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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동진(和光同塵)
해방 전 경봉은 풍진 세상을 비껴나 한도인(閑道人)으로 나날을 보냈다.
3조 승찬이 남긴 <신심명>의 첫머리처럼 무엇을 간택하거나,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일상으로 돌아와 무심히 극락암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한도인이라 해서 말 그대로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에 집착하여 시비가 없기 때문에 겉으로는 한가하게 보이지만
도인처럼 하루가 바쁜 사람도 없을 터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온몸으로 살기 때문인 것이다.
도인에게는 자잘한 일상으로 돌아와 무심하게 머물고 있는 것이 최고의 정진이었다. 경봉은 그런 일상을 <삼소굴 일지>에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는 것이다.
‘1944년 2월 22일 화요일 맑음.
오전에 간장 담그다. 콩 6말 물 36동이에 소금(청염) 2가마 반, 매 동이마다 소금
고두 1되 평두 1되 넣다. 매주가 98덩이, 3독에 큰 독에는 29개,
작은 독에는 28개가 들어갔다. 백소금이면 고두 2되가 적당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은 승속을 가릴 것 없이 만세를 부르게 했다.
산중의 절에서도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양식이 부족해 선방이 폐쇄되고
흘린 콩나물 대가리도 주어먹던 궁핍한 살림이었지만 자축하느라고 창고의
가마니를 헐어 만든 흰떡을 사하촌까지 돌린 절도 많았다.
경봉은 오전에 큰절 대웅전에서 대중들에게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하고 가만히 선정에 들어 해방을 맞이했다.
눈을 감고 있자, 먼저 만해가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년 전에 입적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만해였다.
경봉으로서는 22세 때 통도사 강원에서 만해의 <월남망국사>를 강의 들은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만해는 감정에 북받쳐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는데, 월남이 주권을 빼앗긴 우리나라와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경봉은 만해가 머리를 휘휘 휘젓는 모습도 떠올랐다.
머리를 자꾸 흔들어대는 바람에 종강 시간에 기념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해가 시베리아 여행 중 그 지역 주민에게 첩자로 오인을 받아 머리에
총을 맞은 후유증으로 그랬던 것이다.
만해는 경봉의 강사인 셈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경봉은 상경하여 시간이 나면 가끔 심우장을 들르곤 했다.
그때마다 만해는 소홀한 대접을 미안해했다.
“경봉수좌. 찬이 없는 밥이라서 미안하오.”
“그러지 마십시오. 맛있게 먹겠십니더.”
그러면 만해는 농담을 하나 던지며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지금이라도 한 생각 고쳐먹으면 대접을 잘할 수 있을 것이오.”
만해가 한 생각 고쳐먹는다는 것은 조선총독부와의 타협을 말하는 것인데,
조선총독부가 역겨워서 심우장을 북향으로 앉힌 그이고 보면 농담이 분명했다.
경부선 열차는 해방 된 날부터 정지되었다가 3일 후에야 운행되었다.
각 역마다 지역 주민들이 몰려나와 만세 부르며 해방가를 불렀다.
통도사에서 가장 가까운 물금역도 마찬가지였다.
경봉은 시를 한 수 지어 자축했다.
동해 반도에 새 가을 맞아
만국전쟁이 이날 모두 끝났네
길이 빛 나거라 순국절사의 공명이여
와신상담한 충렬들 얼마나 근심스러웠나
매란의 은은한 미소 뭇 향기 압도하고
강과 바다가 서로 어울려 한맛으로 흐르네
풍진이 다 지나가 국민들 즐거워하니
이제부터는 응당 태평세월을 누리리라.
扶桑半島到新秋
萬國干戈此日收
殉節功名長歲活
臥薪忠烈幾時愁
梅蘭暗笑衆香壓
江海相和一味流
歷盡風塵民快樂
也應今後太平遊
이 <해방의 노래>에서 경봉의 순수한 의지가 담겨 있는 대목은
‘강과 바다가 서로 어울려 한 맛으로 흐르네’라는 구절이었다.
수많은 강물이 바다에 이르면 한 맛으로 변해버리듯
경봉 자신도 인간 세상에 뛰어들어 모든 중생을 부처로 만들겠다는
서원을 했던 것이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산문 밖으로 나가 인간 세상에 섞이어 사는 것을
불가에서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부르고,
수행자의 이상은 누구나 상구보리 하화중생
(上求菩提 下化衆生; 진리를 구한 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었다.
