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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소중화”(小中華)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朝鮮)의 역사를 왜곡/날조한 흔적인가?
필자(筆者)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소중화”(小中華)라는 용어를 검색해 보니까,
성종 3건, 중종 2건, 인조 1건, 숙종 2건, 숙종보궐정오 1건, 영조 1건, 정조 5건, 순조 3건, 헌종 1건, 고종 2건으로 나왔다. (國譯 基準)
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아래에 인용한다.
특히, 고종 34년(1897년) 3번째 기사의 내용을 잘 살펴보길 바란다.
이수병(李秀丙) 등이 황제(皇帝)로 칭할 것을 주청(奏請)하는 기사이다.
예악과 문물이 중국에 비길 수 있게 된 지가 지금까지 4,000년에 이르렀는데,
오직 그 황통(皇統)의 호칭만은 옛날에도 미처 갖추지 못하였다고 나온다.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조선(朝鮮)의 국호(國號)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이었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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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20권, 3년(1472 임진 / 명 성화(成化) 8년) 7월 10일(을사) 4번째기사
예조에서 음란한 짓을 금제하는 조목을 기록하여 아뢰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전교를 받으니, 진언(陳言)하는 사람의 말 가운데 ‘우리 동방(東方)이 기자(箕子) 이래로 교화(敎化)가 크게 행하여져, 남자는 열사(烈士)의 풍(風)이 있었고 여자는 정정(貞正)의 풍이 있었으므로 역사(歷史)에도 「소중화(小中華)」라 칭하였습니다. 요즈음 들으니 음란한 여자가 전에는 다만 양성현(陽城縣)의 가천(加川)에 있었는데, 이제는 사방의 원(院)·관(館)과 영(營)·진(鎭) 사이에 또한 많이 있어, 봄과 여름에는 어량(魚梁)의 세금을 거두는 장소에 가고 가을과 겨울에는 산간의 승사(僧舍)에 놀러가 음란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교화를 오염(汚染)시킨다고 하니, 수령·만호(萬戶)·역승(驛丞)으로 하여금 검찰하여 엄중하게 논죄하도록 하는 것이 편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음란한 풍속을 자세하게 살펴보건대 법으로 엄하게 다스릴 바입니다. 이제 유녀(遊女)라 칭하고 혹은 화랑(花娘)이라 칭하며 음란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이를 금제(禁制)하는 조목을 뒤에 자세히 기록합니다.
(後略)
성종 134권, 12년(1481 신축 / 명 성화(成化) 17년) 10월 17일(무오) 1번째기사
남원군 양성지가 중국이 개주에 위를 설치한다는 것에 대해 상언하다
(前略)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됩니다. 단군(檀君)이 요(堯)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箕子朝鮮)·신라(新羅)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前朝)의 왕씨(王氏)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서민(庶民)은 남녀가 농사에 부지런하고 사대부(士大夫)는 문무(文武)가 내외의 일에 이바지하여 집집마다 봉군(封君)의 즐거움이 있고 대대로 사대(事大)의 체제가 있으며, 따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소중화(小中華)하고 부르면서 3천 9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後略)
성종 208권, 18년(1487 정미 / 명 성화(成化) 23년) 10월 12일(무인) 1번째기사
중국 사신의 접대에 시위 군사의 예모를 전교하다
의주 선위사(義州宣慰使) 이극돈(李克墩)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중국 사신 기순(祁順)이 처음 우리 나라에 이르렀을 적에 예우(禮遇)하는 태도가 매우 거만하였었는데, 돌아갈 때에 말하기를, ‘조선은 실로 예를 아는 나라이다.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컫는 것이 빈말이 아니다.’ 하며, 칭찬하기를 마지 않았고, 부사(副使) 장근(張瑾)은 말하기를, ‘다만 한 가지 일이 중국 조정만 못한 것이 있다. 중국 조정에서는 전상(殿上)의 위사(衛士)가 비록 심한 더위에 땀이 흘러도 몸을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데, 지금 보건대, 전상에 모신 자가 좌우를 돌아보았으니, 조금 예모(禮貌)를 잃었다.’ 하였습니다. 신은 청컨대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에는 위사(衛士)들이 옆을 돌아보지 못하게 하여 예모를 엄하게 하고 또 당상관(堂上官) 이상은 아울러 흉배(胸背)·원령(圓領)을 착용하게 하여 조관(朝官)의 등급을 구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마땅하다. 시위하는 군사는 자주자주 교대하여 돌아보지 말게 하고 흉배도 또한 등급에 따라 착용하라.”하였다.
