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뵙게 됩니다. 사돈."
선인군 이혁을 본 효원은 놀라는 표정을 감추느라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여기는 ...."
"하하. 놀라실 것은 없어요. 전라도에 일이 있어 마치고 올라가는 길입니다. 예서 하루 머물다 갈 생각이지요."
"아. 그러십니까. 보신 일은 잘 되셨는지요."
진정을 하고 웃는 낯을 보였다.
"네.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나저나. 몸이 좋지 않다는 말씀은 아버님께 들었습니다. 공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이곳 온천 욕이 좋다하여 잠시 들렀습니다. 젊은 몸이 호강중이지요. 좋다는 곳을 찾아다니니 말입니다."
"자.. 자. 예서 이러지 말고, 드십시다. 저녁상을 보아 올 겁니다."
선인군은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의 모습은 흡사 오랜 친구 같았다.
효원은 자신과 친분관계가 그리 깊지 않은 선인군의 태도를 짐작으로 읽을 수 있었다.
저녁상이 들어 올 때까지 둘의 이야기는 그저 대수롭지 않았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으며 조종 돌아가는 이야기들.
누가 병환으로 누웠고, 누가 전하의 총애를 지극히 받아 어떻게 되었다는 등...
선인군. 그는 효원의 누이의 남편이었던 충인군의 친동생이었다.
그의 형수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에게나 혹은 그의 형을 통해 들었음이 분명하였다.
원래 사람됨은 알 수 없으나 사리가 분명하고, 처신이 바른 선인군는 충인군의 그 방만하고 못난 행실에 불만이 많아 둘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을 효원은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효원은 선인군이 자신의 일을 입에 올릴 것을 알았으므로, 말은 되도록 절제하여 조심했다.
아니나 다를까 식사를 마칠 즈음 선인군은 드디어 그 일을 입에 올렸다.
"형수님 일은 참 안됐습니다."
"네.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저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분명 사돈께서 화가 나서 무슨 조처를 취할 것이라 생각했었지요."
"원체 그 아이가 몸이 허약하여 송구하였던 터에 그리 빨리 세상을 뜨는 바람에 저희 집안에서는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어허. 이러지 마십시오. 사건의 내용을 다 아는 처지에 말을 돌려 무엇하겠습니까."
"내용이란 이런 것이 아닙니까. 소인의 허약한 누이가 혼인한지 10년도 되지 않아 아이 하나도 낳지 못하고 죽은 것이지요."
"내가 다 알고 이러는 것입니다. 내 형님의 일입니다. 어찌 그리 발뺌을 하시는 겁니까. 그예 일을 이리 넘기실 작정입니까?"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날 만취하여 누이의 죽음이 있던날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기억에 없습니다."
선인군은 간소한 술상이 들어왔음에도 술잔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에는 마주하고 있는 효원의 태도가 영 불편했다.
이 자가 자신이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그를 빌미로 해꼬지를 할 양으로 생각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의중을 묻는 것이 목적이기는 했다. 이 기회에 그는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형을 멀리 내치라 할 생각이었다.
전하의 친동생. 그리고 조카.
오랬동안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입에는 담지 않은 왕실의 체통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영민하고, 바른 아이었던 충인군은 이미 사라졌다.
술과 여자를 접한 후 달라져 버린 사람은 한양 기방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마치 시정잡배와 같은 행동을 일삼았고, 기어코 일을 벌인 지금에서도 그는 반성을 할 줄 몰랐다.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듣고 그는 이 일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는 아버지와 형을 대신해 효원이 무슨 말이든 꺼내주길 원했었다.
그의 바램은 철저히 무너졌다. 오히려 함구를 한 것은 효원이었다.
"내가 사돈 입이 무겁다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요. 허나 입을 다문다고 가만히 닾어질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굳어진 입술을 열릴 줄을 몰랐다. 효원은 할말이 없었다.
더 이상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내일 일찍 길을 떠나야 하니 오늘은 이만하는 것이 좋겠군요."
효원은 굳은 표정을 피고, 힘 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서는 그의 등 뒤에 따가운 한마디가 들렸다.
"그럼 잘 가십시오. 호, 조, 참, 판, 김, 효, 원, 대, 감."
선인군이 힘주어 한 음절마다 떼어 한 말들이 송곳처럼 들어와 박혔다.
호.조.참.판.
걸음을 멈춘 그는 돌아서서 욕이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으로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부르르 떨었다.
잠시 자신의 분노를 누르려 눈을 감았으나 이내 눈을 힘껏 뜨고 여전히 이를 악문채 그 대로 발길을 재촉했다.
