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 베드로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으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초대교인들에게 그 진원지를 밝히면서 이러한 소문이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은 찬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 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고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 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 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
멈추다가 떠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휩쓸리다가 가야 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
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방해받지도 상관하지도 않는 나>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부활 시기를 끝내며 교회 전례는 독서와 복음으로 각기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과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최후를 얘기하지 않고, 계속 선교하는 것으로 얘기하고 그뿐 아니라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이때 실제의 바오로 사도는 갇혀 있는 상태였고 많은 방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이 바오로 사도가 아무 방해를 받지 않았다고 함은 방해가 없어서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방해에도 불구하고 방해받지 않았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마치 축구에서 집념의 축구 선수가 온갖 수비 방해에도 그것을 뚫고 마침내 공을 넣는 것처럼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복음선포를 했다는 말이겠습니다.
오늘 얘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감금 상태에 있지만 찾아오는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그였지요.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러므로 방해를 받는 것은 내가 방해를 받아야지 받는 겁니다.
누가 방해를 했어도 내가 받지 않으면 방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바오로 사도처럼 아무리 누가 방해해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하는 선교 협동조합을 감히 바오로 사도의 선교와 비교할 수 없는 거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선교하려고 한다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불랙 리스트에 올라 제가 중국에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에 와있는 분들을 선교하자고 한 것이 여기 선교 협동조합이잖습니까?
제 생각에 상관하지 말라는 오늘 주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주님을 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말라는 말씀이잖아요?
우리말에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난다는 말이 있지요.
한 손으론 소리 나지 않으니 소리 나기 위해선 다른 손이 필요하다는 말도 되지만, 이를 뒤집으면 아무리 시비 걸어도 상관치 않으면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갈등(葛藤)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갈등이란 칡 나무 갈과 등나무 등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칡이나 등나무 모두 꼬는 성질이 있는데 그것들이 서로 꼬니 풀기 어려운 문제처럼 풀기 쉽지 않은 매듭이 되고 갈등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칡이나 등나무가 아무리 꼬아와도 내가 칡이나 등나무가 아니고 거기에 얽히지도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고 갈등은 아예 생기지도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만 중요합니다.
베드로 사도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일만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중요한 것 그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아무런 방해를 받지도 않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방해를 해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나, 중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상관치 않는 나가 되고, 그럼으로써 주님을 따르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매진하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쓸모없는 호기심은 걸림돌이다>
“남의 떡이은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과 비교하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떨기도 하고 분수없이 지낼 때가 있습니다.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건만 그것이 마음 같지 않아 힘들어 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요한 21,20).
그런데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너는 너의 갈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라라'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제자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비교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이 있고 탈랜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동료애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쓸모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나친 호기심은 걸림돌일 뿐입니다.
그것은 상관을 넘어서서 간섭을 하기에 이릅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 9,62) 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걷는 발걸음에 복이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는 “서로 사랑하자”로 요약됩니다.
우리 삶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어 비교하고 험담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라” 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고,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의 심정은 꽤나 착찹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은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요한복음 21장 17~18절)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와서 철부지 어린 시절, 파릇파릇한 청소년기, 혈기왕성한 청년 시절, 완숙한 장년기를 거쳐 마침내 노년기에 도달하면,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우울감이 커져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끝난 이후부터 베드로 사도의 행적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 주지 않습니다.
나머지 행적을 밝혀 줄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기에, 전승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추정컨데 베드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코린토 등 여러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다녔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생애 마지막 시기를 로마에서 보내셨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자행된 대박해 때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다고 전해집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의 미래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고통투성이뿐인 혹독한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스승님께서 콕 짚어주시니,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서운한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였던지 베드로 사도는 사도단 안에서 언제나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던 경쟁자이자 절친이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다시 말해서 요한 복음사가의 운명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게 몹시 궁금했던가 봅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복음 21장 21절)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하셨던 것처럼, 요한 사도의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복음 21장 22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호기심을 반기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종착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그 사람 운명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저마다 지닌 역량이 다르고, 부여받은 사명이 다릅니다.
궁극적인 도착점은 동일하지만 목적지로 나아가는 길은 조금씩 다릅니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고,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하거나 눈치보지 말고 당당히 우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주변 사람들 의식하느라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피곤하게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고, 다른 사람들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며 살다 보니, 내 삶에 나도 사라지고, 주님도 사라져버린 어색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 인생은 그 사람에게 맡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 인생도 주관하시고 안배하시니 대폭 신경을 꺼야겠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분산되는 에너지들을 대폭 줄여야겠습니다.
대신 내 삶을 좀 더 주도적으로, 좀 더 충만히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행복 - 주님과 우정의 사랑>
참행복, 영원한 행복은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에 있습니다.