중종 17권, 7년(1512 임신 / 명 정덕(正德) 7년) 12월 26일(병인) 1번째기사
대사헌 남곤 등이 소릉의 일을 상소하다
(前略)
우리 나라가 멀리 동쪽에 있어 중국에서 보기에 안남(安南)이나 교지(交趾)와 다름이 없는데도, 중국 사람들이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 소중화(小中華)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대대로 예의를 닦아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비는 아비, 아들은 아들 노릇함으로써, 생민의 윤리와 사물의 법칙이 그래도 볼 만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수천 년 동안의 16세대 제왕들에게 없는 일이 유독 우리 조선에서만 보게 된다면, 오직 전고(前古)에 비춰 보아도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또한 더욱 중국에 대해서도 부끄러운 일이니, 이는 홀로 한 시대 군신(君臣)의 큰 수치일 뿐만 아니라 우리 동방 천추 만대의 큰 수치입니다.
(後略)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2월 21일(병신) 1번째기사
홍익한이 금한을 배척하고 명분을 세울 것을 상소하다
(前略)
우리 나라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 소문이 나서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컫고 있으며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한마음으로 사대하기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랑캐를 섬기며 편안함을 취해 겨우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월을 연장해 가고 있으나, 조종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천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후세에 대해서는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호차가 데리고 온 자들 중 반은 새로 부속된 서달이라고 합니다. 서달은 우리 나라와 교빙의 예가 없는데, 어찌 빈접(儐接)의 도가 있겠습니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되는데, 국경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묘당에서는 한마디 말도 없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묘당에 있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베개를 높이 베고 깊이 잠을 자면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까.
(後略)
숙종 44권, 32년(1706 병술 / 청 강희(康熙) 45년) 12월 26일(경술) 2번째기사
보덕 최계옹이 관원들의 풍기 문란을 염려하는 상소하다
보덕(輔德) 최계옹(崔啓翁)이 상소(上疏)하기를,
“생각하건대, 춘궁(春宮)의 나이가 아직 약관(弱冠)이 못되어 혈기(血氣)가 바야흐로 한창이니, 안정시키려 하되 아직 안정되지 아니하는 때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 보양(輔養)을 잘못하여 세월을 흘러 보낸다면 뒤에 뉘우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권강(勸講)하는 관원은 참으로 신하들 중에서 경의(經義)에 널리 통한 자를 가려서 구임(久任)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도움이 어찌 적겠습니까? 찬선(贊善)·진선(進善)·자의(諮議)를 둔 것으로 말하자면 또한 우연한 것이 아닌데 관원이 갖추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마음을 다하여 찾는다면 어찌 마땅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삼가 성명(聖明)께서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악(樂)이라는 것은 시속(時俗)의 미악(美惡)을 따르고 정령(政令)의 득실(得失)을 나타내는데, 지금 우리 나라의 악은 빠르고 번잡하여 매우 화평함이 크게 부족합니다. 더구나 수십년 이래로 풍속이 호무(湖舞)를 숭상하여 지위가 높은 사대부도 이것을 한다 합니다. 우리 기방(箕方)을 생각한다면 예전부터 소중화(小中華)라 일컬었고 의관 문물(衣冠文物)은 옛 제도를 고치지 않았는데, 풍속이 호무를 숭상하여 태연히 부끄러워할 줄 모르니 가엾게도 우리 동방 사람도 이미 변하여 오랑캐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얼마전 진연(進宴) 때 내연(內宴)을 밖에서 습의(習儀)하던 날 이른바 도감(都監)의 두 제조(提調)가 처용무(處容舞)를 추는 자에게 사사로이 일러서 음설(淫褻)한 놀음을 행하였으므로 보는 자가 놀랐습니다. 만약 그때 한 제조가 꾸짖어 금하지 않았다면, 위의(威儀)가 숙경(肅敬)한 곳이 마침내 설만(褻慢)한 마당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에 있어야 마땅할 것이겠습니까?”하니,
