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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66회
송양공(宋襄公)은 크게 노하여 병력을 이동하여 조나라를 토벌하려고 하였다. 공자 목이(目夷)가 간했다.
“예전에 제환공(齊桓公)이 회맹을 주관하여 열국을 두루 다닐 때, 많은 예물을 가지고 가고 돌아올 때에는 예물을 조금밖에 받아오지 않았습니다. 대접이 변변치 못하다고 질책하지도 않았고, 늦게 왔다고 해서 벌하지도 않았습니다. 남을 관대하게 대하는 힘이 있었고, 남을 긍휼히 여기는 인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나라가 결례했다고 해서 주군께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굳이 용병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양공은 목이의 간언을 듣지 않고, 공자 탕(蕩)으로 하여금 병거 3백승을 이끌고 가서 조나라를 토벌하게 하였다. 공자 탕은 조나라의 도성을 포위하였다. 희부기(僖負羈)는 방비를 튼튼히 하여 공자 탕과 대치했는데, 공자 탕은 3개월이 지나도록 승전하지 못하였다.
그때 정문공(鄭文公)은 초나라에 조례하고 魯·齊·陳·蔡 4국의 군후와 함께 제나라 국경에서 초성왕(楚成王)과 동맹을 맺었다.
[제48회에 정문공은 초성왕과 동맹을 맺었다가 제환공의 토벌을 당하고서 다시 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제환공과 관중이 죽었기 때문에 초성왕이 주도권을 쥐게 된다.]
송양공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첫째는 제나라와 노나라 둘 중에 하나가 패자가 된다면 송나라는 그와 다툴 수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공자 탕이 조나라를 공격하다가 실패하면 예기가 꺾여 제후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송양공은 공자 탕을 소환하였다. 조공공 역시 宋軍이 다시 쳐들어올까 두려워 사신을 보내 송양공에게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송나라와 조나라는 다시 예전처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송양공은 오로지 패자가 될 생각뿐이었는데, 소국의 제후들은 복종하지 않고 대국들은 초나라와 동맹을 맺어 도리어 멀어지기만 하였다. 양공은 분하기도 하고 조급하기도 하여, 공자 탕과 상의하였다. 공자 탕이 말했다.
“지금 대국으로는 齊와 楚를 능가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제나라는 지금까지 패자 노릇을 했지만, 국내에 분쟁이 일어났다가 이제 겨우 안정되어 아직 국세를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나라는 왕호를 참칭하면서 중국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여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초나라에 많은 예물을 바치면서 겸손한 말로 제후들을 소집해 달라고 청하십시오. 초나라는 필시 허락할 것입니다. 그렇게 초나라의 힘을 빌려 제후들을 모은 다음, 다시 제후들의 힘을 빌려 초나라를 제압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계책입니다.”
공자 목이가 또 간했다.
“초나라가 거느리고 있는 제후들을 왜 우리에게 주겠습니까? 그리고 초나라에 제후들을 소집해 달라고 요청한다고 해서, 초나라가 어찌 우리 요청을 들어주겠습니까? 그로 인해 분쟁만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양왕은 목이의 말을 듣지 않고, 공자 탕에게 명하여 많은 뇌물을 가지고 초나라로 가서 초성왕을 알현하게 하였다.
초성왕은 공자 탕에게 찾아온 까닭을 물어보고서, 내년 봄에 녹상(鹿上) 땅에서 회맹할 것을 허락하였다. 공자 탕이 돌아와 복명하자, 송양공이 말했다.
“녹상은 제나라 땅이니, 齊侯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
송양공은 다시 공자 탕을 제나라로 보내 초왕과 회맹을 약속한 일을 알리게 하였다. 제효공(齊孝公) 역시 허락하였다. 때는 송양공 11년, 주양왕(周襄王) 12년이었다.
이듬해 봄 정월, 송양공은 먼저 녹상으로 가서 맹단을 쌓고 齊·楚 두 군후를 기다렸다. 2월 초순에 제효공이 먼저 당도했다. 양공은 효공을 군위에 올려준 공을 자부하면서, 상견하는 동안에 제법 은덕을 베풀었다는 기색을 띠고 있었다. 효공도 양공의 은덕에 감복하는 태도로 땅 주인으로서의 예를 다했다.
또 20여 일이 지나서 초성왕이 비로소 당도하였다. 송양공과 제효공은 초성왕을 접견하는 동안에는 주왕실의 작위 서열에 따랐다. 초나라는 비록 왕호를 참칭하고 있었지만 주왕실의 작위는 자작이었다. 그래서 宋公이 첫째, 齊侯는 둘째, 楚子는 셋째가 되었다. 이건 송양공이 미리 정해 놓은 서열이었다.
