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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9일 사순 제5주일
제1독서 : 에제 37,12ㄹ-14
제2독서 : 로마 8,8-11
복 음 : 요한 11,1-45
그때에
1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3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11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2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13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4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16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18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28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30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32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또 하나의 ‘라자로’인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살 희망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닮아갈 때
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당신을 그대로 닮은 외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파스카의 기쁨을 앞당겨 누리며 다투어 피어나기 시작한 만발滿發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벌써 주님의 부활을 경축慶祝하는 듯 합니다.
코로나 사태와는 무관하게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게 무수히 피어나는
청초하고 아름다운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참 청초하고 아름다운 파스카의 봄꽃들이다
겨울 추위와 어둠을 견뎌내며 기다렸기에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기에
자기가 없는 무아無我의, 무욕無慾의 겸손한 파스카의 사랑이기에
그러할 거다”-
무욕과 무아의 겸손한 아가페 사랑,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의 사랑은 작금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노고를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교황님의 기도와 사랑, 강론이 참으로 심금을 울립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오늘 아침 재방송으로 초췌해지신 교황님의 강복을 받고
감사의 그리고 안타까운 맘에 오랜만에 마구 울었어요. 큰 은총을 받은 것 같아요.”-
주님을,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매로부터 받는 문자 메시지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은 교황님의 사랑이 그대로 전달되었기에,
교황님을 통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았기에 이런 감동스런 반응일 것입니다.
오늘 사순 제5주일 복음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 역시 참으로 감격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을 배워 따라 살면서 닮고 싶은, 참으로 사랑 가득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새삼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그대로 ‘예닮의 여정’이 되어야 함을 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란 말뜻을 지닌 라자로입니다.
‘라자로’대신 내 이름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영적 죽음의 무덤에서 지금 나와 주님과 함께 새롭게 살자는 구원의 초대 말씀입니다.
그대로 에제키엘 예언의 실현입니다. 이미 앞당겨 파스카의 부활을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라자로를 무덤에서 끌어내신, 살려 내신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적 죽음의 무덤에서 감방에서 끌어내시어 당신 영을 우리 안에 넣어 주시어
오늘 지금 하늘 나라 땅에서 파스카의 기쁨을, 사랑을, 행복을 앞당겨 살게 하십니다.
그대로 바오로의 고백과 일치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형제 여러분,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파스카의 예수님 덕분에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육 안에서’가 아닌 ‘성령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우리 입술에서는 저절로 다음 화답송 시편이 흘러나옵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우리는 ‘라자로’이자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주님을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며, 그분만을 기다리며,
파스카의 기쁨을, 행복을 앞당겨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파스카의 예수님의 제자가, 또 베타니아 가족 중 하나가 되어 예닮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첫째,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며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대낮같이 환한 세상도 세상의 빛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의 내면은 캄캄한 어둠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자 '내면의 빛'이신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심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참으로 파스카 주님과 믿음의 우정을 깊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주님의 말씀이 참 다정하게 들립니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라 부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중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영원한 길벗이자 도반인
예수님과의 우정을 아름답고 깊게 가꿔가는 일이 우리 인생의 필생의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우리의 믿음이 주님께는 기쁨입니다.
라자로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을 예고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북돋웁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도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죽음 너머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바로 토마스가 우리의 주님 향한 열렬한 사랑을 대변합니다.
셋째, 주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 믿음의 고백입니다.
베타니아의 삼남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가 상징하는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이 삼남매를 사랑하셨듯이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활동가 마르타, 관상가 마리아도 주님 사랑에선 일치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고 또 주님을 참 많이도 사랑했던 베타니아의 삼남매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르타는 물론 우리 모두의 믿음을 확인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를 대변한 마르타의 얼마나 감사한 정통적 믿음의 고백인지요!
아, 주님과의 주고받은 고백의 내용, 평생 화두로 삼아 사시기 바랍니다.
넷째, 예수님의 경천애인敬天愛人,
즉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일치를 이룬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의 사랑은 울음의 눈물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참으로 충만한 인성의 사랑은 그대로 충만한 신성의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라자로의 죽음에 함께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에 관해 이어 전개되는 장면도 감동입니다.