겨우 신을 신고서 호롱불을 들고 가는 하인의 뒤를 몇 걸음 밟지도 않았는데 묵직한 것들이 솟아 그의 목구멍까지 세차게 역류했다. 아직 선인군의 처소를 빠져나오지 않은채 벽에 대고 거칠게 올라오는 토사물들을 쏟아 내었다.
너 같은 이가 어찌 알 것인가.
어찌 너 같은 이가 동생의 목숨으로 내가 벼슬을 얻었다 하는가.
효원은 술에 진탕 취해 걸을 걷지 못하는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객사로 돌아왔다.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오자 방안의 더운 공기가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피로했다. 몸이 흘러 바닥에 붙을 것 만 같아 그는 도포며 저고리며 급하게 벗어 던지고, 자리에 누웠다.
깨어있지도, 잠이 들어 있지도 않은 채로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는 눈 앞과 혼미한 정신으로 축 늘어져 버렸다.
새벽에 서희는 무겁게 눈을 떴다.
아침에 내어갈 탕약을 달이는 것이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전날 밤에 미리 약재를 넣어 둔 약탕기에 물을 부었다. 작게 자른 종이로 입구를 막은 후 숯을 넣어 데운 화로에 얹었다.
부채질을 하는 단순한 일에 그녀는 금방 졸음이 몰려왔다.
고된 모양으로 하품을 하다 갑자기 이는 연기에 콜록거리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젠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는 것도 그녀의 모습 같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누구 보란 듯이 큰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는 것이 어울릴 듯 싶었다.
날씨는 찼지만 바람은 없어 그녀는 더욱 정성 들여 부채질을 해야 했다.
갑자기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에 그녀는 졸리운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객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몰래 벽에 몸을 대고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속저고리 바람에 찬바람을 맞고 있는 효원이 보였다.
표정 없이 서 있던 그는 이내 어지러운 듯 마루에 걸터앉아 어두운 눈빛을 하고 초점 없이 마당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그를 재운 후 그녀의 마음에는 거칠고 사납다는 그가 안쓰럽고 가련하게 여겨졌었고, 그런 마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터였다.
바람은 없었으나 꽤 차가운 새벽에 겨우 속저고리 바람으로 밖에 나온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이내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화로 앞에 앉았다.
그는 그녀가 생각한 만큼 나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그녀가 안쓰러워 할만큼 어린 사람도 아니었다.
관비 유서희.
그녀는 뜻없이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부채질을 했다.
아무 생각도 말자. 아무 생각도..
그 날 새벽 찬바람을 맞은 때문인지 효원은 사흘동안 감기로 인한 몸살로 누워있어야 했다.
사흘간 지독한 감기를 앓으면서 그의 시중을 든 것은 죽은 누이도 아니었고, 콧대 높은 아내도 아니었다.
사흘 낮밤을 지켜주었던 것은 한낱 낡은 치맛자락을 흔들던 관비 유서희였다.
8.
늦은 기상 탓도 있었으나 오래도록 말을 달리느라 저녁에서야 온천 욕을 한 효원은 꽤 늦은 시간에 객사로 돌아왔다.
불이 밝혀져 있는 방안에서 그림자 하나가 보였으나 이전 같은 놀라움은 없었다.
"안 잘 거냐? 네 방으로 가거라."
"오늘밤...."
"고뿔은 다 나았다."
그는 그녀의 말을 잘라 버렸다.
"오늘밤도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만류하지 않았다.
화롯불을 피우며 앉아있는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제법 다소곳이 앉아 있는 양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 같아 그는 잠시 자신의 못난 마음을 질타했다.
혼란스럽게 그를 오가는 마음을 그는 다시 한번 다 잡았다.
그녀는 애써 돌아눕는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초를 껐다.
"끄지 말아라. 못된 버릇이 들어 어두우면 잠을 청할 수 없어."
그녀의 튼 손이 마저 끄지 않은 다른 초에서 불을 옮겼다.
"사흘동안 소녀는 알 수 없는 말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효원은 그녀가 말하는 알 수 없는 말들이 짐작이 가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몸을 벽을 향해 옮겨 누울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뜻을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효원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효원은 두서없이 머릿속을 헤메는 말들을 지우려 눈을 꼭 감아버렸다.
"왜 그러시는지 여쭈어도 되는지요."
그가 말이 없자 그녀는 다시 한번 그에게 말을 건넸다.