약속한 날이 되자, 세 군후는 함께 맹단에 올랐다. 송양공은 의연하게 회맹을 주도하는 자리에 앉아 조금도 겸양함이 없이 희생으로 바쳐진 소의 귀를 먼저 잡았다. 초성왕은 심중으로 불쾌하였지만, 억지로 참고 삽혈하였다.
송양공이 두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자부(茲父; 송양공의 이름)가 왕가(王家)의 벼슬을 받은 선대의 후예로서, 덕이 부족하고 힘이 미약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외람되게 회맹을 주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몰래 품어 왔습니다. 하지만 인심이 복종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두 분 군후의 무거운 위세를 빌려 폐읍의 우(盂) 땅에서 가을 8월에 제후들의 회합을 가지고자 합니다.
군후들께서 과인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제후들을 인솔하여 참석해 주시면, 회맹을 계기로 하여 과인이 대대로 형제의 우호를 돈독하게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맹주는 군후들이 추천하여 되었으니, 과인 역시 어찌 스스로 맹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제효공이 초성왕에게 먼저 서명하라고 양보하자, 초성왕 역시 제효공에게 양보하였다. 그렇게 두 군후가 서로 양보하느라, 한동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송양공이 말했다.
“두 군후께서 과인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함께 서명해 주십시오.”
송양공이 회맹을 취지를 쓴 독(牘)을, 제효공이 아닌 초성왕에게 먼저 내밀면서 서명할 것을 청하였다. 제효공은 심중으로 몹시 불쾌하였다.
[‘독’은 글씨를 쓴 나뭇조각을 말한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다.]
초성왕이 문서를 살펴보니, 제후들을 모아 회맹한다는 뜻이 적혀 있는데 제환공의 의상지회(衣裳之會)를 본받아 병거를 동원하지 말자고 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송양공이 먼저 서명해 놓았다.
[제35회에, 제환공이 북행에서 첫 회맹을 개최하면서 관중의 제안에 따라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 평복을 입고 회합하는 의상지회를 열었다.]
초성왕은 암암리에 웃음을 머금고 송양공에게 말했다.
“제후들은 군후께서 친히 부를 수 있는데, 하필이면 과인에게 부탁하십니까?”
송양공이 말했다.
“정나라와 허나라는 오래 전부터 군후의 휘하에 있으며, 陳나라와 채나라는 근래에 제나라와 다시 동맹을 맺었으니, 군후들의 도움이 없으면 그들이 회맹에 참석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래서 과인이 상국의 위세를 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초성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齊侯께서 먼저 서명하셔야지요. 과인은 그 다음에 서명하겠습니다.”
제효공이 말했다.
“과인은 송나라 휘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회맹에 오지 않으려는 자는 상국의 위엄으로 명을 내리면 그뿐일 것입니다.”
초성왕은 웃으며 서명하고, 붓을 제효공에게 건넸다. 제효공이 말했다.
“초나라가 서명했으니, 제나라는 굳이 서명할 필요 없습니다. 과인은 떠돌아다니다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나 다행히 사직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석이나마 참석하여 삽혈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어찌 경중을 따져 이 독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제효공은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제효공은 마음속으로, 송양공이 초성왕에게 먼저 서명을 청한 것은 초나라를 중시하고 제나라를 경시하는 것임을 알고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송양공은 자신이 제나라에 은덕을 베풀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효공의 말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독을 거두어 보관하였다. 세 군후는 녹상에 며칠 더 머물다가 헤어졌다.
염선이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諸侯原自屬中華 제후들은 원래 중화에 속해 있는데
何用紛紛乞楚家 어찌 분분히 초나라에 구걸하는가?
錯認同根成一樹 한 뿌리에서 자란 나무로 착각하였으나
誰知各自有丫叉 각자 세 갈래로 갈라져 싸울 줄 누가 알았으랴?
초성왕은 귀국하여 영윤 자문(子文)에게 다녀온 일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문이 말했다.
“宋公은 미친 사람입니다. 주군께서는 왜 제후들을 소집하겠다고 승낙하셨습니까?”
초성왕이 웃으며 말했다.
“과인은 오래 전부터 중화(中華)에 세력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아직까지 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것이 한이었소. 이제 송공이 의상지회를 연다고 하니, 과인이 이를 기회로 제후들을 규합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소?”
대부 성득신(成得臣)이 말했다.