-“돌을 치워라.”
-“주님,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어 예수님의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감사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아버지와 일치된 신성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향해 저절로 흘러나오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주님 부활을 앞당겨 경축하기 위해 피어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 축제의 꽃들 만발한 지금은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지 ‘기적을 행하는 분(a wonder-worker)’이 아니라,
창조주이시자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고 증여자이신
‘그의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분(doing the work of God his Father)’임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라자로를 살리신 일곱 번 째 마지막 표징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께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봅니다.
우리 하느님과의 일치야말로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영적 무덤 같은, 감방監房같은 삶에서
끌어 살려 내어 자유롭게 하시며 또 하나의 라자로인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흡사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의 ‘탈리타 꿈!(소녀야, 일어나라!)’,
또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실 때의 ‘젊은이여, 일어나라!’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11.43), 아멘.
사순 5 주
류해욱 요셉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7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을 기원하며 전 세계를 특별 강복했습니다.
교황님은 이날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광장에서 코로나19에 휩쓸린 세계를 위한
특별 강복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 : 로마시와 전 세계에)을 거행했습니다.
우리 모두 교황님의 원의에 따라 함께 기도합시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동네 베다니아.
그곳은 예수님께 마치 제 2의 고향과 같은 향수가 있는 곳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기에
언제든지 마음 내킬 때 찾아가서 마음의 긴장을 풀고 쉴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신 예수님.
당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따뜻하게 맞아주고 사랑을 나누어주는
세 남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께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계속되는 전도 여행, 끊임없이 몰려드는 병자들, 영적인 갈증을 채우려는 사람들,
그런가하면 생트집을 잡는 사람들, 반대자들의 음모와 마주해야 힘겨움 등에서 오는,
요즈음 표현으로 가중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셨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던 라자로의 집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오빠 라자로가 앓게 되자 마르타와 마리아는 사람을 보내어 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이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던 두 자매가
예수님께 다만 오빠가 앓고 있다는 것을 알릴 뿐 어떤 청도 드리지 않습니다.
주님이면서 친구였던 예수님에 대한 신뢰를 볼 수 있습니다.
오셔달라고 하지 않고 알리기만 하면 그분이 알아서 해 주시리라는 믿음과 신뢰입니다.
우리도 그런 신뢰를 지닐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전갈을 받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시고 나서야 ‘유다로 돌아가자’고 하십니다.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곳에서 하시던 일을 중단하실 수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해주시는 일,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시는 일로 쉬실 틈이 없던 차에
그 전갈을 받으시고 마음의 갈등을 느끼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이 사람들을 내버려둘 것인가? 그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그 때는 이미 유다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두려움을 느끼셨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 얼마 전만 해도 유대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그곳으로 다시 가시겠습니까?’하고 걱정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유다 지방에서 예수께 대한 음모와 박해가 있었고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당신의 때를 앞당기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망설임과 두려움은 잠깐이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벗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유다로 향한 것입니다.
라자로가 죽은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유다에서 당신이 하실 일을 생각하시면서
가슴이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일,
이것은 지금까지 행한 어떤 기적과도 다른,
온전히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그 일은 온전히 하느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
아니 당신이 하느님이 아니시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행하심으로써 사람들에게 당신이 참으로 누구이신 지를
보여주시고 믿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미는 한편, 이제 당신의 때가 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완전한 구원의 기적,
당신이 죽으시고 하느님이 당신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케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영원한 삶에 동참하게 하실 그 때가 다가왔고
그 예표로서 보여주실 기적이 바로 라자로를 다시 소생케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곳으로 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장한 마음의 결의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러보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병자를 방문하여 위로하고 상을 당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마음으로부터 함께 하면서 슬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는 것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앓는 사람을 찾아주는 사람은 지옥 불을 면하리라.’
우리 옛날 따뜻한 시골의 인정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가 동네 어귀까지 나와 마중을 하지요.