마침 경봉은 선학원 이사장에 당선되어 서울 선학원으로 정해진 때마다
올라가 대중을 상대로 <선문촬요>와 <반야심경>그리고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설법했다. 한번 올라가면 일주일 혹은 그 이상씩 머무르면서
설법을 했는데,
하루는 선학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가 운봉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만해, 운봉, 만공 등 선승들이 하나 둘 입적할 때마다 경봉은 잠시 선정에 들어
영가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해방을 전후해서 선승들이 하나 둘 가고 있었다.
경봉은 혜월의 법을 이은 운봉과는 곧잘 현담을 나누던 사이로 생전 운봉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의 영가에게 향기로운 차를 한 잔 따랐다.
백련암에 선방을 개설했을 때 경봉은 통도사 주지로 있으면서 운봉을 조실로
초빙했는데, 그때 백련암 선방에서는 젊은 향곡, 성철 등이 정진했던 것이다.
운봉의 인상은 강철처럼 구부러지지 않는 강인함이었다.
운봉의 상호는 기이했다. 한 수좌의 표현에 의하면 까만 얼굴에 눈은 마치
바늘귀처럼 작았다. 이마와 광대가 툭 나오고 턱이 뾰죽하였다.
종일 침묵하고 좀체 말이 없었다.
길을 가다가 비가 쏟아져도 결코 뛰는 법이 없었다. 벼락이 쳐도 부동이었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자세는 태산과 같이 부동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운봉의 목소리는 연잎에 떨어지는 봄비 소리처럼 매우 아름다웠다.
그래서 수좌들은 검은 얼굴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합해서 운봉의 별명을
‘굴뚝새 조실’이라거나 ‘굴뚝새 화상’이라고 불렀다.
그런 목소리의 운봉도 선문답을 할 때만은 불꽃이 튀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험구(險口)로 일관했다.
경봉은 운봉과 한암 사이에 벼락 치듯 오고간
선문답을 전해들은 적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운봉이 오대산 상원사로 한암을 찾아가 물었다.
“스님, 스님 오도송에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눈이 밝았으니
/ 이로 좇아 옛 길이 인연따라 맑네
/ 누가 와서 조사의 뜻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 바위 아래 울려대는 물소리는 젖지 않았더라 하리라.’고 하셨는데
끝의 암하천명불습성
(岩下泉鳴不濕聲)이 어떻게 이것이 조사의 뜻이 될 수 있습니까.”
운봉의 질문은 한암이 우두암에서 깨쳤을 때 지은 이 시는
조사선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암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네 뜻이 아닌 고로 조사의 뜻이니라(不是汝意故 是祖師意).”
운봉은 한암의 제자가 오대산에서만 나는 텁텁한 마가목차를 사발에 따라주자
, 훌쩍 마시더니 작은 눈을 끔벅거리며 다시 말했다.
“스님께서 속서(俗書)에 능한 것을 익히 들었습니다.”
속서에 능하다는 것은 저잣거리의 선비를 일컫는 말로 수행자로서는
결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속서는 물론이고 불서(佛書)마저도
뛰어넘어야 진정한 선승이기 때문이었다. 한암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내가 그대를 공부인(工夫人)인 줄 잘못 부를 뻔했다(錯喚汝是林下客).”
이 무렵 경봉에게는 단아한 상좌 한 명이 있는 듯 없는 듯 정진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법호는 벽안(碧眼), 법명은 법인(法印)이었다.
1937년 경봉을 은사로 출가한 그는 경봉 회상을 떠나 해인사에서 정진 중이었다. 사찰 순례를 하다가 해인사에 주저앉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경봉에게
보내었던 것이다.
‘미혹한 제자는 해인사 법보사찰을 참배하고 금년 동안거를 지낼 예정이온데
모법 총림으로 칼날과 같습니다. 효봉 화상께서 조실로 계시고 만공,
한암 양대선사께서 증명으로 오르시고 결제대중도 근 30명이나 됩니다.
양로원 시설도 겸했으며 총림외호는 주지화상이 전담하며 내외살림살이가
아주 원만하게 짜였으니 부처님 태양이 더욱 빛남이 어찌 금일의 이 총림시설이
아니겠습니까. 금년 겨울에는 용맹 정진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코자 하오니
멀리서 가호 있으시기를 바라나이다.’
경봉은 노파심으로 벽안에게 불전에 올리는 공양만큼은 성심을 다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수행자의 근본 도리이기 때문이었다.