(後略)
숙종 대왕 행장(行狀)
(前略)
어사(御史)를 제주(濟州)에 보내어 약간인(若干人)을 시험하여 뽑았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제 홍범(洪範)의 글을 강(講)하는데,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에게 도(道)를 전하여 이륜(彛倫)을 펴게 했고, 동방(東方)에 봉해지자 크게 교화(敎化)를 밝혀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찬연하여 기술할 만하게 하였으니, 우리 동국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관대(冠帶)를 하고 능히 오상(五常)을 밝혀 소중화(小中華)의 칭호를 얻도록 한 것은 기자의 힘이다. 문장을 주관하는 신하에게 각별히 제문(祭文)을 짓도록 하고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기자묘(箕子廟)에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이윽고 승지에게 명하기를, ‘특별히 승지를 보내는 것은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니, 경(卿)은 부디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거행하고, 묘우(廟宇)나 무덤에 만일 무너진 곳이 있으면 낱낱이 서계(書啓)하여 수즙(修葺)하는 바탕으로 삼게 할 것이며, 자손(子孫) 가운데 녹용(錄用)에 적합한 자 또한 방문(訪問)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단군(檀君)·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또한 그곳에 있어 세종조(世宗朝) 때부터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렸으니, 마땅히 똑같이 제사를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먼저 기자(箕子)의 사당에 제사지낸 뒤 또한 택일(擇日)하여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後略)
정조 46권, 21년(1797 정사 / 청 가경(嘉慶) 2년) 5월 22일(신유) 2번째기사
인현서원의 명칭 개칭 등에 관한 채제공·이병모·이서구 등의 논의
(前略)
상이 제신에게 물었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서원은 도(道)를 익히는 곳이며 성인 기자가 전한 것은 도이니 서원이라는 칭호를 고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묘사(墓祀)에 이르러서는 묘향(廟饗)과는 다르니, 높이 받드는 도리가 애당초 새로운 예(禮)을 창설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하였는데,
한성부 판윤 김문순(金文淳), 상호군 김지묵(金持默), 개성부 유수 황승원(黃昇源)은 채제공의 의논을 옳게 여기고, 형조 참판 서용보(徐龍輔), 원임 규장각 직각 김조순(金祖淳), 승정원 우승지 홍인호(洪仁浩)는 이병모의 의논을 옳게 여기니, 비변사 당상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중국에도 기자의 묘가 있으니 평양(平壤)에 있는 것은 어찌 의심스러운 사실을 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하는 데서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향사(享祀)를 거행하지 않는 것은 높이고 은덕을 갚는 데 흠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법을 창설하여 시행하는 것은 아마도 갑자기 의논하기 어려운 듯합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컫는데, 삼한(三韓) 이전에는 순수함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의문(儀文)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 많아서 지금까지 당연히 행하여야 할 전례(典禮)를 겨를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서원(書院) 명칭에 대한 한 건과 더불어 다시 예조 판서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의견 일치를 보아 초기(草記)를 올리게 하라.”하였다.
정조 49권, 22년(1798 무오 / 청 가경(嘉慶) 3년) 9월 1일(신유) 1번째기사
사학 유생 유춘주가 신약추에게 형률을 적용하길 상소하다
(前略)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지 20여 년 동안에 이치를 밝히고 의리를 강론하여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뜻 둔 일을 계술(繼述)하시고 우리 소중화(小中華)의 문물을 빛내셨습니다. 그리고 절의를 높이 숭상하게 하고 삼강 오륜을 붙들어 일으킬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모두 다 쏟으시는 한편 또 이렇게 새로 《춘추》를 간행하시어 해와 별처럼 거듭 드러내 보여주셨으니 이제는 인심이 차분히 안정되고 세도(世道)가 바르게 돌아와야만 참으로 마땅한 것입니다.
