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 구석기 유적의 소중한 꿀단지,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등장으로
구석기 역사를 새로 쓰게 하였던 전곡리 선사유적지 - 사적 268호
▲ 전곡리 선사유적지 내부 |
한탄강이 'U'자로 크게 굽이쳐 흐르는 전곡읍 서남쪽 강변 언덕에 구석기 유적지의 성지로
추
앙받고 있는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넓게 누워있다.
인류의 본격적인 첫 시대라 할 수 있는 구석기시대는 약 300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를 일컫
는데 약간의 중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로 발전하게 된다. 구석기 사람들은 강가나 동굴에
주로 살면서 과실을 따먹거나 동물을 사냥해 식량을 해결했으며,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과 거
의 비슷해 보인다. 허나 그들은 일반 동물과 다르게 돌을 다듬어서 사냥 도구로 사용했다. 또
한 불을
지피는 방법을 터득하여 추위를 이겨내고 맹수들의 공격을 막았으며, 잡은 동물을 불
로 구워 먹었다. 이것이 동물과 사람의 큰 차이점이다.
구석기 사람들은 자연석을 다듬거나 바위에서 돌을 떼어내 주먹도끼 등을 만들었는데, 주먹도
끼가 바로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역사/국사 교과서에 아주 지겹도록 등장한다. 이
도끼는
구석기 초기에 등장하며, 프랑스 생따슐(St. Acheul)에서 발견되어 지역 이름을 따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라 불린다.
그 주먹도끼는 전곡리 유적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서남아 지역에서 많
이들 나왔으며,
1940년대 초, 미국 하버드대학의 모비우스(H.L. Movius) 교수가 그동안의 고
고학 자료를 근거로 내세우며 이상한 학설을 내뱉었다. 인도를 중심으로 그 서쪽 유럽과 아프
리카, 서남아를 아슐리안 주먹도끼 문화권으로, 인도 동쪽 아시아를 찍개 문화권으로 나눈 것
이다. 찍개 역시 돌로
다듬은 도구이나 주먹도끼보다는 다소 떨어진다.
그래서 그걸 두고 구석기시대부터 이미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했고 아시아는 주먹도끼가 없으
므로 그때부터 정체되었다고 주장했다. 털만 많은 양놈들의 그런 삐뚤어진 생각을 보기 좋게
참교육시킨 현장이 바로 이곳 전곡리이다.
전곡리의 등장으로 그동안 서양 오랑캐들의 의해 그릇되게 작성된 구석기 역사는 새로 쓰여지
게 되었으며, 천하 굴지의 구석기 유적으로 꽤 무거운 존재가 되었다. 이곳을 통해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고, 전곡리를 시작으로 아시아 곳곳에서 주먹도끼가 쏟아
져 나왔다. |
▲ 전곡리 선사유적지 발견을 대서특필한 1978년 봄 신문기사들 |
한탄강변에 자리한 전곡리 선사유적 일대는 숲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속에는 억겁의
세월이 숙성된 보물이 잠들어 있었고, 이미 그 일대에 석기들이 적지 않게 노출되어 속세(俗
世)의 관심을 애타게 바랬건만 사람들은 단순 돌로만 생각했지 아무도 그들을 크게 여기지 않
았다. 허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크게 드러난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일이 터지고 말
았다.
때는 1978년 3월 '그렉 보왠(Mr. Gred Bowen)'이란 주한 미군이 한탄강에 놀러왔다. 그는 인
디애나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자로 돈벌이를 위해 주한 미군에 들어왔다.
한탄강을 거닐던 그는 강 주변에 석기로 보이는 돌맹이가 많은 것에 크게 놀랬다. 자신의 짧
은 소견으로 볼 때
분명 선사시대 석기로 여겨져 석기 사진과 발견 경위를 작성하여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학자 보르드(Bordes)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르드는 그 사진을 보고 크게 놀랐다. 바로 아슐리안 주먹도끼였던 것이다. 허나 그 역시 전
형적인 양이라 그걸 쉽사리 믿지 않으며 '이 유물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면 아
슐리안 문화의 석기가 맞다. 내가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발견이지만 그럴 수가 없
으니 우선 서울대학교 김원용 교수를 찾아가 자문을 얻으라' 답을 하였다.
그러자 보웬은 그 석기를 들고 서울대를 찾아가 김원용 교수를 만났는데 그 석기를 살펴본 김
원용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여 발굴단을 꾸려 전곡으로 달려갔고, 그해 5월 14일 전곡리
일대를 지표 조사하였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김원용 교수와 영남대 정영화 교수가 진단학보
에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 문화예보'를 발표하여 전곡리 유적은 서양 고고학자들의 염
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이름을 드러낸다. |
▲ 오래 잠들어있던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깨우다.
1978년 5월 전곡리 유적 지표 조사 장면 |
1979년 3월 26일, 김원용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박물관 발굴단과 경희대와 영남대, 건국대가
연합해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후 전곡리 유적을 중심으로 전곡리 일대에서 30여
년 동안 17회의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약 8,500점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인근 강에서 가져온 강자갈로 제작된 것으로 다소 거칠게 다듬은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잘 다
듬어진 찍개, 가로날도끼, 긁개, 소형 박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곡리의 명성을 듣고 다른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교수와 고고학자들이 찾아와 이곳을 조사했
으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30만 년 전으로 판단되고 있다. 참고로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평양(平壤) 부근에 있는 상원 검은모루동굴 유적으로 약 100만년
을 헤아린다.