다음 끝기도 시 찬미가 2절과 토요일 3시경 후 바치는 기도문은 언제나 주님 사랑을 새롭게 환기시킵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 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이다”
“영원한 사랑에 불타는 빛이신 주님,
저희도 당신 사랑으로 불타게 하시어,
모든 것 위에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하여 같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제 6월 첫주 금요일은 수도원 은인들을 위한 미사가 있었고, 수사들의 고백성사가, 저녁기도 시에는 성체강복의 성시간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매달 첫주 금요일의 행사입니다.
새달을 맞이하여 은인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주님 사랑을 새로이 하기 위한 고백성사에 성체강복 성시간입니다.
살아갈수록 주님과 우정의 사랑이 얼마나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습니다.
요즘 참 가뭄이 심합니다.
이처럼 꽃이 피다가 말라버리기는, 수도원 잔디가 말라 죽어가기는 수도원 개원 후 처음입니다.
뿌리가 얕은 초목(草木)은 시들어 죽어갑니다.
불암산 계곡의 물도 바짝 말랐습니다.
그대로 주님과 우정의 사랑이 메말라 시들어 죽어가는 영혼 상태에 대한 상징적 모습 같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바짝 마른 시냇물
꼭 하늘비 내려야
흐르는 맑은 시냇물인가
비오든 말든
늘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고 싶다
깊은 산 배경으로
늘 노래하며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고 싶다
비오든 말든
늘 맑게 샘솟는 우물이고 싶다
비오든 말든
땅 깊이 뿌리 내린 늘 푸른 나무이고 싶다”
어제 써놓은 영혼의 고백같은 시입니다.
참으로 날로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의 사랑과 더불어 이런 영혼이 될 것입니다.
이래야 영혼이 육신에 끌려가지 않고 육신을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에서 이런 영혼들을 만납니다.
새삼 교회 공동체의 풍요로움을 느낍니다.
똑같은 주님 사랑이지만 그 양상은 다 다릅니다.
온갖 다양한 꽃 사랑처럼, 주님 향한 사랑의 색깔도 향기도 크기도 모양도 다 다릅니다.
모든 꽃들의 사랑이 함께 조화를 이루듯 주님 사랑의 공동체 형제들도 그러합니다.
결코 우열(優劣)이나 호오(好惡)의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수제자 베드로, 사도 요한으로 추정되는 익명의 애제자가,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바로 그러합니다.
오늘 부활시기는 내일의 성령강림대축일로 끝납니다.
오늘 미사로써 요한복음도 끝나고 제1독서 사도행전도 끝납니다.
교회공동체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의 공존의 조화가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요한복음 중반 이후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는 꼭 나란히 나옵니다.
흡사 주님 사랑을 서로 보완하는 듯한 관계입니다.
수제자 베드로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활동적 사랑을 보여준다면, 애제자 요한은 주님과 깊은 관상적 내적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수제자 없는 교회나 애제자 없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수제자 없는 교회는 맹목일 수 있고, 애제자 없는 교회는 너무 공허하고 쓸쓸할 것입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가 참 수수께끼처럼 들립니다.
애제자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배후에 사랑의 침묵중에 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라.”
애제자에 대한 관심은 접어두고 수제자인 베드로 너는 네 자신을 추스르고 나를 따라 순교의 죽음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순교의 죽음으로 주님 사랑을 보여줬습니다.
애제자는 비록 내가 재림할 때 세상에 있지 않더라도, 그의 사랑을 닮은, 애제자의 분신같은 제자들은 계속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런 주님 향한 관상적 깊이의 애제자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도 세상 곳곳 교회의 중심부에서 주님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하는 애제자의 분신같은 후예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셉수도원의 원장직에서 물러난 저의 역할은 숨겨져 있는 애제자 요한같은 관상적 깊이의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은 주님께는 참 좋은 보완 관계에 있는 사랑의 제자들이요 모두 일치의 중심이신 주님 사랑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요 교회의 숨통입니다.
선교하지 않는 닫힌 교회는 곧 고사하고 말 것이며, 어떤 형태든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선교는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만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과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 선교의 영웅같은 본보기가 사도 바오로입니다.
수제자 베드로에 이어 애제자 요한, 여기에 바오로 사도가 합류함으로 비로소 온전한 가톨릭 교회 공동체가 형성된 느낌입니다.
로마에서 군사 한 사람의 감시하에 구금상태에서도 참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바오로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비록 육신은 사슬에 묶여 있을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사도의 자유로운 영혼은 결코 묶어 놓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거룩하게 하는, 치유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바오로의 다음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2티모 2,9)
저 또한 여기 수도원에서의 정주의 삶을 통한 체험이기도 합니다.