(後略)
정조 52권, 23년(1799 기미 / 청 가경(嘉慶) 4년) 12월 21일(갑진) 2번째기사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상차하여 《흥왕조승》 4편을 올리다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가 상차하여 《흥왕조승(興王肇乘)》 4편(編)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건너 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뉘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상으로 말하면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반반을 차지했고 그 풍속으로 말하면 중국과 오랑캐의 것이 서로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제(齊)나라와 가까웠고 성수(星宿)를 보면 기성(箕星)과 두성(斗星)의 분야에 해당되었는데, 옛적에 단군께서 나라를 일으키신 때는 도당씨(陶唐氏) 때와 일치하고 기자께서 봉해지신 것은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체로 그 풍토가 중국과 서로 비슷한데다 중국의 교화를 점차로 입게 된 결과 의관(衣冠)도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랐고 문자도 오랑캐의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혹은 소중화(小中華)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왜가리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깃을 다는 저 오랑캐의 풍속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다만 왕씨(王氏)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말갈(靺鞨)과 국경을 접하고 몽고족(蒙古族)인 원(元)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예교(禮敎)가 일으켜지지 않고 윤기(倫紀)가 밝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치고 찌르는 것을 능사로 삼아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단군과 기자께서 남겨주신 풍도를 까마득히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크게 열리고 운세가 밝게 트이면서 아조(我朝)가 일어났습니다. 이때는 마침 황명(皇明)이 중원의 판도를 새로 장악해 나가던 시기였는데 우리의 국호(國號)를 내려주고 면복(冕服)을 하사하는 등 내지(內地)의 나라와 동일하게 대우해 주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덕을 합쳐주고 귀신과 사람이 모두 도와주는 상황을 맞이하여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질을 갖추시고 천년에 한 번 있을 운세를 당하여 남쪽 지방과 북쪽 지방을 정벌하심으로써 삽시간에 삼한을 통일하셨습니다. 이렇게 왕업(王業)을 일으켜 후대에 물려주고 대경(大經) 대법(大法)을 확립하여 시행케 하는 한편 불교나 도교와 같은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선왕(先王)의 위대한 법도를 펴게 하자 문물 제도가 상(商)나라나 주나라 때보다도 빛나게 되면서 그 명성이 온 누리에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구(琉球)에서 조공(朝貢)을 바쳐 오고 섬라(暹羅)에서 귀순해 오는가 하면 올량합(兀良哈)과 원료준(源了浚) 같은 족속들까지도 서로 이끌로 와서 지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발해(渤澥)와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를 다 차지하였으며, 귤과 유자 같은 과실이나 담비와 표범 같은 희귀한 가죽들도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잇따라 실려오곤 하였습니다. 어염(魚鹽)의 풍족함이 오(吳)나라나 초(楚)나라와 겨룰 만하였고 견사(繭絲)의 이로움도 제(齊)나라나 노(魯)나라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함께 예악(禮樂)이 행해지고 교화가 융성하게 펼쳐져서 집집마다 제사 지내는 풍조가 이루어지고 어린 아이들도 시서(詩書)를 암송하는가 하면 말몰이꾼이나 양치기들까지도 삼년복(三年服)을 입을 줄 알고 부엌에서 시중드는 여종이나 밥짓는 아낙네들도 다시 시집가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우리 동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로서 기자 성인께서 펼치신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교화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행해지게 된 것이니, 아, 정말 성대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後略)
순조 3권, 1년(1801 신유 / 청 가경(嘉慶) 6년) 12월 22일(갑자) 1번째기사
사학을 토죄하고 인정전에서 진하를 행하다. 반교문
(前略)