마리아는 집안에 있고요.
전에 마르타는 분주하게 부엌에서 일하고 마리아는 조용히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들었던 일을 상기해보면 두 자매의 대조적인 성격을 알 수 있고
사랑하는 방법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타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인간적인 원망도 가득 담긴 말이지요.
예수님을 뵙자 다시 슬픔이 밀려오면서 자기의 아픈 마음을 표현한 것이지요.
말하자면, 주님은 오빠 라자로를 그토록 사랑하셨으면서
전갈을 보냈을 때 왜 바로 와주시지 않았습니까? 라는 원망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으로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기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실 줄 압니다.”
깊은 믿음입니다.
마르타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이 놀라운 믿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 날 것이다.”고 하시자
“마지막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그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 믿음은 바로 우리 신앙의 핵심인 부활 신앙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아가서 마르타는 바로 우리 신앙의 가장 근원적인 고백,
바로 시몬이 그 고백을 통하여 베드로, 반석인 된 고백을 드립니다.
“주님은 바로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 두 가지 가장 근원이며 핵심인 신앙 고백은
바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며
이 믿음으로 우리는 그분의 부활과 생명, 영원한 삶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죽더라도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l라면 그 삶은 얼마나 힘 있고 충만한 삶이 되겠습니까?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가서 주님께서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전하자 마리아는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가서 언니와 똑같은 말을 합니다.
다만 더 깊은 사랑과 슬픔을 엎드려 우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같이 우십니다.
온전히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슬플 때 우실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 수 있는 것은 참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다고 마냥 울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해야 하실 일을 하십니다. 무덤으로 가셔서 말씀하십니다.
“돌을 치워라.”
아직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마르타가 말합니다.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던 라자로의 죽은 얼굴을 보시려는 줄 알고 마르타가 말리려고 한 말이지요.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사흘을 무덤 주변을 배회하다가
나흘째는 완전히 떠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흘이 지나면 육신이 다만 부패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너무나 깊은 신뢰에서 청하기도 전에 들어주신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를 봅니다.
기적의 힘은 당신 자신의 힘이 아니라 바로 이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 신뢰의 힘입니다.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고,
바로 거기에서 무한한 힘이, 죽음까지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온전히 주님께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은 잊고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커다란 힘을 지닐 것인가!
“라자로야, 나오너라.”
죽음도 거역할 수 없는 힘 있는 명령입니다.
그 명령에 죽었던 라자로가 터벅터벅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 하느님의 표징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을 2주 앞두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 이야기를 복음으로 듣는 것은
이 사건이 바로 예수님 당신의 부활 사건에 대한 하나의 예표이기 때문이며
우리도 주 예수님께서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는 마음으로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교회의 배려인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덴마크가 낳은 세계 최고의 동화작가가 있습니다.
아마 이 동화작가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미운 오리 새끼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입니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외모 콤플렉스가 심해서 늘 외톨이였지요.
이런 그가 어느 날 배우가 되겠다고 코펜하겐으로 상경했지만,
어디에서도 그를 배우로 뽑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작가가 되겠다고 글을 씁니다.
하지만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그였기에 문장 실력이 형편없었고 맞춤법도 엉망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출판사에서도 그의 글을 출판해주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의 성공도 없었고, 그래서 충분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동화를 씁니다.
실연의 아픔을 기억하며 ‘인어공주’를,
어렸을 때 가난했고 학대받은 기억을 살려 ‘성냥팔이 소녀’를,
친구 없이 혼자 지내던 기억으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친구로부터 못생겼다는 놀림을 떠올리며 ‘미운 오리 새끼’를 지었습니다.
그가 지은 동화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명성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겪은 역경의 시간은 오히려 축복이었다.”
사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난 뒤에야 그 모든 것이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바로 찾아가지 않고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나서 가십니다.
마르타, 마리아 자매는 주님께서 계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원망의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이렇게 고백하지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원망스럽지만 하느님의 선택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오빠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 체험 후에 그들은 어떠한 마음을 가졌을까요?
