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숲으로 들어가서 숲길을 걷다가 계곡길을 따라 내려오는 나들이가 내게는 하루를 맞이하는 즐거움이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숲길을 홀로 걷다보면 갖가지 나무의 내음이, 새들의 바쁜 지저귐이, 키작은 들꽃들의 빛깔이 내 코와 귀와 눈을 일깨운다. 숲속 온갖 몸숨들 속에서 내 목숨이 함께 ‘살아있음’을 새로이 깨닫는다. 아침의 숲길 나들이는 내게는 오롯이 하루를 맞이하는 비나리인 셈이다.
계곡을 따라서 내려오다 보면 순복음교회 뒷쪽 어귀에 작은 개울이 있다. 개울은 온갖 물 속 몸숨들의 텃밭이다. 이 작은 개울에도 봄이 되면 송사리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와서 이리저리 떼지어 다니며 춤을 춘다.
숲나들이를 하고 내려오던 어느 날, 나는 개울에서 송사리 새끼들을 뜰채로 잡고 있는 예순살 어름의 할아버지 할머니 한 쌍을 보게 되었다. 송사리잡기에 바쁜 두 분 옆으로 아빠와 함께 나들이 나선 너댓 살 어름의 아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그 아이에게 손짓을 한다. “애기야, 여기 물고기 많이 잡았다. 요 보러 온나.”
내 앞에서 벌어진 잠깐의 일을 보며, 나는 여러 가지 것들이 떠올랐다. 아이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는 송사리 새끼를 잡아서 그분들이 끓여먹으려고 했던 것일까.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그러면 아마도 잡아서 어항 따위에 넣어두고 그분들의 손주들과 함께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직접 물어 보았어야 하는데. 그 순간을 놓쳤다. 하지난 나는 이전에도 종종 개울에 사는 민물고기를 손수 잡아서 집에서 키우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송사리 어미가 알을 낳고 새끼들은 알을 깨고 나온 세상이 개울이다. 송사리 새끼들에게는 개울이 온생명이고 삶의 텃밭이다. 이 송사리 새끼들을 그들 삶의 텃밭으로부터 빼앗아와서 저거집 사람의 새끼들에게 보여주고 즐기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다른 마을에서 태어나서 잘 살고 있는 어린 사람의 몸숨들을 그들의 텃밭에서 빼앗아와서 우리 마을 우리에 가두고 우리 마을 어린 사람의 몸숨들에게 보여주고 즐길 수 있겠는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그들 삶의 텃밭에서 빼앗아와서 제 나라의 비천한 목숨으로 부리고 즐겼던, 저 서구 제국주의가 한 짓이랑 다를 바가 어디 있는가.
어떤 분들은 내가 흔하디 흔한 일을 너무 과하게 이야기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르겠다. 나는 개울 속에서 우리 세상을 본다. 개울 속에 우리 마을이 있고, 개울 속에 우리 나라가 있고, 개울 속에 온생명, 우리의 모듬살이가 있다. 나와 뭇생명들끼리의 서로 살아있음이 온샘명을 구원하리라. 인샬라! 아멘!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