금 상공과 의논하게 하고,
너를 죽이려 한 것이니, 어찌 나를 원망하랴."
칼을 들고 달려드는 특재를 보자,
길동은 분함을 참지 못해
요술로 특재의 칼을 빼앗아 들고 호통을 쳤다.
"네가 재물을 탐내어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너같이 무도한 놈은 죽여서 후환을 없애겠다." 하고 칼을 드니,
특재의 머리가 방 가운데 떨어졌다.
길동은 분노를 이기지 못해 그날 밤에 바로 관상녀를 잡아 와
특재가 죽어 있는 방에 들이쳐 박고 꾸짖기를,
"네가 나와 무슨 원수 졌다고 초란과 짜고 나를 죽이려 했나?" 하고
칼로 치니,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이때 길동이 두 사람을 죽이고 하늘을 살펴보니,
은하수는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달빛은 희미하여 마음은 더욱 울적해졌다.
분통이 터져 초란마저 죽이고자 하다가,
상공이 사랑하는 여자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칼을 던지고 달아나
목숨이나 건지기로 마음먹었다.
☆☆☆
바로 상공 침소에 가 하직 인사를 올리고자 하는데,
마침 상공도 창 밖의 인기척을 듣고서 창문을 열고 살폈다.
공은 길동임을 알고 불러 말했다.
"밤이 깊었거늘 네 어찌 자지 않고 이렇게 방황하느냐?"
길동은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소인이 일찍 부모님께서 낳아 길러 주신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까 하였더니,
집안에 옳지 못한 사람이 있어
상공께 참소하고 소인을 죽이고자 하기에,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상공을 모실 길이 없기로 오늘 상공께 하직을 고하옵니다."
공이 크게 놀라 물었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서 어린아이가 집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다는 거냐?"
길동이 대답했다.
"날이 밝으면 자연히 아시게 되려니와, 소인의 신세는 뜬구름과 같사옵니다.
상공의 버린 자식이 어찌 갈 곳이 있겠습니까?"
길동이 두 줄기의 눈물을 감당하지 못해 말을 이루지 못하자,
공은 그 모습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타일렀다.
"내가 너의 품은 한을 짐작하겠으니,
오늘부터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불러도 좋다."
☆☆☆
길동이 절하고 아뢰었다.
"소자의 한 가닥 지극한 한을 아버지께서 풀어 주시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아버지께서는 만수무강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하직하니,
공이 붙잡지 못하고 다만 무사하기만을 당부하더라.
길동이 또 어머니 침소에 가서,
"소자는 지금 슬하를 떠나려 하오나 다시 모실 날이 있을 것이니,
모친은 그 사이 귀체를 아끼십시오." 하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춘섬이 이 말을 듣고 무슨 까닭이 있음을 짐작하나
굳이 묻지는 않고 하직하는 아들의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말했다.
"네 어디로 가려 하느냐?
한 집에 있어도 거처하는 곳이 멀어 늘 보고 싶었는데,
이제 너를 정처없이 보내고 어찌 잊으랴.
부디 쉬 돌아와 만나기를 바란다."
길동이 절하고 문을 나와 멀리 바라보니
첩첩한 산중에 구름만 자욱한데 정처없이 길을 가니 어찌 가련치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