오빠의 다시 살아남으로 인해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큰 기쁨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이 자기들 앞에 펼쳐짐에 크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역경의 시간이 오히려 축복을 얻을 수 있는 순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사순 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성지주일을 앞두고, 마치 부활을 연주하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시고,
<복음>에서는 죽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며, 당신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음을,
<복음 환호송>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찬미하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오늘 이 ‘부활의 전주곡’을 들으면서, 사순시기가 생명으로 가는 길, 곧 부활로 가는 길임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쓰라림보다는 감미로움이 서광처럼 비쳐옵니다.
또한 우리는 3월을 뒤로 보내며, 봄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봄도 또한 분명 하나의 길입니다.
사순이 부활로 가는 길이듯, 봄은 여름, 가을, 겨울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꽃피우고 열매 맺고, 또 다시 생명으로 피어오르는 봄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봄길”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봄길’입니다.
생명을 열어주고, 부활을 가져다주는 참된 생명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는 이 길에 사랑이 걸어갑니다.
이 길을 걷는 여행은 아나톨 프랑스의 말처럼,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이요, 참된 생명에로의 이동이요, 사랑에로의 이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는 이와 함께 울어주는 봄바람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동굴에 갇혀있는 이를 불러내는 봄 햇살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저앉아 웅크리고 죽어 있는 이를, 빛으로 불러내는 봄비 같은 생명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라자로의 소생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라고
장엄하게 예고된 그 “생명”입니다. 곧 빛이신 생명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생명이시오, 빛이신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참 생명에로 이동입니다.
그 길은 ‘앎’에서 ‘믿음’에로의 이동입니다.
곧 ‘당신이 생명이요 부활임에 대한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본문>에서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라고 고백합니다.
마르타는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11,23)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11,23)라고,
“안다.”고만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1코린 8,2)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여전히 마르타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부활과 생명을 믿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아는 것’을 넘어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을 때라야, 그 믿는 이에게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생명과 부활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은 믿음 안에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그렇게 믿음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일상과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믿어야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현세와 현세를 넘어서 얻을 수 있는 풍만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질문에, 동문서답을 합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7)
예수님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느냐고 물으시는데,
마르타는 “그리스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원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동굴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했을 때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하고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거듭 강조하시어 나무라듯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이처럼, ‘앎’에서 ‘믿음’으로의 이동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불신과 어둠의 묻혀있는 저희의 무덤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저희를 당신 생명의 빛에로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요한 11,43)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부활을 믿게 하소서!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
‘코로나19의 종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시련의 시기에 하느님의 뜻을 헤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 안에서 고통을 극복해 내야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바라봐야 하고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갇혀 있는가? 아니면 이웃을 향해 열려 있는가? 나의 색깔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루카19,41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 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 구나.”
멸망할 도시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해 한탄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회개를 호소하시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히브5,7)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요한 11장 절 이하)을 보면.
마리아도 울고, 그와 함께 있던 유다인들도 울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처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생명이셨기 때문에 우실 수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살아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사실 라자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 죽음을 보고 슬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눈물을 아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죽음의 길로 들어설까 노심초사하시고,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큰 슬픔을 아십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에 깊이 연민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바로 그곳에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마리아와 다른 문상객처럼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살아있는 생명이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가슴은 공명을 모릅니다. 깊이 공감할 줄을 모릅니다. 살아있는 자만이 공명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 눈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마리아 뿐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마리아와 마르타 다른 문상객들이 슬프게 운 것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깊지 못한 이해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디에 있든 그들의 슬픔은 순수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가슴도 그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공명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눈물은 큰 축복입니다.
마태복음 참된 행복의 선언에서도 보면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깊은 참회의 눈물로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주 우십시오. 눈물을 흘리면 복이 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공명하는 곳에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가끔은 대성통곡하십시오.
아무 곳에서 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성체 앞에서 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줄 것입니다.”
묵시21,4에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인색해진 눈물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혼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보면 울지 못한다는 것은 병입니다.
영혼이 마를 대로 말라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시기 바랍니다.