불전에 마음을 등한히 하면 해(害)가 있을 것인바,
사시에 법당마지를 지어 올리는 데 보리쌀을 섞지 말라 한 것이다.
‘보리는 기를 때 인분을 주어서 자라게 하므로 옛날 고인들도
성심마지(誠心摩旨)에는 보리쌀을 넣지 않았으니
법당불전 사시마지를 공양주에게 단속하여 성의있게 하여야 한다.’
그런가 하면 벽안이 사중(寺中)의 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위장병을 앓을 때
경봉은 약을 구해 보내주기도 했다.
‘소화가 잘 안된다 하니 구레오소드환 1병을 보내니 매일 2회에 6개씩
온수에 복용하시오.’
경봉의 효성스런 상좌를 꼽으라면 누구라도 주저하지 않고
벽안을 먼저 드는데, 그가 효상좌가 된 데에는 이처럼 경봉의 제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은 제자는 결코
경봉에게 믿음을 얻지 못했다. 경봉은 선학원에 가서도, 극락암에서도
공부인들에게는 허수아비에게 속지 않고 맹렬하게 나아가는 멧돼지처럼,
힘 있게 짓밟고 지나가는 소가 되라고 가르쳤다.
콩밭에 풀로 만든 하수아비를 소가 먹어버린 것은 경봉이 실제로 조국이
해방이 되던 8월 초에 경험한 일이었다. 한 뙤기의 콩밭은 극락암 입구에 있었다. 경봉이 콩잎을 자주 뜯어먹는 산짐승을 쫓기 위해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놓았던 것이다. 이후 경봉은 어디에서나 이 이야기를 소재로
설법을 자주하였다.
‘선창(禪窓) 밖에 한 뙤기 콩밭이 있는데 산짐승과 들새들이 자주 침해하기에
마른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밭 한 가운데 세워놓았다.
처음에는 들새와 산짐승들이 허수아비를 사람으로 속아 의심하여
들어가지 않더니 하룻밤에는 소가 밭에 달려 들어가서 콩을 다 뜯어먹고
허수아비도 의심치 않고 모두 먹어버렸다.’
대중들이 망친 콩밭을 보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경봉은 손뼉을 치며 허허 웃고 말았다.
시 한 수를 읊조리기까지 했다.
마른 풀로 사람을 만들어 옷 입혔더니
들새와 산짐승들 사람인 줄 의심했네
흉년과 험한 세상 아랑곳도 안하고
전쟁 나서 징병해도 민적에서 빠졌구나
서 있는 그 모양 언제 봐도 춤추는 듯
형용은 야밤중에 다시 새로워
들소가 힘도 세고 눈까지 밝아
곧 밭에 뛰어들어 허수아비를 먹어버렸네.
경봉은 허수아비를 소가 먹어치워 버렸다고 대중들이 걱정할 때
자신은 마음속으로 느낀 바가 있어 위와 같은 시를 읊조렸던 것이다.
화두 들고 공부할 때는 산짐승이나 들새처럼 허수아비를 의심하지 말고,
오히려 허수아비조차 먹어버리는 소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당시는 선방을 운영하기 위해 스님들이 소를 키우던 시절이었으므로
생겨난 선화(禪話)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소는 산중에서 재산이
되는 짐승이었다. 당시 경부선 급행열차표 값이 25원 50전이었던 비해 극락암
선방 대중들이 키우던 어미 소를 언양 우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자그만치 7600원이나 받았던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경봉은 극락암이 아닌 다른 선방이나 포교당의 청도 거절하지
않고 가서 법문을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천성산 내원사 선원을 자주 갔다.
내원사가 통도사 말사인데다가 자신이 일찍이 주지로 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원선원에서 한 법문 중에 훗날의 선승들이 즐겨 말한 ‘산은 산 물은 물’이란
화두도 실은 경봉이 그때 처음으로 말한 것이었다.
‘삼십년 전에 마음이 곧 부처라는 생각으로 천성산에 들어오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이십년 전에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천성산을 보니 산이 산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니더라.
오늘 마음과 부처에 관심 없이 떡과 밥을 배불리 먹고 천성산을 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이 셋 가운데 어떤 것이 옳은가. 천성산이여, 청산이 높고 높으며
흐르는 물이여, 녹수가 잔잔하도다. 흰구름이여, 장마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녹음이여, 산새가 지저귀도다. 선덕(禪德)들에게 맡기노니 머리를 돌이켜
잘 볼지어다. 천성산이 깊으니 구름 그림자 차고 낙동강이 너르니 물빛이 푸르도다.’