온 나라가 효(孝)를 일으킨 것은 몸소 실천하여 마음으로 체득한 나머지를 미루어 준 것이고 사해(四海)가 인(仁)으로 돌아간 것은 교화를 거쳐 정신을 갖게 한 묘훈(妙訓)이 있었던 것인데, 극변 서방(西方) 세계의 음침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소중화(小中華)인 예의(禮義)의 나라에 느닷없이 불쑥 들어오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감히 크게 청명한 시대를 더럽히고자 하여 섬기는 것이 뱀의 신(神)이고 소의 귀신이며 거의 반 세상을 속이어 미혹시켜 그의 말은 지옥(地獄)과 천당(天堂)에 대한 것이었다. 신부(神父)와 교주(敎主)를 일컬어 높이 받들기를 제 조상의 신주(神主)보다 지나치고 십계명(十誡命)과 칠극(七克)의 조목은 허망함이 참부(讖符)와 유사하였다. 살기를 즐거워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심정인데도 형벌[刀鋸] 보기를 깔고 자는 요와 같이 여기고 조상의 지나간 일을 생각하여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은 천륜(天倫)의 이치인데도 증상(烝嘗)을 쓸데 없는 것으로 여기니, 거만한 듯한 귀신은 굶주리지 않고 음란한 말은 또한 추악하도다. 폐고(廢錮)된 족속과 서얼로 국가를 원망하고 뜻을 잃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결탁하고는 성세(聲勢)를 의뢰하고 당원(黨援)을 부식하였으며, 시정(市井)의 거간꾼과 농부·직녀(織女)의 부류까지 불러 모아들이어 명분(名分)을 혼란시키고 풍교(風敎)를 더럽혔었다. 혹은 두어 글자의 수수께끼로 각각 표명(標名)을 세우고 혹은 반 폭의 사특한 그림으로 몰래 소굴을 장식하였으며, 혹은 깊은 밤 비밀한 방안에서 머리를 모아 강독하여 외고 혹은 대낮에 큰 도시의 왕래하는 곳에서 소리 높여 공공연히 선동하였다. 백년 뒤에는 오랑캐가 될 것을 알고 있으니 거의 이천(伊川)에서 어떤 자가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제사 지내는 것보다 심하고 진실로 하루 만에 변이 있었으니, 어찌 황지(潢池)에서 도적이 병기(兵器)를 희롱하는 것뿐이겠는가? 이승훈(李承薰)은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使行)을 따라가서 사학(邪學)의 서적을 구입해 왔고 양인(洋人)의 천주당에 들어가서 이상한 무리들을 스승으로 섬겼다.
(後略)
순조 26권, 23년(1823 계미 / 청 도광(道光) 3년) 8월 2일(무술) 1번째기사
성균관에서 거재 유생들이 서얼들이 상소한 것에 대해 권당한 소회를 아뢰다
성균관에서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권당(捲堂)한 소회(所懷)에 의하여 아뢰기를,
“신 등은 수선지(首善地)에 있으면서 세도(世道)를 어지럽히는 일을 목격하고 모두 우려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충(忠)·질(質)·문(文)을 가감한 것은 바로 삼대(三代) 때 건국하였던 규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질을 숭상하였던 정치가 문이 부족하다고 하여 변경하지 않았고, 문을 숭상하였던 정치가 질이 부족하다고 하여 고친 일이 없었던 것은 질가(質家)와 문가(文家)가 각각 정해진 바가 있어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에 관계되고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에 관계되어 천도(天道)가 유행되고 인기(人紀)가 확립되기 때문입니다. 아! 우리 조정은 중국의 밖에 있는 문치를 숭상하는 소중화(小中華)입니다. 삼한(三韓) 시대와 신라·고려 사이에도 여전히 비루한 이속(夷俗)을 면치 못하다가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 태조와 태종께서 고려에서 숭불(崇佛)하던 뒤에 인륜을 밝히고 고려에서 멸유(蔑儒)하던 끝에 강상(綱常)을 펼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명분(名分)’ 두 글자와 관계된 것은 그 엄중함이 분명하고 그 차등이 현격하여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어 마치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그때에 즈음하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께서 우리 나라에 예서(禮書)와 관상(冠常)의 제도를 내려 줌으로써 의절(儀節)의 가감과 명위(名位)의 등급이 정연히 구분이 있게 되어, 푼[分]은 치[寸]를 넘지 못하고 치는 자[尺]를 넘지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4백 년 기업(基業)을 유지해 온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後略)
고종 34권, 33년(1896 병신 / 대한 건양(建陽) 1년) 1월 7일(양력) 3번째기사
김병시가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특진관(特進官) 김병시(金炳始)가 상소의 대략에,
“신은 방금 사임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윤허한다는 비답이 내리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중에 삼가 듣건대 일전에 단발(斷髮)에 대한 조칙(詔勅)이 내렸다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신도 물론 폐하가 즐겨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누가 위력에 의지해서 이권(利權)으로 권한 것입니까? 요즘 변고가 많아 헤아릴 수 없는데 또 오늘 이런 해괴한 조치가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하였습니다.
