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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놀라는 눈빛이 보이는 엉신이의 눈에는 내가 담겨져 있다.
무언가를 바라는 눈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이 어설프면서도 슬프게……그리고 안타깝게 보인다.
“그래. 만나서 오해 풀고 와. 기다릴게.”
“응…….”
고개를 끄덕이며 엉신이의 손을 놓고 빛애가 있는 곳을 향해서 뛰어갔다.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빛애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 시간낭비에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열심히 뛰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찰 때쯤 앞에는 아까처럼 최현과 나란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연이 언니가 흐릿하게 보인다.
“언, 언니……!”
아! 또다시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는데 그 소리에 밝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시던 언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애끼야!”
마시던 커피를 최현에게 맡기고 내게 달려오는 언니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시야가 흐릿해지는데……눈물이 흐르려는데 약해빠진 내 모습을 느끼니 답답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말을 해봐. 무슨 일인데 그래?”
천천히 눈을 다시 뜨고 흐릿한 시야를 무시하며 언니에게 말했다.
“빛애를……만나고 싶어. 만날래.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꼭 만나야해. 만나서 할 말이 있어.”
“애끼야, 그건!”
알고 있다. 언니가 내게 할 다음 말이 무엇인지는 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이유 또한 알고 있다. 그래도 이대로 멈춰 설수는 없다.
“언니 말이 사실이라면……의비가 빛애 때문에 돌아온다면 왠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그전에……빛애를 만나고 싶어. 언니 말대로 시간이 없잖아. 촉박하잖아…….”
힘이 풀린 다리에 억지로라도 힘을 주며 일어서는데 언니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나를 부축해준다.
반쯤 감긴 눈으로 언니를 바라보는데 언니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최현을 바라본다.
“갑작스러운 물음이니까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심각한 표정과 심각한 말에 진지한 표정을 짓는 최현은 벽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은빛애가 있는 곳을 알려줘. 지금 당장……갈수밖에 없을 것 같아.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말을 길게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언니는 다시 최현을 바라본다.
그러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여는 최현이 내 시야에 흐릿하게 보인다. 그리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살짝 크게 뛴다.
“지하1층 109번방에 들어가면 있을 거야. 너무 발악을 해서 좀 묶어두었으니까 놀라지는 마.”
“알았어. 그럼 갔다 올게.”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언니와 최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렇게 나를 부축하며 지하1층으로 가기위해서 뒤를 돌아 최현에게서 멀어지는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힘없이 말했지만 내 마음이 담겨있는 말에 잠깐 걸음을 멈추는 언니는 싱긋 웃는다.
“고마우면 쓰러지지나 마. 애써 지하1층까지 부축하고 갔는데 쓰러지면 내가 헛수고를 하는 거잖아.”
“응…….”
절대 쓰러지지 않을 거야. 그게 사람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고 해도……최대한 버텨볼 거야.
그게 나를 시험해보는 거라면……당당히 당해줄 거야. 그래서 그 시험에서 통과할 거야. 난……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야지 당당하게 웃으면서 엉신이랑 언니……그리고 나를 도와준 최현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
하늘에 있는 아빠한테도 밝게 웃을 수 있으니까 꼭 그렇게 할 거야. 의비랑 빛애한테는 피해일지도 몰라도……
이 피해가 나중에는 행복이 될지도 모르니까 나에게 선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오직 한 길을 바라볼 수밖에 없어.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여러 번 흔들고 눈을 깜빡거렸다. 가끔 바닥을 바라볼 때면 걸음을 빨리하는 언니의
발이 보이고 그 스피드에 맞춰서 따라가는 내 발이 보인다. 그렇게 바닥을 바라보고 천천히 고개를 들을 때는
확 달라진 배경화면에 내 마음이 초조해진다. 점점 빛애와의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초조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나보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숨을 고르게 쉬어 봐도 그럴수록 초조함은 더해간다. 어느새 언니의 걸음
이 멈추고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나로서는 벽의 앞에 걸음을 멈춘 것만 같이 느껴진다. 긴장을 하고 고개를
천천히 드는데 내 앞에 보이던 벽에 문고리가 보이고 더 고개를 들자 109번이라는 숫자가 벽에 그려져 있다.
아니, 이건 벽이 아니라 문일 거다.
“할 수 있지?”
멍한 상태로 가만히 문을 바라보는데 언니의 갑작스런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언니에게서 떨어진 후 문고리를 손으로 잡았다.
“갔다 올게.”
“……응.”
그렇게 잡은 문고리를 돌린 후 방문을 여는데 방안에서부터 지독하고 구린 냄새가 풍겨 나오기 시작한다.
참기 힘든 냄새였지만 애써 참으며 발걸음을 방 안쪽으로 옮기고 문을 닫는데 내 시야에는 벽에 손이
묶여있는 위험한 모습의 빛애가 보인다.
“빛……애야.”