“宋公은 허명(虛名)을 좋아하고 실속이 없으며, 남을 가벼이 믿고 지략이 없는 위인입니다.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기습하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성왕이 말했다.
“과인의 뜻도 바로 그러하오.”
자문이 말했다.
“회맹하겠다고 승낙하고서 또 기습한다면, 사람들이 초나라는 신의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고서 어찌 제후들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성득신이 말했다.
“송공은 회맹을 주관하게 된 것을 기뻐하여 필시 제후들에게 오만하게 굴 것이고, 제후들은 아직 송나라의 정치에 익숙지 않아 따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를 기습하여 위세를 보이고, 다시 그를 석방함으로써 우리의 덕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후들은 宋公의 무능함을 비웃게 될 것이니, 초나라를 따르지 않으면 어느 나라를 따르겠습니까? 무릇 작은 신의에 구애되어 큰 공을 잃는다면, 그것은 좋은 계책이 아닐 것입니다.”
자문이 말했다.
“자옥(子玉; 성득신)의 계책은 신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초성왕은 성득신과 투발(鬥勃)을 장수로 삼아 각각 용사 5백 명을 선발하여 훈련을 시키게 하고, 회맹 때 기습할 계책을 확정하였다.
한편, 송양공은 녹상에서 돌아와 희색이 만면하여, 공자 목이에게 말했다.
“초나라가 과인을 위해서 제후들을 소집해 주겠다고 승낙했소.”
목이가 간했다.
“초나라는 만이(蠻夷)로서 그 속셈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는 그들의 말만 들었을 뿐이지, 그들의 마음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신은 주군께서 기만당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송양공이 말했다.
“자어는 너무 걱정이 많습니다. 과인이 충신(忠信)으로 대하였거늘, 그들이 어찌 과인을 속이겠습니까?”
마침내 송양공은 목이의 말을 듣지 않고, 회맹에 모여 달라는 격문을 각국에 보냈다. 그리고 사람을 우 땅에 미리 보내 맹단을 쌓고 공관을 증축했는데 그 화려함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많은 양식을 쌓아 두어 각국의 군마를 대접할 준비를 해 두었다.
가을 7월이 되자, 송양공은 회맹 장소로 가기 위해 수레를 준비시켰다. 목이가 또 간했다.
“초나라는 강하고 의리가 없으니, 병거를 거느리고 가십시오.”
송양공이 말했다.
“과인은 의상지회를 열기로 제후들과 약속했으니, 병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약조한 것을 내가 깬다면, 훗날 어찌 제후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군께서 신의를 지키기 위해 수레를 타신다면, 신이 3리 밖에 병거 3백승을 매복시켜 놓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겠습니다.”
“공자가 병거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곧 과인이 사용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결코 안 됩니다!”
출발할 때가 되자, 송양공은 목이를 남겨두고 가면 군사를 일으켜 접응함으로써 제후들에게 신의를 잃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목이에게 동행할 것을 청했다. 그러자 목이가 말했다.
“신 역시 마음을 놓을 수 없어, 함께 가려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송양공과 목이는 함께 우 땅으로 갔다.
楚·陳·蔡·許·曹·鄭 6국의 군후는 기일 내에 도착했으나, 제효공은 지난날의 일을 불쾌하게 여겨 오지 않았고, 노희공(魯僖公)은 아직 초나라와 국교를 맺지 않았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 송양공은 6국의 제후들을 영접하고 공관에서 쉬게 하였다. 제후들은 모두 수레를 타고 왔으며, 초성왕 역시 수행원들이 많았지만 수레를 타고 왔다.
송양공이 말했다.
“나는 초나라가 속이지 않을 줄 알았노라.”
태사(太史)가 점을 쳐서 길일을 회맹할 날로 잡자, 송양공은 각국 군후들에게 날짜를 알렸다. 그리고 회맹 의식을 집행할 관리들을 며칠 전에 맹단에 파견하였다.
그날 새벽 북이 다섯 번 울렸다. 맹단 아래위에는 화톳불이 설치되어 대낮처럼 밝았다. 맹단 옆에는 따로 쉬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송양공이 먼저 가서 대기하고 있었다. 진목공(陳穆公) 관(款), 채장공(蔡莊公) 갑오(甲午), 정문공(鄭文公) 첩(捷), 허희공(許僖公) 업(業), 조공공(曹共公) 양(襄)이 이어서 도착했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려 날이 밝을 무렵에 초성왕(楚成王) 웅운(熊惲)이 비로소 도착하였다.