신은 듣건대 《춘추(春秋)》의 뜻을 중국에 적용하면 중국 것으로 되고 오랑캐에 적용하면 오랑캐 것으로 되므로 비록 오랑캐라고 하더라도 중국의 예법을 시행하면 찬양하여 내세우고, 비록 중국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랑캐의 법을 쓰면 내리깎아 배척합니다. 대체로 성인(聖人)들은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을 이와 같이 엄격하고도 단호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와서 백성들에게 8가지 조항을 가르친 때로부터 문물 제도가 찬연히 크게 갖추어져서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렸습니다.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는 훌륭한 임금들이 서로 이어 거듭 빛내어서 오늘과 같은 경사에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이전의 훌륭한 조상들의 아름다운 규범과 선대 임금들이 남긴 제도를 버리고 그만 이 지경에 이르게 하겠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설사 응당 시행해야 할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사로운 변경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면 응당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명령이 급작스레 내려 사람들이 감히 그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게 하니, 이것이 또 어찌된 일입니까? 신체와 털과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으로서 감히 손상시킬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공자(孔子)의 말입니다. 만 대를 두고 내려오는 공자의 말도 믿을 것이 못 된단 말입니까? 대체로 만물의 뜻을 계발하여 세상일을 성취한 것치고 오제(五帝)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백성들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이룬 것치고 삼왕(三王)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열성(列聖)들이 서로 전해오는 심법(心法)을 조술(祖述)하면서 지키고 놓치지 않는 데에서 다시 다른 무엇을 구한다고 오랑캐의 법을 선대 임금들의 가르침 위에다 더 놓겠습니까? 장차 이런 몰골로 종묘(宗廟)에 들어가 신하와 백성들을 대하겠습니까? 신은 지극히 원통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後略)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9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이수병 등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인 진사(進士) 이수병(李秀丙)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 등이 생각건대 치우치지 않고 바르며 어질고 의로운 데서 사람의 표준〔人極〕이 서고, 엄숙하고 밝으며 뛰어나고 슬기로운 데서 황극(皇極)이 서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의 표준은 도통(道統)이 나오게 되는 바탕이며 황극은 제통(帝統)이 생겨나게 되는 바탕입니다. 대체로 당요(唐堯), 우순(虞舜), 송(宋) 나라, 명(明) 나라는 하늘을 이어 표준을 세웠으니, 제통과 도통이 전해진 것에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와서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에 왕위에 올랐으며 기자(箕子)의 도(道)가 우리나라에 와서 한번 변화하여 중화(中華)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우리 조종(祖宗)의 성학(聖學)은 장횡거(張橫渠),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학문을 직접 이어받았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높이 숭상하였습니다. 예악과 문물이 중국에 비길 수 있게 된 지가 지금까지 4,000년에 이르렀는데 오직 그 황통(皇統)의 호칭만은 옛날에도 미처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명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거룩한 임금들이 서로 대를 이어왔는데, 우리나라가 명을 받고서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임진년(1592년)과 계시년(1593년)의 왜란(倭亂)을 당해서는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 주셨으니, 의리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 사이지만 은혜로는 실로 아버지와 아들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삼천리강토에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모두 황제의 덕에 젖었습니다.