그저 계속 눈을 감고 있던 빛애는 익숙한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서서히 눈을 뜬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은 눈물범벅 이였고 손이 묶여있어서 불편한지 인상을 찡그리는 빛애다.
“왜 왔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궁금해서 직접 행차한 거냐?”
날카롭고 전과 같은 남자 같은 말투의 목소리가 들린다.
의비를 생각하며 말하던 말투는 다른 누가 봐도 사랑에 목말라하는 여자의 말투인데 지금의 빛애는 분노와 증오에 말라버린 말투이다.
그럼 전에도 그렇게 가슴에 분노와 증오를 담고 있었던 건가? 나를 보며 말하던 그 목소리랑 말투는 모두 내게 보이는 증오였던 거야?
아니면 나 혼자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알고 싶어. 왠지 끝까지 나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알고 싶어.
“정말 역겹다. 왜 그딴 표정을 짓는 건데?”
글쎄. 네가 말한 그딴 표정이 어떤 표정일까. 난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라서 모르겠어.
“직접 행차했으면 말을 하라고. 용건 없으면 저리 꺼지고.”
눈매가 서서히 날카로워지는 빛애를 보니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일지도 몰라서……이렇게 보는 게 우리한테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마지막은 화려하게 장식했으면 해서 찾아온 거야.”
“하? 마지막? 그 마지막이라면 우린 아까하지 않았냐? 아까 되게 화려했거든.”
그리 심한 말은 아닌데 잔인하게 입 꼬리를 올리는 빛애를 보니 가슴이 찢어진다.
그리고 웃던 입 꼬리와 동시에 부릅뜨던 눈을 가라앉히는 빛애는 슬픈 표정을 짓는다.
“새애끼, 솔직히 말해도 될까?”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슬픈 목소리를 내 귓가에 들려주니 그동안의 친구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다.
“정말 괴로운 사실이 하나 있거든.
나도 같은 인간이니까 새드엔딩보다는 해피엔딩을 좋아하는데 모두가 해피엔딩인 내용은 없을 것 같단 말이야.
왜냐면 우리 둘 중 한명만 해피엔딩이고 남은 한명은 어쩔 수 없이 새드엔딩이어야만 하거든.
해피엔딩이 되려고 노력해도 새드엔딩일 수밖에 없는 슬프고도 괴로운 사실을 너는 모를 거야.
매번 바보같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며 나서니까. 그런 네 모습이 날 더 화나게 만들어.”
전에도 느꼈지만 순간적으로 빛애가 내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모두가 해피엔딩일 수가 없다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너도 나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열려있어! 어느 누가 우리의 행복을 막을 수는 없다고!
그 행복의 길은 자기 자신한테 달려있는 거야! 네 행복은 네가 막고 있는 거라고!
설령 그게 남들이 보기엔 불행한 것일지도 몰라도 자기가 생각하기에 행복한 것이라면 그것 또한 해피엔딩이야.
넌 왜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거야?
언제부터 그렇게 변해버린 거야? 전에는 안 그랬잖아. 아니면 전에 내게 했던 행동은 다 거짓 이였던 거야?
난 네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몰라서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런 건 몰라도 상관없어!
난 네가 생각하는 게 궁금할 뿐이야! 네 마음이 궁금하다고! 너의 진심이 뭔지 궁금해!”
눈을 질끈 감고 소리 질렀다. 감정이 커져서 그만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데 내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뜨는 빛애는 헛웃음만을 날린다.
“이래서 내가 네가 짜증난다는 거야. 그런 네 모습이 날 화나게 만든다고!”
그렇게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는 빛애의 눈에는 투명한 눈물이 맺혀있다.
사실은 너도 힘든 거잖아. 사실은 너도 다 같이 해피엔딩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잖아.
그런데도 그 방법을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척 해야만 하는 네 모습에 슬픈 거잖아.
더 괴로운 거잖아. 슬퍼서 지금 그렇게 눈물을 흘리려고 하잖아. 위로를 받고 싶은 거잖아.
“왜 거짓말해?”
“뭐?”
“왜 거짓말 하냐고! 너도 다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모른 척하니까 좋냐? 좋아? 재밌어? 달콤해?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아? 그래서 행복해? 기뻐? 웃음이 나와? 웃고 싶어? 웃고 싶냐? 난 아닌데……
난 거짓말하면 웃음도 거짓웃음이 되어서 행복하지도 않고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 기쁘지도 않아!
모두들 진정한 웃음을 바라는데……모두들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데 넌 왜 그러는 거야? 너 또한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너도 같은 인간이니까 해피엔딩을 바란다며! 그럼 네가 마음에 가는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잖아! 왜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감춰?
자신의 마음을 묻어버리는 거야? 의비를 향한 마음은 솔직하면서 왜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마음은 솔직해지지 않는 거냐고!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하는 너를 지켜보는 내가 더 짜증나고 화나고 불쾌하단 말이야!”