"어찌 식은땀을 흘리시며 고통스러이 주무시는지 여쭈어도 되는지요."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는 그의 속마음을 그는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가족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그의 마음 깊은 곳을 누르고 있는 어두운 상처를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벽을 두고 돌아누운 상태로 눈을 감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게 친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나와는 2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작고, 어여쁜 아이였지. ....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라 나와 정이 참 많이 들었느니라. 그 아이 열 다섯이 되던 해에 높은 신분의 누군가와 혼인을 하게 되어 아주 떠났지. 그 아이가 두 번이나 유산을 하여 내 가족들은 걱정이 참 많았어. 높으신 분은 너그러웠지. 하지만 난 그 분이 그 아이 외에 여럿의 여자를 탐하고 있음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어. 허나 높으신 분. 그래 내 참을 수밖에 없었지. 모든 남자들이 그러하지 않더냐. 조강지처란 그저 집에 놓는 아낙일 뿐이 아니었더냐. 가끔 그 댁 어른들을 뵙기 위해 그 댁을 찾으면 세 번 중에 한번은 멍이 든 얼굴을 하는 그 아이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짐작은 갔느니라. 하지만 남의 집안 사에 아무리 오래비라 해도 참견할 수 없었어. 그래 참아야 했어. 어머님께 말씀도 전하지 못했지. 가끔 어머니께서 그 아이를 보러 가려해도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말렸지. 친정 어른이 자주 드나드는 것은 그 댁에 누가 되는 거라고 말렸지. 그런 오래비였다. 그 아이가 어떻게 살지 뻔히 알면서도 말도 못했던. 난 그런 오래비였다. 그 높으신 분과 함께 한 술자리가 작파하고 그분을 모시고 그 댁으로 갔지. 수척했지만 오랜만에 멀쩡한 그 애의 얼굴을 보니 술에 취해 있었으면서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느니라. 그래. 난 돌아서는 길이었어. 돌아서 가는 길이었어. .....그 나쁜 분이 내 동생을 밀어 그 아이가 댓돌 밑으로 떨어져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 그 순간에도 내 이 마음에는 분노보다 그를 누르는 이성이 더 컸느니라. 떨어져 숨이 멎은 그 애를 보고서도 난 울어보지도 못했느니라. 숨도 쉬지 않는 그 애를 안고서도, 분노의 찬 눈으로 그 높으신 분을 잠시 노려보았어도, 난 울어보지 못했느니라."
흐르는 눈물에 그는 말을 멈추었다.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참았던 눈물을 조금씩 내어놓았다.
서희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소리를 죽이며 흐느끼는 그의 어깨가 단단하게 굳어져 있어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부끄러웠으나 그녀는 촛불을 끄며 그를 안았다.
더 이상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하고 그녀는 흐느끼는 그를 안고 그의 등을 다독였다.
가슴속으로 이럴 때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그의 상투를 튼 검은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안고 있는 사람은 남자였다.
머리위로 상투를 틀어 올린 남자였다.
서희는 남녀의 정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남녀의 일들에 대해 아는 바도 없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안겨 있는 효원은 거칠고, 음탕한 사내가 아니었다.
단지 사람. 아픈 속내를 보일 곳이 없었던 사람. 관비 서희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전날보다 더욱 개운한 마음으로 잠을 깬 효원은 자신이 서희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 일어났다.
그가 급히 잠을 깨고 일어나 앉자 고개를 숙인 채 힘든 잠을 자던 서희 역시 급하게 자세를 고쳤다.
서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살짝 마주친 그의 눈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소세하실 물을 올리겠습니다."
서둘러 일어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
푸른 치맛자락.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아버렸다.
이미 사라진 그녀 였지만 그녀의 잔상이 남아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허둥지둥 방에서 나온 서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장쇠아범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시였지만 '나는 다 봤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장쇠아범의 의중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효원을 담아버린 서희에게 그런 눈 빛 따위는 겁날 것이 없었다.
"공주로 돌아가려 하니 준비들 하여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금일 내로 공주로 가겠네."
"네 대감마님"
장쇠아범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유성에서 한달 정도 머물겠다 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열흘도 다 채우지 않았건만 무슨 일인지 효원이 서두르는 것이었다.
짐을 꾸리는 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
서희와의 일을 그가 목격했다는 것을 아는 것인가.
급히 떠나야겠다고 현감에게 말하고 잘 지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하인들을 먼저 보내고 그는 말을 돌려 잠시 곰나루에 들렀다.
찬바람, 강
사람들이 오가는 나루터.
그는 자신의 시름을 흐르는 강물에 내어 맡기고 싶을 뿐이었다.
이제 저의 작고 작은 소설을 끝을 향해 갑니다.
마직막 초설 5를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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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