아! 천명(天命)이 일정하지 않아서 명나라의 사직이 망하고 황통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오직 대보단(大報壇) 한 곳이 황통의 일맥(一脈)이 붙어있는 곳으로, 효종(孝宗)이 내정을 닦고 외적을 물리친 의리와 높이고 사모하는 정성은 우주에 있는 해와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폐하는 하늘이 낸 슬기롭고 지혜로운 성인으로서 조종께서 넘겨준 중책을 걸머지고 왕위에 올라 정사를 행하여 잘 다스리려고 한 지가 지금 34년이 되었습니다. 폐하는 천하의 대세를 환히 꿰뚫어 보고 고금의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모든 제도와 문물을 개혁하고 조정하시되 오직 천심(天心)을 따르고 국운(國運)을 새롭게 하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와 칭호만은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았으니 조정과 민간의 여론이 거의 모두 추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삼황(三皇)은 덕으로써, 오제(五帝)는 공(功)으로써, 삼왕(三王)은 인으로써 정사를 하였으니, 왕이란 천하를 차지했다는 칭호입니다. 옛날에는 황제와 왕이 원래 높고 낮은 등급이 없었는데, 진(秦) 나라가 주(周) 나라를 계승한 뒤로 황제를 겸칭하여 가장 높고 가장 귀한 칭호가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제왕의 계통을 계승한 자는 진실로 그 지위를 갖게 되면 반드시 이런 이름을 갖게 되는데 폐하만이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군주(君主)라는 칭호는 비록 높이 부르는 칭호이기는 하지만 중국에는 역사에 없었습니다. 아니면 혹시 각 나라의 글이 같지 않아서 마침내 참뜻을 잃어서 그런 것인지는 신들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땅이 좁고 작다고 하더라도 긴 것을 덜어 짧은 것을 보충한다면 충분히 천자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폐하의 뛰어난 덕과 큰 업적은 명나라의 계통을 계승할 만한데, 오늘날 어찌 당당한 천자의 나라로서 군주의 칭호만 가지겠습니까? 설사 땅이 천자의 나라가 되기에 불충분하다고 해도 오직 의리가 존재하는 데에 달렸으니, 소강(少康)은 1려(㠟)의 무리를 가지고도 하(夏) 나라를 일으켜 세웠고, 숙종(肅宗)은 필마(匹馬)로써 당(唐) 나라를 참성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계통을 잇는 일은 전적으로 영토가 넓은가 좁은가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오늘 고칙(誥勅), 명령, 전장(典章), 연호(年號)는 모두 천자의 예를 쓰면서 오직 이 대호(大號)만 올리지 못하였으니, 실로 훌륭한 시대의 흠전(欠典)입니다. 그러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높이 받들려는 정성이 간절하여 모두 목을 빼고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던 차에 뭇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고 뭇별이 북극성을 향하듯이 관리와 유생들의 상소가 잇달아 일제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명과 하늘의 의사나 인심이 모여들어 합쳐지는 때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의리를 깊이 체득하고 나라를 중흥할 뜻을 크게 발휘하여 빨리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고 빨리 대호를 받음으로써 천명을 따르고 민심에 응할 것이며 명나라의 계통을 이어서 끝없는 복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대명(大名)이 이미 정해졌고 대위(大位)에 이미 나아갔으니 대덕(大德)은 베푸는 정사에 더욱 힘써 특별히 대업의 실제가 드러나게 함으로써 위로는 하늘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조종의 보답하고 아래로는 온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우러러보는 데 부응하는 것이 진실로 오늘의 조처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신은 그 실상을 대략 들어서 성상께서 판단하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직 시행하지 못한 전례(典禮)는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며 펴지지 않은《춘추(春秋)》의 의리는 회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노성하고 어질고 유능한 신하는 쓰지 않을 수 없으며 사문(斯文)의 공명정대한 학문은 숭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전례(典禮)가 시행해지지 않으면 대행왕후의 국상(國喪)이 늦추어져서 신민들이 의혹을 가지면 선왕(先王)의 예에 흠이 될 것이고, 와신상담하여 원수를 설욕하지 못하면 명분이 바로잡히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춘추》의 의리가 무너지고 말 것이며 노성한 사람을 쓰지 않으면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가 벼슬에 나오게 되어 기강이 문란해질 것이며, 정학(正學)을 숭상하지 않으면 사설(邪說)이 일어나서 인륜이 무너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훌륭한 일을 하겠다는 뜻을 분발하여 결단코 천년 만년토록 오래갈 정사를 다스리는 요체를 삼을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의 정일(精一)한 심법(心法)이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춘추》의 의리입니다. 도통(道統)이 여기에 있으며 황통(皇統)도 여기에서 세워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크게 변화되어 만방에 화합하고 국운이 끝없이 뻗어갈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
“많은 선비들의 의논이 대체로 같다고 하더라도 당치 않는 칭호를 가지고 이처럼 말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다시 번거롭게 굴지 말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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