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이기 이전에 순교자들이 그 무엇으로 숭고한 땀과 피를 쏟으며 가셨는지 두 다리로 몸소 체험하고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몸의 피로누적과 부상으로 남한산성에서 멈춰서야 했지만 약 18시간동안 충분히 의미있는 성지순례 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안전이라는 명목아래 대회는 잠정취소라는 결정에도 불구하고 뜻있는 몇몇분의 강행아래 연습주라는 개념하에 출발하게 되었고 많지 않지만 전국에서 약 30여명의 주자들이 참석하였다.
대회전날에는 꼭 징크스가 따라 다니나 보다. 이틀연속 숨쉴틈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대회 전날은 봄맞이 장롱 정리한답시고 새벽녁까지 잠을 못잔것이 피로를 가중 시켰다.
평소 호형호제하는 형님과 송내역에서 반갑게 만나 명동성당입구에서 저녁을 먹으려 식당에 들렀는데 아뿔사 정전이네..
덕분에 촛불키고 오붓하니 둘이서 캄캄한 식당을 독점하니 참 즐거운 식사시간 이었다.
약 20년만에 두번째 방문하는 명동성당. 미사드리서 입구에 들어서니 파견성가를 부른다. ^^;;
미사시간을 일찍 알았두었으면 좀더 서두를 것을..
오늘 연습주에 참가하는 주자들의 안전기원과 더불어 오늘의 순례길이 의미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며 지인들과 반가운 울트라 전사들과 인사하고 밤 9시에 출발 신호로 머나먼 순례의 길을 떠난다.
서울시내를 관통하고 안양,광명,성남시내를 가로질러 등산로,산악로등이 많아 길 찾기가 쉽지않아 이 대회를 위해서 사전답사하고 주로에 밝은 앵커님의 뒤만 쫒기로 작정하니 한결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때부터 묵주기도가 시작되며 끝날때까지 뇌리에서 계속 신비를 묵상한다.
베낭에는 물 1리터와 중간중간 섭취할 간식거리,그리고 추위에 대비한 방풍복과 의료약품이 전부이지만 무게가 약 4Kg에 달한다.
1구간 ; (13.4Km); 명동성당- 절두산 성지
명동..그 낱말 자체로도 휘황찬란하다. 주말밤을 맞이하는 시민들은 흥겹고 군데군데 신호등에 맞춰 얼마 가지 않으니 서소문 성지란다.
빌딩숲에 쌓여있는 중앙의 탑은 십자가 좌우에 직사각형의 2개의 탑으로 건립되어 있고 한국 성인 103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잠시 서서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주님의 평화를 기려본다.
서부역을 지나 용산구청 터널로 진입하여 당고개 성지를 찾아가는 길은 백년전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목조건물에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골목을 찾다보니 길을 잘못 찾았는지 월담을 하게 된다
원형의 잔듸밭에 우뚝솟은 석탑하나.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졌으면 저자거리의 상인들이 처형을 중지해 달라고 청원했을까.
구불구불 용산터널을 지나 육교도 건너고 철로길도 지나다 보니 어느덧 웅장한 한옥 기와집인 새남터의 성당이 한아름 들어온다.
현재는 말끔하니 정돈되었지만 약 200년 전의 오늘은 어때했을까.
"사형 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형장 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 소리, 억수같이 퍼붓는 흙비, 캄캄한 하늘을 갈라 놓은 번개, 이 모든 것이 피비린내 나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의 가슴을 놀라고 서늘하게 하였다. 이윽고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라 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황사영의 '백서', 81행; 신미년(1811년)에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
이후 말끔하게 정돈된 북로의 주로는 둔치를 끼고 도는 강남주로와는 색다른 맛이 있다. 간간이 불어주는 바람과 더불어 대교의 조명빛과 더불어 서울시내의 멋진 광경이 연출된다.
1구간의 마지막 지점인 절두산성지.
종다리님의 아들 지훈이의 유해가 뿌려져 있는 곳이다. 세상에 태어나 5년이라는 짧은 시간만 허락하고 2년동안의 백혈병과 투병하다 끝내 부모의 가슴에 묻었던곳. 성 김 대건 신부님의 뒷편 측백나무 뒷쪽을 걷다보니 맑고 귀여운 지훈이 생각에 뜨거운 액체가 한아름 흘러내린다.
"지훈이와 죽은 모든이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주시길.."
제 2 구간 (42km); 절두산 성지- 수리산 성지
양화대교를 건너 염창교 못미쳐 앵커님과 우동과 라면으로 요기하고 안양천변으로 흘러 들어간다.