요즘은‘코로나19’로 인해 웁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울고, 경제적 고통의 압박으로 울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공명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 몫 잡으려고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재기를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고통을 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헌신과 희생으로 그 현장에 나섭니다.
분명한 색깔이 납니다. 생명을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살아나거라.”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분이 무덤 앞에 섰을 때 이미 라자로는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사실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죽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보다는 부활의 삶에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오너라. 무덤에서 나오너라!’
무슨 얘기냐 하면 진짜 죽는 것은 내가 무덤에 갇히는 것입니다.
선입견, 똥고집,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
시기, 질투, 집착, 소유, 지배, 명예욕, 교만함, 사재기 등등.
이런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무덤에서 나오너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바로 그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공명하지 못한다면 공명하라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한다면 이웃을 향해 열려 있으라는 초대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웠습니다.
마르타가 냄새난다고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예수님은 명하셨고 그대로 했더니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였는데 그것을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풀어주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내 스스로를 옭아매지도 말 것이며 남을 내 잣대로 재어 판단하고 단죄하여
무덤에 가두어 옭아매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은총의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웃사랑에 열려있음을 확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베푸는 마음에 인색하다면,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나를 위해 울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우리도 그분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가 공명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요한 11, 43)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다시
생명을 부르시고
다시
생명을 깨우십니다.
나의 생명이 아닌
주님의 소중한 생명입니다.
라자로를 살리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생명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눈물에서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어루만져 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다시 살리십니다.
고통 없는
사랑이란 없습니다.
사랑도 고통과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고통을
일으켜 세웁니다.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주십니다.
주님께로
가야 할 생명입니다.
비껴갈 수 없는
사랑의 만남입니다.
이 사랑으로
모든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사순입니다.
다시 생명을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이 사랑을 믿습니다.
사랑이
묶여 있는 생명을 풀어주듯
우리의 슬픔을
벅찬 환희로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 사랑이
새로운 이 길을 걷게 하십니다.
다시
생명을 깨우는 사순입니다.
밀떡과 포도주의 삶이 표징의 재료가 되는 삶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요한복음은 ‘표징의 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표징은 믿음을 가져다주는 어떠한 사건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는 창조가 이루어짐으로
7일 동안의 창조를 생각하여 요한은 아마도 7개의 표징으로 맞추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카나에서 성모 마리아의 믿음으로 제자들이 믿게 되는 첫 번째 표징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카파르나움에서 왕의 신하가 끝까지 청함으로써 두 번째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다음은 벳자타에서 38년 동안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사람이 세 번째 표징이 되었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것도 표징입니다.
한 아이의 작은 봉헌이 수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이는 표징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려는 사람을 통해 표징이 완성됩니다.
다섯 번째 표징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신 사건입니다.
그리스도를 맞아들임으로써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깃드는 것을 보는 것도 하나의 표징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라자로를 살리시는 것이 마지막 표징입니다.
많은 유다인들은 그 많은 표징을 주셨음에도 믿지 않고
죽어서 이미 몸이 부패한 사람을 살리는 정도의 강력한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죽어서 몸이 썩어가는 것까지 받아들일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내버려 두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희망할 수 있는 사람들도 필요로 하셨습니다.
어떠한 표징도 믿음의 중개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표징을 주시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대해야만 하시는 것이 가슴 아팠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큰 표징의 재료가 되고, 천국에서는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탈리아 한 의사가 미국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가장 어두운 악몽 속에서 나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난 3주간 우리 병원에서 보고 경험하게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악몽은 강처럼 계속 흐르고 있고, 그 강물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의 환자가 왔고, 다음에는 수십 명이, 다음에는 수백 명이 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더는 의사가 아니라, 누구는 살고 누구는 집으로 보내져 죽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분류자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환자가 평생을 이탈리아 건강 보험료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2주 전까지만 해도 나와 나의 동료들은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의사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과학이 하느님의 존재를 배제한다고 배웠습니다.