송양공이 땅 주인의 예로써 제후들에게 읍하고 양보하자, 제후들이 좌우 양쪽 계단으로 맹단 위에 올라갔다. 우측 계단은 빈객이 올라가는 계단인데, 제후들은 감히 초성왕보다 먼저 오르지 못하였다. 초성왕이 앞장서 오르자, 성득신과 투발이 뒤를 따라 올라갔다. 뒤를 이어 제후들이 오르고 역시 수행하는 신하들이 뒤를 따랐다. 주인이 올라가는 좌측 계단으로는 송양공과 목이가 올라갔다.
제후들이 모두 맹단에 오르자, 주인과 빈객을 나누어 자리를 잡았다. 희생의 피로 삽혈하고 하늘에 맹세한 뒤 서명을 한 다음, 맹주를 추대할 때가 되었다. 송양공은 초성왕이 먼저 말을 꺼내 주기를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초성왕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다른 제후들도 서로 얼굴만 바라본 채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송양공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자못 거만스런 태도로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오늘의 회맹은 과인이 패자 제환공의 과업을 물려받아, 왕실을 존중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전쟁을 그치고 병사들을 쉬게 함으로써, 온 천하가 함께 태평의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 개최한 것입니다. 여러 군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제후들은 여전히 응답이 없는데, 초성왕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말씀이오. 그런데 누가 맹주가 되는지 모르겠소.”
송양공이 말했다.
“공이 있으면 공으로 따지고, 공이 없으면 작위로 따지면 됩니다. 다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초성왕이 말했다.
“과인은 작위를 버리고 왕이 된 지 이미 오래요. 宋이 비록 상공(上公)이라 하나, 왕 앞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오. 미안하지만 과인이 맹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초성왕은 제일 윗자리에 가서 섰다. 목이는 송양공의 소매를 슬며시 끌어당기며 일단 참고서 다시 방도를 찾자고 하였다. 하지만 송양공은 이제 막 맹주의 자리가 손 안에 들어오려는 찰나였는데, 뜻밖에 일이 어긋나고 보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아랫배에 힘을 주어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체면을 무릅쓰고 초성왕에게 말했다.
“과인은 선대의 복을 이어받아 황공하게도 상공이 되었고, 천자께서도 과인을 빈객의 예로써 대하고 있습니다. 군후는 작위를 무시하고 왕호를 참칭하였으니, 어찌 가짜 왕이 진짜 상공을 누를 수 있겠습니까?”
초성왕이 말했다.
“과인이 가짜 왕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 불렀소?”
“군후가 여기에 온 것은 녹상에서 이미 의논한 바가 아닙니까? 과인이 속인 것이 아닙니다.”
성득신이 옆에 있다가 크게 소리쳤다.
“오늘의 일을 여러 제후들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제후들께서는 초나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아니면 송나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여러 제후들은 평소에 초나라가 두려워 복종하고 있었으므로, 일제히 말했다.
“우리는 초나라의 명을 받고 감히 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초성왕이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宋公은 다시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송양공은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제후들이 이치를 따져 말해 주기를 바랐지만, 제후들은 아무도 이치를 따지려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벗어날 계책을 생각해 봤지만, 자신을 보호해 줄 병사가 한 명도 없어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성득신과 투발이 예복을 벗어던지는데, 안에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춤에서 작은 붉은 깃발을 꺼내더니 단 아래를 향해 흔들었다. 그러자 초성왕을 따라온 자들이 모두 옷을 벗어던지는데, 갑옷을 입고 손에 무기를 든 병사들로 바뀌었다. 천명도 넘는 병사들이 벌떼처럼 나는 듯이 단상으로 뛰어 올랐다. 각국 제후들은 깜짝 놀라 혼비백산(魂飛魄散)하였다.
성득신은 먼저 송양공의 양 소매를 붙잡아 꼼짝 못하게 하였고, 투발은 병사들을 지휘하여 단상 위에 진열된 옥과 비단 및 그릇들을 약탈하였다. 의식을 집행하던 관리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송양공은 곁에 바짝 붙어 있는 목이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공자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됩니다. 과인은 걱정하지 말고 속히 귀국하여 나라를 지키십시오.”
목이도 생각해 보니, 송양공 곁에 있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고, 혼란한 틈을 타서 회장을 빠져나갔다.
첫댓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르는 일.
만사 불여 튼튼. 목이의 말을 들었어야지.
국제관계는 힘이 좌우한다.
민주주의고 공산주의고 하는 것은 힘을 잡기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선배님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