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다리의 역사
1934년 개통되었으며 다리의 디자인은 일본인 마스터 준, 설계는 야마모토 우타로가 했으며 도계장치 등 기계는 일본 오오사카주식회사에서 만들어 왔다. 다리의 나이는 올해로 83세이며 광복 이후 1966년에 영도에 늘어난 주민수로 인해 교통난과 식수난이 심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개가 중단되었다. 그 후 47년 만에 롯데가 기부체납방식으로 복원하여 2013 11월 23일 다시 도개를 시작하였다. 지금은 관광차원에서 하루에 한 번 오후 2시에 도개하고 있다. 처음 다리를 계획할 때 도선업자와 해운업자들 반대가 심하였다.
여러 고심 끝에 도개다리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산을 깎아 해안을 매립하고 다리를 놓게 되는데 당시 산이 무너지면서 조선인 중국인 노무자들이 많이 희생되었고 다리의 본 공사를 할 때도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 다리 개통식 날 아시아 최초의 도개교이며 다리가 하늘로 솟아 올라간다는 게 너무 신기해 부산시민은 물론 김해 밀양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왔었다. 그날 5~6만 명이 다리를 보기위해 나왔으며 초도식도 우리의 전통 초도식과는 달리 당시 초등생 124명을 뽑아 다리를 먼저 건너게 한 뒤 식을 거행하였다. 처음에는 다리를 도진교라 부르다가 개통식 때는 부산대교라 했는데 1980년 부산개항 100주년기념으로 새로운 부산대교가 생기면서 다시 영도다리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도 부산대교보다 영도대교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됨.
영도다리가 세워진 이유
개항 후 영도에 일본인조선소와 일본인기업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자연히 일본인 거주자들도 많이 늘었다. 당시 일본 기업인들은 값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며 조선인을 고용하며 공장을 운영하였다. 그런데 우천 시나 날씨가 안 좋을 때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도선이 운행을 못하여 공장가동에 많은 어려움이 생기고 또 영도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의 편의를 위해 다리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물자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리 개통 3개월 후에는 다리 위에 전차가 개통되었다. 왜? 조선인 노동자들을 빨리 출근시켜 일을 시키기 위해서. 당시 많이 할 때는 7번까지도 도개를 하였고 광복 후에는 오전 오후 하루에 두 번씩 도개하였다.
현재 관광차원에서 하루에 한 번. 오후 2시에 도개하고 있으며 한번 도개하는데 전기요금이 65,000원 든다. 92개의 톱니바퀴로 만들어진 도개장치는 톱니가 1개씩 내려갈 때마다 1도씩 올라가는 시설로 72~75°까지 도개하고 있다. 양쪽 차단기는 당시 도개하기 전 전차를 차단시키는 기계이며 지금도 똑같은 상황을 재현하며 차단기가 내려가면서 도개가 시작된다. 길이 214.63미터. 폭 18미터. 교량면적 3948제곱미터 폭이 25미터로 확장(다리 옆에 있는 다리목 면적이 복원 당시 다리로 편입됨)도개속도는 빠를 땐 1분 30초 저속일 땐 4분 정도 소요 도개되는 부분은 30여 미터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