나는 나의 부모님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9일 전에, 75세 된 한 사제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호흡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죽어가는 환자들의 손을 붙잡고 그 성경을 그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우리 의사들은 모두 지쳤고, 낙심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끝장이 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사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진맥진했습니다.
우리 동료 중 두 명이 죽었고, 다른 동료들은 감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쉬는 시간 몇 분이 생길 때 기도합니다.
나와 동료들이 서로 얘기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격렬한 불신자들이었지만, 우리는 이제 매일 평안을 구하고 있으며,
주님께 우리가 병자들을 돕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어제, 그 75세 된 사제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3주 동안 여기에서 120명 이상의 사망을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사제가 자신의 상태와 우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었었습니다.
그 평안은 우리가 이제는 더 찾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평안이었습니다.
그 사제는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만일 상황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곧 우리도 그분을 따라갈 것입니다.
나는 6일 동안 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것이 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구상에서 나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한 호흡을 쉴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비록 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과 나의 동료들의 죽음에 둘러싸여 있지만,
내가 하느님께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행복합니다.”
75세의 한 사제는 자신이 십자가의 제물이 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많은 사람에게 잃었던 믿음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표징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안위부터 챙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사제는 이웃부터 챙겼던 것이고 사람들은 그 위에 내리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표징이 아주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누구 하나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성당에 와서 가장 큰 표징은 성체성사를 영하면서도
자신은 세상에서 살기만을 원하고 그런 것만을 청합니다.
물로 그런 것도 청할 필요가 있겠지만 주님은 표징의 재료가 될 제자들을 찾으십니다.
몬테 팔코의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심장에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박을 굳은 땅이 없다고 슬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심장 안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도구들이 나왔고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는 세상에서 편하기만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더욱더 십자가 희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성령은 제물 위에 내립니다. 부서진 밀알 위에 성령으로 당신이 들어오시고,
짓이겨진 포도 속으로 당신이 잉태되십니다.
믿음은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를 가장 사랑합시다.
이 제단 위에서만 다른 이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고
나는 주님의 표징의 도구로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믿음을 줄 표징의 밀떡과 포도주가 됩시다.
내가 부서지고 갈리지 않고 물과 불로 단련되지 않고는 밀떡이 될 수 없고,
짓이겨져 나의 피가 흐르지 않고는 포도주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주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을 표징의 재료가 되는 것만큼 의미 있는 삶은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3가지 차원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달마’입니다.
달마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의지입니다. 무엇(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예전에 교리문답은 이렇게 묻고 답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왔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왔습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달마가 그 이유를 알았다면 달마가 가는 곳은 모두 동쪽(깨달음)일 것입니다.
반대로 그 이유를 몰랐다면 수십 년을 걸어가도 동쪽(깨달음)에는 도착할 수 없을 겁니다.
둘째는 ‘동쪽’입니다.
동쪽은 방향을 의미합니다. 방향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면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아담은 어디를 가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묻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우리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기꺼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리석은 성모상이 되기도 합니다. 포도주는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면 돈을 버려야 합니다.
권력 때문에 양심을 속인다면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방향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원칙과 기준이 뚜렷한 사람에게 장소는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습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더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간에 더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습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습니다.
생하는 것이 있으면 멸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신앙인은 행동하기 전에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인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자국을 보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함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믿음과 사랑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깃발을 향해 가고 있는 겁니다.
시기와 질투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욕망과 이기심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우리는 사탄의 깃발을 향해 가고 있는 겁니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연민’입니다. 죽은 라자로에 대한 연민이 있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연민이 있으셨습니다.
오천 명에게 빵을 먹이신 것도,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것도,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신 것도,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것도,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도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비롯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신 것도 연민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면 이렇게 죽어가는 모든 것을 품어주는 연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민의 마음이 가족, 이웃, 국가의 벽을 넘어서 함께한다면, 연민의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넘어서 원수와도 함께한다면 세상은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둘째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산상설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나라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춤추고, 늑대와 어린양이 같이 노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셋째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무한대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과 욕망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뛰었고, 살아있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다락방이라는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의미와 존재의 차원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으로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으며
인류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거룩한 신비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나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