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화방산은 강진군 군동면에 있는 산(402m)이다. 광주에서 멀리 있는 산이므로 08시 40분에 만나 출발하기로 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30분이 지체되어 출발하였다.
약속시간은 가능한 지켜 주었으면 한다. 대개 ‘코리언 타임’이라고 해서 늦는 이유를 합리화 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간경영’ 측면에서 보자면 늦어지는 것만큼 우리들은 ‘손실’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약속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그게 신사, 숙녀가 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화방산을 가려면 광주에서 강진읍으로 가는 길을 가다가 작천면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들어서야 한다. 작천면 소재지를 지나면 다시 군동과 병영으로 가는 길로 나누어지는 데 군동으로 가면 된다. 면소재지가 아니므로 화방산이나 화방사(花方寺)나 천불산을 찾으면 된다.
우리가 화방산의 화방사 절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10시 40분이었다. 배(腹)가 출출한 친구들은 배를 채우고 산을 올라야 한단다. 그래서 보따리를 풀어 놓고 보니 김으로 말은 따끈따끈한 찰밥과 맛있게 담근 김치, 버섯전, 막소주, 고창에서 만든 복분자술, 싱싱한 광어회, 그리고 바ㅏ나, 홍삼엑기스까지 풍성하였다. 90여분 달려온 지루함도 있었을 테고, 더운 봄날씨에 축 늘어진데다가 점심때가 다가오니 출출한 탓에 맛있게 먹었다.
이제 산행은 화방사 절 입구에서 시작하였다. 그게 11시였다. 정상은 900m, 큰바위 얼굴은 1400m란다. 산행길은 급경사인 데다가 맛잇게 먹은 찰밥 때문에 산행은 더디게 마련이다. 더구나 처음 참가한 향심이 친구가 힘이 드는가 보다.
고갯길에서 한숨 쉬는 데 ‘호랑이굴’이 근처에 있다고 했으나 힘든 탓에 들러 보지도 못하고, 산행길을 따라 산행할 뿐이었다. 4월 중순의 山 모습은 진달래가 마지막 갈무리를 하고 있고, 철쭉꽃이 피어나고 있다. 엄나무나 단풍나무, 서어나무, 굴참나무, 비사리나무 등도 잎이 파랗게 돋아나 있어 시간의 흐름은 어김없이 우리들을 봄으로 모셔다 놓은 것이었던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르니 산 아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시원하였다. 바람따라 간간이 멀리 마을에선 상여를 맨 상여꾼들의 장송곡이 들려왔다.
‘ 워 워이 워 워이 아나리 넘자 너와 너!
워 워이 워 워이 아나리 넘자 너와 너’
따지고 보면 소리없이 불어오는 저 바람속에도 한 사람은 생명의 끈을 놓아 버리고, 무념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왔던 곳이 어디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그렇게 가는 곳이 어디인줄도 모르면서 망자(亡子)는 장송곡을 들으며 피안의 세계로 가는 길이었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있다. ‘색(色)이란 물질세계를 말하고, 공(空)은 비어있는 것’을 말하는 데, 오늘 공(空)으로 돌아간 망자(亡子)로 본다면 살아있을 때는 ‘색’에 있었고, ‘색’을 떠나서는 ‘공(空)’으로 돌아간 것이니(공(空)은 무(無)가 아니다)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라 하여 살아있음이 공이요. 공(空)은 물질세계인 색과 같다고 하였으니 망자인 그는 공(空)의 세계로 돌아간 것인가? 아니면 색(色)의 세계에 있으되 보이지 않을 따름인가? 모를 일이다.
앞서 산행하는 우리들은 뒤따라오는 동은이와 상수 등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가자고 했더니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 땀흘려 올라온 끝에 산 정상에 앉아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보면 속세의 걱정거리까지 씻어가 버리니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도심지에 있는 친구들은 이런 맛을 알 길이 없을 것이다. 함께 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표지석에 화방산은 천불산이라고 쓰여 있다. 예전 이름이 천불산이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千)이나 만(萬)이라는 말은 ‘많다’라는 뜻이다. 금강산의 ‘만폭동’이나 사람의 수명을 이야기 할 때 ‘천수를 누리소서’할 때 ‘천수’의 천(千) 등은 모두 많다는 뜻인 것이다.
천불산이니 부처가 많다는 것일게다. 산중턱의 화방사나 근처의 남미륵사 등의 절(寺)로 보아서 예전에는 절이 많이 있었을 테고, 부처님을 많이 봉양했을 터이다.
그런데, 화방산 또는 천불산은 ‘문필봉’이어서 원추형이라 큰바위얼굴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려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오르막 길도, 내리막 길도 급경사이니 그만큼 힘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은이나 왼쪽 가슴이 아프다던 상수 친구 등이 정상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큰 바위 얼굴’까지 다녀 오려니 걱정이 컷을 듯 싶다. 하여 앞선 우리 보고 그 곳 까지 갔다 올 때까지 정상에서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앞선 우리가 보기에도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큰 바위얼굴까지 간 다음 정상으로 되돌아 가지 않고, 우리는 곧장 하산하기로 하고, 동은이, 상수 친구 등은 거기서 화방사로 되돌아 가라고 했던 것이다.
대신, 우리들은 직행하여 내려 가야 하므로 하산하는 곳 까지 시영이의 직장 동료에게 차를 가지고 데리러 오라고 했던 것이다. 큰 바위 얼굴까지 내려오는 길에 만병통치약인 ‘봉삼’을 많이 구경하였다.
우리는 큰 바위얼굴까지 간 다음 다시 보따리를 풀어 싱싱한 광어회, 두견화술을 꺼내어 한 잔 한 잔 마셨다. 큰바위얼굴 바위 틈으로 불어오는 산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는 데, 기주 친구는 이 바람을 두고, 한 여름날 에어콘을 틀어 놓은 것과 같다며 시원한 바람 예찬을 하는 것이었다.
샛길로 내려 오면서 기주는 ‘취나물’을 뜯는 것이었다. 집에 가서 삶아 된장에 무쳐 맛있게 먹을 셈인 것이다. 산을 내려와 큰 바위얼굴을 보니 영락없는 사람 얼굴이었다. 그래서 큰 바위에 새긴 얼굴이라고 해서 ‘큰 바위 얼굴’인 모양이다.
오후 2시에 산을 내려와 점심을 먹기 위해 병영면으로 갔다. 건설사업을 하면서 이 곳 저 곳을 많이 다녀본 상수친구가 먹을거리로는 ‘병영의 식당’이 유명하다고 안내했다. 아닌 게 아니라 ‘수00식당’이라는 한식당에 들어가 기다리니 밥상을 차려 왔는데 밥값에 비해 푸짐하였던 것이다.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사무실을 향해 목포로 갔다. 이 곳에서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데 나는 쉬는 토요일 인데도 청소년 축제가 열리기 때문에 근무를 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광주로 곧장 되돌아갔거나 아니면 강진 마량 포구를 향해 갔을 터였다.
* 함께 산행한 친구: 동은, 상수, 기주, 순태, 시영, 본인, 윤숙, 향심, 공항1, 시영이 직장 동료 2, ‘08.4.19.
첫댓글 이번 화방山 산행기속으로 여행이 무척이나 심오한지라 지그시 눈을감고 시공(時空)을 넘나들다보니 머리가 띠~잉 허구먼.허나 여행 즐거웠네.
더 많은 친구와 새로운 친구들이 함께해서 더 좋았겠구나~ 화방산에 나도 한 번 가보고 싶겠금 너무나 멋진 글 감사해~
정말 멋을 아는 친구들이라 참으로 부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