전곡리 선사유적은 크게 5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1지구는 처음으로 석기가 발견된 곳이고,
2지구는 1지구 남쪽 건너편으로 주먹도끼가 많이 나왔으며, 3지구는 발굴유구와 습지가 있고,
4지구는 제1차 발굴(1979년) 때 발견된 강 건너 고능리 지역이고, 5지구는 유적지의 동편 언
덕
일대이다. |
▲ 전곡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위엄
그의 등장으로 한참이나 잘못된 구석기 역사는 새로 쓰여지게 되었고, 뼛속까지
서양 우월주의로 물들었던 양이 고고학자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아시아에는 찍개만 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섬세한 주먹도끼도
일찌감치
있었던 것이다. |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돌을 전체적으로 손질하여 끝부분이 뾰족
하고 몸체는 둥근 모습이며, 석기의 양측면에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용해 나
무를
벗기고나 동물 사냥, 가죽 벗기기 등에 사용했다. 그래서 만능석기라 불리기도 한다.
전곡리에서 나온 주먹도끼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와 달리 몸체가 두텁고, 자
연면이 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채석을 통해 규소 성분이 풍부한 양질의 석재를 이용
한 유럽, 아프리카와 달리 전곡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영이나 규암 등으로 된 강자갈을 주
로 사용하여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측면날보다는 뾰족한
끝부분의 손질에 더 집중한 경향이 있어 자르는 도구로 주로 사용된 서양과 달리 대상을 찍거
나 땅을 파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
▲ 토층전시관에 전시된 전곡리 유적 발굴 이야기와 이곳을 발굴한
구석기시대 전문가 김원용의 빛바랜 수첩
김원용 교수는 1993년 세상을 뜨면서 전곡리 유적에 유해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했다.
그만큼 이곳은 그에게 의미가 각별한 곳이자 그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켜준
소중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
전곡리 유적의 지층 구조는 2001년에 조사된 E55S20 발굴피트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곳은 현
무암을 기반암으로 하여 그 위에 사질층, 실트층, 점토층이 쌓여 있는데, 퇴적층의 최상부에
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토양쇄기가 4~5차례 반복되며, 1번 째 토양쇄기면과 2번 째 토양
쇄기면
상부에서 왜열도에서 날라온 2개의 화산재와 AT(약 25,000년 전), K-Tz(약 95,000년
전)가 발견되었다. 이들 화산재는 분출된 연대가 대략 밝혀졌기 때문에 전곡리 유적의 장대
한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소중한 단서가 되었다.
퇴적층 하부의 사질층과 실트층은 하천 퇴적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상부의 붉은 색조의 점토
층에 대해서는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날라온 풍성퇴적물이라는 설과 강의 범람으로 쌓인 퇴적
물이라는 설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구석기 유물 상당수는 붉은 색조의 점토층에서 많이 발견
된다. |
▲ 전곡리 선사유적 외곽 산책로 |
홍적세 중기 무렵, 강원도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한탄강을 따라 흐르며 전곡을 비롯
한
강 주변을 용암대지(鎔巖臺地)로 칠해버렸다. 이후 수많은 물줄기가 용암대지를 적셔주었
고, 곳곳에 작은 습지와 호수가 만들어졌다. 또한 강에 떠내려온 퇴적물은 용암대지 위에 차
곡차곡 쌓이면서 숲이 우거지고 강에는 물고기들이 둥지를 틀었으며 온갖 동물들이 식량과 식
수 해결을 위해
모여들었다. 구석기 사람들 역시 이곳에 정착을 하였다. (전곡에 살았던 구석
기 사람들을 ''전곡리안'이라 부름) 그때가 약 30만 년 전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언제까지 살다가 사라졌는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그들이 떠난 이
후, 그들이 남긴 석기와 흔적은 자연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묻히게 되었다. 그 흔적이 배인
퇴적층이 용암대지 위에 잘 보존되어 수천 년을 비밀리에 숨바꼭질을 하다가 1978년 이후 발
견된 것이다.
발굴조사가 마무리 되자 유물은 전곡선사박물관과 토층전시관, 여러 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졌고, 유적은 영구 보존을 위해 흙으로 빼곡히 덮고 그 위에 숲과 잔디를 깔았다. 그래서 겉
으로 다가오는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모습은 유적지가 아닌 그냥 공원 같은 분위기이다.
전곡리 유적은 숲과 잔디로 뒤덮힌 지역과 토층전시관, 선사체험마을 등이 있으며,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또한 매년 1월과 5월에는 '전곡리안의 숨소리'라는 태마로 구석기 축제를
열어 크게 호응을 얻고 있다. 5월에는 그냥 '연천 구석기축제'란 이름으로 열고 있으나 겨울
축제는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란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데, 선사시대 체험 프로그램, 원
시 퍼포먼스, 공연 행사, 전문가의 강연과 선사시대 전시 행사 등이 열린다.
구석기시대를 완전히 익히고 싶다면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꼭 찾기 바란다. 그러면 누구든 구
석기 전문가가 될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515 (양연로 1510, ☎ 031-832-2570)
* 전곡리 선사유적지 홈페이지는 오른쪽 링크를 클릭하기 바라며 ☞
전곡리 선사유적지
겨울 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2019년 겨울여행축제는 1월 12일부터 2월 6일까지 열린다. |
▲ 인공눈이 깔린 전곡리 구석기축제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