진리 말씀을 통한 주님과 우정의 사랑과 더불어 날로 넓어지는 내적 이해 지평(地平)과 시야(視野)가 내적자유의 비결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의 해피엔딩의 삶을 소개함으로 끝납니다.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 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세상의 중심지인 로마에서 구금 상태의 한없이 불편했을 상황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한없는 내적 자유를 누리며 복음 선포의 삶에 전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에서 시작된 복음 선포의 불길은 산불처럼 번져 마침내 유럽 전체가 복음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복음화를 필요로 하는 노쇠(老衰0한 유럽이, 세상이 된 작금의 현실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해 주시어, 수제자 베드로 사도처럼, 애제자 요한 사도처럼, 선교의 영웅 바오로 사도처럼 참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강림 대축일을 기다리는 부활 제7주간의 마지막 평일 복음은 요한 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사랑의 대화가 막 끝난 뒤의 일이지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 21,21)
방금 예수님에게서 자신의 소명을 들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거취에 대해 의문이 생긴 것 같습니다.
사람 심리가 다 그런 걸까요?
수위권을 인정받은 제자면서도 예수님께 각별히 사랑 받았던 제자에게 모종의 경쟁의식을 가졌던 걸까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요한 21,22)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은 방금까지 오갔던 따사로운 사랑의 분위기를 냉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분위기, 언젠가 비슷하게 겪은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 하는지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기가 막히게 빼어난 대답을 해서 엄청난 칭찬과 함께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약속받은 일이 있었죠.
이어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다가 "사탄"이라는 모진 소리까지 들었던 일 말입니다. (마태 16,13-23 참조)
베드로의 패턴일까요?
으쓱할 만큼 잘 나가다가 인간적인 부분에 발목이 잡혀 곤두박질 치면서 분위기를 냉각시키는 모습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정신을 차리도록,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며 경계선을 그으신 후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방금 전 사랑의 대화가 오고 간 뒤에 하신 말씀, "나를 따라라!"에 주어 "너는"을 강조해 붙이셨네요.
"~는"이라는 조사에서 강세가 느껴집니다.
개별성, 특화, 고유성을 강조하시려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무안하고 서운했을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 성령을 받아 교회 공동체를 꾸려나갈 그리스도 몸, 그 지체들의 주축이 될 사도들에게 예방주사가 될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라." 하시는 주님의 초대는 그 양상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구 수만큼 다양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 하지요.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개성이 다른 만큼 그분께서 우리 각자를 필요로 하시는 부분과, 채워주고 싶으신 빈 곳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각자 부르심과 소명이 다른 것이고요.
하지만 이 당연한 진리가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 사이에서 걸림돌이 되곤 해왔습니다.
카인과 아벨 때부터 비교의식이나 시기 질투가 존재했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성이라 여겨야 할까요...
예수님 부활 체험까지 했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누가 더 높으냐 하는 문제로 티격태격하던 그들입니다.
진정 높아지는 길의 진수를 보여주셨던 스승 앞에서 이제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그 욕망이 뿌리째 사라진 건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오늘의 베드로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며 비판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비교 의식이나 시기, 질투를 합리화하거나 옹호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그저 베드로를 통해 비추어진 우리 모두의 민낯일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로마 체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동족을 이교 법정에 고발할 의도가 추호도 없었던 바오로는 유다인들의 계속되는 공격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로마까지 오게 됩니다.
바오로는 로마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새로운 길을 전파하지요.
당시 세계 권력의 변방 이스라엘이 아닌 힘의 중심지 로마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초를 닦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꽃길만 펼쳐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박해와 순교의 핏빛 역사가 쓰여질 것이고, 그로 인해 오히려 더 세찬 신앙이 불 일듯 일어날 것이니,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이 아니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또 이 길은 그야말로 바오로에게 허락된 그만의 길임을 알겠습니다.
그의 로마 시민 자격과 성장 환경, 지식, 기질과 성정 등 딱 그에게 맞는 부르심이고 소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 계획 안에 먼지만한 한 점도 못 되는 우리, 우주와 역사의 날줄 씨줄 전체를 조망할 능력이 없는 우리가 당장 눈에 보이는 나와 너의 외피에 집착하게 되면 중요한 걸 놓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주님과 각자의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주님과 그(그녀)의 관계에 호기심을 갖느라 정작 주님께서 나와 관계를 맺으시는 색깔과 온도와 향기, 농도와 밝기를 놓쳐버리는 우(愚)를 범하지는 말아야겠지요.
