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바스 외 1편
이사과
작업대 위 조각난 운동화*를 올려놓고 복원사는 시간을 소환한다
물성의 고요와 세포들의 떨림 안과 밖의 격랑을 더듬는다
머리에 탄이 날아와 박힐 때 벗겨진 신발 밑창이 크레바스처럼 갈라져 있다
이른 계절의 실족이 앙다물듯 크레바스를 견디고 있다
시간을 영원으로 복원하는 일 이것은 재현인가 기록인가
운동화엔 가능한 그날의 흔적을 기워줘야 한다
조각조각 떨어져 나간 기억을 맞추고 얼룩을 되살린다
일그러진 거죽에 조금씩 화색이 돈다
귀틀에 안창을 박고 본체를 붙이자 기우뚱 배 한 척이 세워진다
낙타는 걷는 자세로 모래사막에 누워 있다 웅크린 뼈와 형상이 곧 지도인
신발을 유리관에 앉히고 스위치를 켜자 발 하나가 걸어 나온다
* 이한열의 운동화
지하보도
어느 여름엔가 앉은뱅이 걸인이 계단 난간에 깡통을 놓고 졸고 있었지요
서점에서 책을 몇 권 사 들고 한 청년이 그곳을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무심코 발에 걸린 깡통이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내렸는데요
너무 당황한 청년은 사태를 수습하는 걸 잊었습니다
입을 헤벌린 채 멍하니 앉아 있던 걸인이 포악스레 욕을 퍼부었지만
폭염과 저주로 뒤엉킨 지하보도를 건너 유유히 사라졌지요
청년은 이후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이명의 시간을 보냈는데요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지하보도를 찾았을 때
아직도 그곳엔 걸인이 표독스레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가 적선을 하며 걸인의 손을 덥석 잡을 때였지요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걸인은 그제야 스르르 몸을 풀어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발표
이사과 시인
2024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출처] 크레바스 외 1편 - 이사과 ■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신작시ㅣNewly Written Poem 2024, March l 통호 179호 Vol 179|작성자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