경봉은 6.25전쟁 전에 통도사 주지를 또 맡았다.
주지를 다시 하기로 한 것은
통도사를 해인사처럼 총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반대가 심했다.
절 살림이 몹시 궁핍하기 때문이었는데,
경봉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몇몇 승려들이 찾아와 주지 사임을 권고하기도 했다.
경봉은 당시 몇몇 대중들의 행태에 어이없는 웃음을 허허 지으며 자신의
심정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취한 듯 미친 듯 세상 사람들이여
미한 듯 깬 듯하니 누가 감히 헤아리랴
시비와 장단은 그대에게 맡기노니
우습다 뭇 세정을 내가 벌써 알겠구나.
如醉如狂世滓漢
似迷似悟人難曉
是非長短任君說
笑殺群情勘破了
그래도 경봉은 적어도 삼보사찰인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만큼은 총림이 되어야
한다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해동수도원(海東修道院)을 만들었다.
당시 교정(敎正; 종정)이던 한암을 종주(宗主; 방장 혹은 조실)로 모시고자
곡천(谷泉)과 대야(大冶)를 오대산 상원사로 보냈다.
그러나 한암은 병이 깊어 다음과 같이 거절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만 중원(重遠; 한암의 법명)의 병은 깊고 몸은 약해서 근근히 이 그림자 같은 물질을 지탱해 가고 있습니다. 하물며 나이 팔순에 가까운
늙은 것이 종주(宗主)의 청장(請狀; 요청서)을 받아간다면 망령된 행동이고
큰 수치가 될 것입니다. 어디에 뒷방이나 비워두시면 살아생전 함께 모여
정담이나 나누겠으니 이렇게 보류합니다.
탄허(呑虛)가 나보다 학식과 문필이 천만억 배나 낫고, 또 십육칠 년 간 나와 함께 정진하였으니 수도원에 임시로 수좌(首座)로 두어 두시면 좋은 일이 있을 듯합니다. 그리 알고 처리해 주십시오. 종주는 언제라도 스님이 적임자이니 다른 생각은
마십시오.
그만 정신이 피로하여 이만 줄입니다.>
한암을 종주로 하는 총림 계획은 당장 차질이 왔다. 한암이 종주를 거절한 데다
경봉의 뜻을 따르지 않는 악인의 무고로 양산경찰서로 출두하여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당시 양산경찰서장은 독실한 불자로서 경봉을 존경하는 인물이었는데, 서장이 출장 간 사이에 사찰계장이 스님을 불러 참혹하게 고문을 가했던 것이다.
사찰계장은 경봉을 좌익으로 몰았다.
“야산대(野山隊; 토벌대)에게 9월과 10월 사이에 15만원을 주지 않은 것을 보니
당신도 빨갱이와 한패이구만.”
이틀 동안 경봉은 일본 형사들이 지하에 남기고 간 전기고문기구와 몽둥이로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경봉은 만신창이 몸이 되었지만 선정에 들어 고통과
수모의 시간을 버텼다. 경봉으로서는 총림에 사용할 돈을 결코 야산대에 내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출두한 지 하루가 지나 상좌 벽안이 면회를 와 통곡을 하는데도 경봉은 피딱지가 맺힌 입술에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사찰계장은 상소리를 한동안 지껄이더니 취조실 바닥에 침을 뱉으며 나가버렸다.
서장이 출장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상황은 반전됐다. 서장은 경봉을 서장실로
불러 정중하게 사죄했다. “큰스님, 사찰계장을 파면시켰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경봉은 자신을 고문한 그를 미워할 생각이 없었다.
“그 사람도 깨치면 부처이지요.”
경찰서에서 만신창이 몸으로 돌아온 경봉은 건강을 걱정하는 일타(日陀)에게
시절에도 인연이 있으니 순리를 기다리자고 말했다.
“내가 주지를 한 것은 사욕을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제일의 사찰
통도사에 꼭 필요한 총림을 만들어야 한다는 원력이 있어 그런기라.
세상의 모든 일에는 시절인연이 있대이. 일타수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결국 경봉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주지 소임을 사임하고
6.25전쟁이 나기 3개월 전에 고향인 밀양 무봉사로 옮겨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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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경봉 대선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