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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무악재성당에 청소년 신자들이 하나 둘 들어선다. 미사 시작 전 5분도 아까워 성당 입구에서 친구와 수다 삼매경에 빠진 아이, 전례복을 갖춰 입고 독서 준비로 분주한 아이와 교사, 벌써 지루해졌는지 성당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린 아이. 여느 성당의 청소년 미사 풍경과 다르지 않은데,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다. 무악재성당에서 2년 째 ‘사목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는 천진아 씨다. 영어 단어인 ‘코디네이터’는 다른 사람들의 활동을 설계하고 조직하는 직업을 뜻한다. 무악재성당 주임사제 조재연 신부는 본당의 사목활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본당 사무원자리를 사목 코디네이터로 대체해 천 씨를 채용했다. 일부 사목 현장에서 사목 코디네이터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본당에서 사목 코디네이터를 두고 사목활동의 주요 역할을 맡기는 것은 처음 시도된 일이었다.
천진아 씨는 유아부터 성인까지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목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에 참여하면서, 사목활동에 참가하는 봉사자들의 교육도 담당하고 있다. 특히 무악재성당이 지향하는 ‘청소년 친화적인 성당’ 만들기에서 천 씨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본당의 어린이 · 청소년 신자와 주일학교 교사, 청년, 학부모, 사제와 수도자가 연결된 관계망 한 가운데서 각 주체들을 연결하는 구심점으로 활약하고 있다. 주일학교 교사 3년차인 이혜연 씨는 “언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사목 코디네이터를 설명했다. “(천진아 사목 코디네이터는) 교사들이 성당에 오면 ‘잘 지내냐’고 먼저 물어보세요. 같은 평신도라서 그런지 신부님보다 편하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신부님과 교사,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중간자 역할을 해주셔서 서로 소통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죠.” 강경림 학생도 같은 이유로 사목 코디네이터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간혹 주일학교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면서 “덕분에 신부님과도 가까워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혜연 교사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끈끈해지니 교사들이 쉽게 그만두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전문 역량 갖춘 사목 동반자 천 씨는 청년 교사들이 교사활동과 학업 또는 사회생활을 병행하느라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보완해주고 빈틈을 메우는 역할도 한다. 조재연 신부가 본당에 사목 코디네이터 도입을 고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이 점이었다. 천 씨는 자신이 청년 교사들에게 “에어백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주일학교 교사들의 활동기간이 짧아지다보니, 교사들이 청소년들의 성장과정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사목을 연결하기는 어려워요. 그러나 사목 코디네이터는 한 자리에서 모든 세대를 파악하고 있으니 그런 역할이 가능하죠. 또한 저는 청소년 사목 경험자로서 청년 교사들이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 봉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조하고 있어요.”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천 씨는 주일학교 교사활동이 인연이 돼 햇살청소년사목센터에서 청소년 사목자 양성 과정을 수료했다. 필리핀 등 해외 가톨릭 사목센터에서 청소년 사목 연수와 훈련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청소년 사목에 있어서는 다른 사목자들과 비교해 부족함이 없는 전문가인 셈이다. 천 씨는 수시로 교사들과 만나 자신이 배우고 익힌 청소년 사목의 이론과 활용법을 알려준다. 주일학교 교사 박정미 씨는 “청소년들을 효과적으로 대하는 방법을 익히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면서 “(사목 코디네이터가 있어) 든든하다”고 말했다.
사목 코디네이터가 갖춘 청소년 사목자로서의 전문성은 성당에 와서 그를 만나는 청소년들에게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한경수 학생은 “페이스북에 힘든 일이 있다고 적었는데, 사목 코디네이터 선생님이 그걸 보고 먼저 면담을 해주셔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친구 황민혁 학생은 “뭐든지 도와줘서 좋다”고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다. 사목의 단절 없이 교회의 울타리가 더 촘촘해 지도록 본당 청소년 사목에서 천 씨의 역할은 또 있다. 사제와 수도자가 놓칠 수 있는 사목의 단절을 메우는 일이다. 조재연 신부는 “수녀님들이 발령 임기를 마치고 이동하시는 동안 발생한 공백을 사목 코디네이터가 메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점은 본당 사목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지만, 마침 수도자들의 이동과 새 학기가 겹친 시기라 청소년 사목에서 사목 코디네이터의 역할이 더 중요했다. 조 신부는 “사목 코디네이터가 2년간 본당의 아이들과 관계를 맺고 누가 나오고 나오지 않는지를 다 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천 씨는 본당의 어린이 · 청소년 신자들의 상황을 주임사제, 수도자와 공유해 청소년 사목의 울타리가 촘촘해지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무악재성당의 사례가 알려지면서 이미 서울대교구의 몇 개 본당에서는 청소년 사목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이와 비슷한 형태를 운영하고 있거나 준비 중이다. 본당에서 평신도 사목 코디네이터 도입을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힐 문제는 돈 문제다. 그러나 조재연 신부는 본당 사제와 사무장이 “(행정업무) 운영에 효율성을 기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무악재성당의 경우, 사무원 비용으로 사목 코디네이터를 채용한 대신 본당 행정업무를 효율화하고, 사무장의 휴일이나 행정업무가 몰리는 주일에 사목 코디네이터가 이를 보조하고 있다. 사목 코디네이터는 전체 업무역량의 2/3을 사목활동에, 나머지 1/3을 행정업무에 할애한다. 조 신부는 재정보다도 사목 코디네이터에 적합한 “좋은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 신부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교회를 향한 사랑’이다. 그리고 ‘목자 의식’과 ‘사목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본당의 사목 코디네이터가 반드시 같은 본당 출신일 필요는 없다. 천진아씨는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게 초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본당 공동체 전체를 파악해야하기 때문에 어차피 사람들을 처음부터 다시 만나야 한다. 거쳐야 할 과정은 똑같다”고 말했다. 미사가 끝나고 날이 어두워졌는데 무악재성당 아이들은 한참이나 성당 마당에서 이야기를 하고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강경림 학생은 인터뷰 때 성당에 나오는 이유를 묻자 “집에서 쉬는 건 몸의 휴식이지만, 성당에 오는 건 정신적인 휴식”이라고 꽤나 의젓한 답을 말했다. 손을 흔들며 집에 가는 아이들을 배웅하는 천진아 사목 코디네이터와 교사들의 모습에서 무악재성당 아이들이 느꼈던 ‘정신적인 휴식’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