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456384569
후궁의 신분에서 왕비에 올랐지만
끝내 사약을 받고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폐비 윤씨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후폭풍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번 글에서는 특별히 그녀의 무덤에 집중하여 글을 써보고자 해
페비 윤씨가 사사된 뒤 그녀의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는데...
상여를 메고 장례를 치러줄 사람조차 없었기에
성종은 군인들을 뽑아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어
그리고 예조에 명하여 장사지낼 장소와 일시를 택정하게 했고 관곽을 내려주었는데... 이는 인수대비의 분부였지...
그녀가 처음 매장된 곳은 경기도 장단이었는데
하지만 장지가 불길하다는 지관의 지적이 있어 1488년(성종 19년)경 오늘날의 서울 동대구문 회기동 경희의료원 뒤뜰로 이장을 하였어(그녀는 죄인으로 죽었지만, 어쨌거나 세자의 어머니였기에 왕실 입장에서는 이 여인을 길지에서 잠들게 하는 것이 중요하였을 것이야...)
성종은 그녀가 사사된 지 7년이 지나서야 폐비 윤씨의 묘 앞에
'윤씨지묘'란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은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하였어...
물론 연산군은 그 말을 지키지 않았는데...
윤씨지묘는 회묘로, 다시 효사묘로 바뀌었다가 회릉('회기동'의 지명은 그녀의 능호인 회릉에서 유래함)으로 격상되었지
오늘날 그 무덤은 비록 홍살문, 참도,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 능침과 연결된 넓고 긴 사초지가 없더라도 어느 왕릉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임용한 교수님은 이 무덤을 조선 시대 무덤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하기도 해
연산군은 실제로 회릉으로 격상시켜먼서 왕릉 형식과 동일하게 묘를 조성하였는데
어느 왕릉의 규모에도 뒤지지 않으며
봉분도 상당히 크고
문석인과 무석인은 오히려 다른 왕릉들보다 훨씬 크게 만들어졌어
이러한 웅장한 석물들은 묘를 찾는 후대인들을 놀라게 하는데...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한 연산군의 분노(실질적으로 폐비 윤씨 사건은 숙청을 위한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를 달래기 위해 당대인들은 필사적으로 이 무덤을 꾸몄을 것이야(성종이 제사를 지낼 것을 명했음에도 그녀의 무덤은 제대로 관리가 안 되어 있었는데... 연산군은 내시를 보내 그것을 확인하였어 ㄷㄷㄷ)
어쨌거나 폐비 윤씨는 죽어서나마 회릉이라는 능호에 제헌이라는 묘호까지 받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났고...
이에 따라 왕후의 칭호가 박탈됨은 물론 회릉 또한 회묘로 다시 격하되었지(다만 무덤에 대한 반달리즘은 이뤄지지 않았음)
오늘날 그녀의 무덤은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이 아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의 서쪽 구석진 곳에 존재하는데...
이러한 이장은 조선 시대가 아닌 1969년 10월 25일 이뤄진 것이야...
그것은 관리의 용이함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회묘 옆으로 후궁들의 묘와 왕자와 공주들의 묘가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기본적으로 비공개 능역이지만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안내자의 인솔하에 관람이 가능하므로 참고 요
* 서삼릉으로 옮겨진 폐비 윤씨의 회묘 옆으로 일제에 의해 옮겨진 21명의 후궁과 23명의 왕자, 공주 등 44기의 묘와 22기의 오석 비, 32기의 화강암 비 등 54기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어
* 이곳에 모여 있는 화강암 태실 속에 폐비 윤씨의 태실(서삼릉의 태실들 중 왕비의 태실은 그녀의 것이 유일해)도 봉인되어 있지만... 그녀의 아들 연산군의 태실은 봉인되어 있지 않음
* 연산군 이외에도 단종과 광해군 같이 쫓겨난 왕들은 그 태실이 봉인되어 있지 않으며... 인조, 현종, 철종, 고종 등도 태실이 봉인되어 있지 않은데... 왕이 될 가능성이 없던 왕족이어었거나 중국에서 태어났거나 하는 사정 때문...
* 회묘는 그녀의 남편이었던 성종의 선릉과 35.98km 정도, 아들 연산군 묘와는 43.08k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해...
어제 효사묘에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술잔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건만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
- 1502년 9월 5일 연산군이 어머니를 기리며 쓴 시
* 글을 마칩니다.
*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베댓펌
첫댓글 전에는 산후우울증 아니냐는 글봤었는데ㅜ
용안에 상처낸건 현실성이없대ㅜ
나도 산후우울증일 것 같다는 글 봤었음.. 임신 전에는 진짜 성격도 엄청 착하고 예의있어서 궁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다며...웃전들도 엄청 이뻐해서 중전된거라고...근데 연산군 낳고 나서 다른 사람처럼 180도 바뀌었대..
산후우울증 맞는듯..
으 여튼 옛날부터 남자들이 여자죽이네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