참가자가 많지 않은 관계로 만나는 주자가 쉽지않다.
반짝이는 불빛에 흘러 내려가는 천변의 강물이 우리네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을까..세상의 이치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데 만물의 영장인 우리네 세상의 모습은 거꾸로 치고 오르려 하니 악취가 풍긴다고 하면 너무 역설적일까.
광명대교 아래에 승권형님의 친구분이 건네주는 캔맥주로 갈증을 해소하고 피곤해지는 몸을 이끌고 수리산 성지를 도착하니 새벽 3시가 다 되어 간다.
수리산(修理山)은 산의 이름 그대로 세상의 이치를 하느님의 섭리로 갈고 닦았던 곳이라는 뜻인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제 3 구간 ; 수리산 성지 - 둔토리 성지 (61.4Km)
박해를 피해 그들은 산깊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흘러 들어가 공동체를 형성하고 세상과는 단절된체 생활 할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험하고 바위도 무척 날카롭다. 가느다란 렌턴 불빛에 의지하며 십자가의 길을 통과하고 깔딱고개를 오르는 과정이 무척 힘겹기만 하다.
전날 잠 부족으로 눈꺼풀은 돌덩어리 하나 메단것 처럼 무겁고 서서히 체력이 고갈되어 가고 비복근 허벅지 근육이 뭉치는 느낌이다.
이후 학의천에 접어들고 평탄한 주로가 끝날무렵 승권형님의 집에 들러 추어탕으로 요기하고 약 30분동안 잠을 청하니 조금 몸이 회복되고 하얀 먼동이 터온다.
산중턱에 조그마한 하우현성당. 불란서의 서 루도비꼬 신부님이 선교활동하였기에 기념해 세운 곳이란다.
이후 오르는 청계산의 국사봉은 그야말로 힘겨운 여정이다. 정상에 올라 맞이하는 첩첩산중 끝에 걸려있는 둔토리 성지는 자그마한 동굴이다.
서 루도비꼬 신부님이 숨어 지냈던 은신동굴로써 외국인 신부로써 조선에 들어와 2년동안 활동하다 26세때에 아까운 목숨을 이국녁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하니 목숨까지 바쳐가며 신앙을 증거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나에게는 이해 하기 힘든 숨겨진 의문이다.
제 4 구간 ; 둔토리 성지 - 남한산성 성지 (103.5 Km)
국사봉을 넘어 손골성지 까지는 전형적인 산과 들이 어우러진 시골구간이다. 손골은 성 헨리꼬 도리신부님(불란서)이 체포된 곳으로서 향기로운 골짜기로 불리운다 한다. 그만큼 산속 골짜기에 위치하기에 찾는 이들이 적기에 적막하기만 하다.
주자 가족의 응원나오신 분의 커피와 딸기,참외로 생각치 않은 접대받고 발걸음을 탄천으로 향한다.
내리쬐는 햇살과 더불어 끝이 없이 이어져 있는 지루한길 탄천 끝에 도달하여 설렁탕에 한그릇에 기운을 회복하지만 이때부터 고행의 길에 들어선다.
무릅통증으로 걷기가 힘들다. 진통제를 먹어 보지만 소용없다.
성남시내를 통과하는 은근한 기나긴 오르막길은 내뿜는 자동차의 매연과 따가운 햇살과 무릎통증으로 삼중고 이지만 꾸준하게 조깅으로 쉼없이 가파른 남한성지에 도착한다.
이곳은 광주,양주,용인, 이천등지에서 잡혀온 교우들이 치명,순교한 장소인데 남한산성에 이러한 성지가 있는줄 몰랐다.
걸어온길 시신되어 나간곳..섭정 10년간 2만여 명의 천주교인을 학살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원군의 영세 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 주는 듯하다.
여기서 처형된 교우들이 시체가 되어 산비탈로 질질 끌려 내려가 동문 밖 개울로 던져졌다한다.
당시의 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터리에는 산행 나온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가득하고 처형 터에 연이어 늘어서 있는 식당에서는 오랜만에 특미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첫댓글 저절로 마음이 여며지는 순례길.. 그런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릎 괜찮아요? ^^
역쉬~ 우리형이야~~^^
바부 같지만, 바브 같지만. 어쩔 수 없네.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었기에 이 몸은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었오. 가신 뒤에 내 갈 길 도 님의 길이요. 바람 불고 비 오는 어두운 밤 하늘에... 옛날 노래요. 우리님아!!!
놀랠 '노'자 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