바오로에게는 바오로에게 맞는,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에게 맞는, 요한에게는 요한에게 맞는 것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내게 허락된 환경, 내가 받은 은총, 선물, 사랑, 자비가 나에게 꼭 맞는 맞춤형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에 대한 겸허한 평가와 겸손한 자존감이 필요하니 주님께 간절히 청해야 하고요.
간혹 주님께로부터 나만 소홀히 대접을 받는 것 같이 느껴져, 주님께 "이게 저에 대한 당신의 최선이냐?"고 당돌히 여쭙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곁눈질 하지 않는 우직하고 단순한 믿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일단 인생이라는 경주에 들어선 이상, 누가 더 뭘 얻었나 살피느라 발을 헛디디거나 목표를 잃지 않도록, 저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나의 주님'께만 집중해 달려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솔직담백한 질문 덕에 우리가 성령강림을 앞두고 새로이 심기일전 할 기회를 얻은 것 같습니다.
자기의 고유성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나를 포기한 게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 나를 창조해 가시는 하느님께 협력하고 있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최선임을 믿고 새롭게 화이팅합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정약용 선생님은 조선 후기의 학자입니다.
정조의 사랑을 받았고, 행정가로도 촉망받던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정약용에게는 생각지 않았던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였던 서학, 천주교가 몇 가지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정약용이 속해있던 남인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천주교의 교리가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조선의 문화와 전통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형 정약종은 순교하였고, 정약용 또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정약용에게 18년의 유배생활은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가족과 헤어져야 했고, 벼슬길에서 멀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18년 유배생활을 좌절과 고통의 시간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학문을 연구하였고, 후대에 길이 남을 역작을 저술하였습니다.
정약용에게 18년의 유배시절은 학문을 연구하는 시간이었고, 새로운 사상을 다듬는 시간이었고,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정약용에게 유배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변곡점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유대인으로 성공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동료였던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법정에 바오로 사도를 고소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면서 로마의 시민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항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었던 바오로 사도는 로마로 가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감옥은 고독과 단절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절망의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신학의 토대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감옥은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학교였습니다.
감옥은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있으면서 여러 공동체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몸은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까지 감옥에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감옥은 바오로 사도에게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는 새로운 변곡점이었습니다.
저의 삶에도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습니다.
저의 게으름과 나태함 때문에 보직에서 해임된 적도 있었습니다.
건강관리를 소홀히 해서 중환자실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과도한 음주습관으로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기도 했습니다.
절망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늘 제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2018년 교구청 근무를 마치면서 주교님과 면담하였습니다.
본당사목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사 적체로 인해 오랜 시간 보조신부로 있어야 하는 후배사제들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인사이동을 하시는 주교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은 선택이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선택을 존중해 주셨고, 저는 2019년 8월에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낯선 곳에서 지내야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언어 소통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신문 홍보가 힘들 거라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생활은 제 사제생활에 새로운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걱정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 뉴왁교구의 사제들과 친교를 나누었고 함께 여행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언어 소통에 대한 두려움도 곧 없어졌습니다.
직원들이 공적인 업무를 도와주었고, 제가 있는 플러싱은 한국말로도 소통이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신문홍보가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팬데믹으로 2년 동안 신문홍보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넓은 땅 미국에서 캠핑을 다닐 수 있었고, 텃밭도 가꿀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미국에서의 생활은 사제생활에 새로운 도전이었고,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지는 상황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두려움도, 근심도, 박해도, 칼도, 굶주림도, 감옥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진 우리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전문적으로 산악자전거를 타시는 형제님을 쫓아서 몇 번 산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자전거로 산에 오르는 것은 다리의 힘만 좋으면 그럭저럭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겁이 많이 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산에서 내려오다가 크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형제님을 쫓아 내려가는데 앞에 툭 튀어나온 돌멩이가 보이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급하게 잡았다가 미끄러져 넘어졌습니다.
그때 형제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신부님, 돌멩이나 나무뿌리 같은 장애물을 보고 겁을 내면 반드시 넘어집니다.
그냥 과감하게 확 지나가면 됩니다.
이게 가장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는 방법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앞에 장애물이 놓이면 겁을 내고 맙니다.
주저하게 되고 그래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확 지나가면 그만이었습니다.
어떤 장애물도 나를 넘어지게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미국 작가 앤지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용기란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 무섭지만 계속 나아가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어떻게 될지를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형제들 사이에서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체험했던 제자들이기에, 이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죽음의 위협도 함께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의 참 기쁨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불안하기만 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주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남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자기 사명에만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에 신경 쓰면서 두려움 안에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감하게 확 지나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는 방법인 것처럼, 주님만을 굳게 믿고 자기 사명에만 충실한 것이 가장 안전하게 주님을 따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방법에 충실했던 바오로가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사도 28,31 참조).
- 인천교구 갑곶성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