심하게 흘리는 눈물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내 말에 나와 같이 눈물을 흘리는 빛애는 소리를 지른다.
“싫어! 정말 싫어! 다 싫어! 나도 싫고 너도 싫어! 모든 게 다 싫어! 이젠 다 싫어졌어. 의비를 향한 마음?
개나 주라고 해! 이젠 그런 감정 같은 건 필요 없어. 내가 싫어졌는데 누굴 사랑해? 내 주제에 누굴 사랑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차라리 그딴 감정 애초에 없었어야했어. 생겼어도 버렸어야했어! 혼자서 가슴 앓고 있는 내가 더 바보 같은 거였어!
그래, 나 거짓말했어. 웃음이 나오지 않았는데 연습하니까 웃음이 나오더라고? 난 슬퍼도 웃을 수가 있었어! 그래서 지금도 괴로워도 웃잖아!
네가 말하는 것마다 비웃잖아! 그래도 난 그렇게 짓는 웃음이 진짜 웃음이라고 생각했어. 하루도 빠짐없이 이런 웃음을 날렸으니까.
내게는 이런 웃음만이 세상에 전부인줄 알았어! 그런데 널 만나고 내 생각이 다르다는 걸 느꼈어.
너의 미소가 정말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미소라는 것을 알고 난 후 난 더 비참해지고 불쾌해지고 짜증나고 역겹고 화가 났어!
그래서 의비가 너를 향해 보이는 미소 또한 내게 짓는 미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 그때부터였나? 내 심장이 반응한 것은……
의비가 너에게 나와는 다른 미소를 보이는 것을 느낀 순간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어!
그리고 화가 나더라고? 불쾌해졌어! 주먹이 저절로 쥐어지는 게 정말 다 때려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 이였다고!”
바닥이 눈물로 적셔진다.
“그래서? 그래서 다 때려 없애버렸어? 너의 그 심정! 어디다가 화풀이 했어? 화풀이를 하긴 한 거야?
슬프고 괴로울 때마다 쌓아두지 말고 말하지 그랬어! 나한테 직접 말하지 그랬어! 그 정도는 맞아줄 수 있는데…….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는데……왜 혼자서 앓고 있었어?”
서서히 빛애와 엉킨 끈이 풀리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엉켜있어서 풀리지가 않고 심하게 묶여있다.
나 어쩌면 좋지?
“네가 희생한다고? 왜 희생을 해? 내가 뭐라고? 내가 뭔데 너 같은 공주님이 희생을 해야 하는 거야? 웃긴 거 알아? 너 재수 없어.”
재수 없어도 좋고 웃겨도 좋아. 그냥 넌 나에게 있어서 친구니까.
“친구니까. 영원히 친구니까. 배신해도 친구고 죽어도 친구고 나한테 넌 그런 친구니까.”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는데 빛애가 눈물을 머금고 심하게 동요되지 않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한다.
“끝까지……날 화나게 만드는 너인데……진짜 싫은데……하나는 알 것 같아. 너의 그런 점이 의비를 설레게 했다는 것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순수함……그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건가 보다. 이제는 정말……깨끗이 정리해야겠어.
의비를 향한 마음도……그리고 너와 친구였던 감정도……추억도 모두 다……깨끗이 잊어버릴 거야.”
무슨 소리야…….
고개를 들어서 빛애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마지막일지도 모르네. 이젠 나도 지쳤어. 네 말대로 나도 행복을 바란다면 여기서 그만 해야 할 것 같다.”
“빛애야.”
“마지막으로 미안. 내가 한 말에는 후회 안 해. 그저 너한테 미안한건……지겨운 내 투정 들어줬으니까.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처음에는 의비와 빛애에게서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다시 시작했는데 빛애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휑한 게 내가 원하던 소리가 아닌가 보다. 기뻐야하는데 기쁘지가 않다.
그저 울컥해져서 눈물이 더 흐를 것 같다.
“그리고……”
“그만해.”
“좌수할 거야. 너의 아빨 죽였으니까. 내게 있어서 소중했던 사장님을 죽였으니까…….”
그만하라니까…….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러니까…….”
“그만…….”
쾅-
갑자기 방문이 세게 열리더니 언니가 들어온다.
깜짝 놀라서 빛애와 나는 언니를 바라보는데 언니는 침을 꼴깍 삼키며 힘겹게 입을 연다.
“비상이야. 최현으로부터……신의비의 쪽지가 왔대.”
뭐?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하고 벌떡 일어나서 언니에게 다가갔다.
“쪽지라니? 그게 무슨…….”
놀라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 멈추고 말을 빨리하는데 빛애도 예상치 못한 의비의 소식에 놀랐는지 멍하니 언니를 바라본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어. 빨리 최현에게 가봐야겠어.”
그렇게 등을 돌려서 빛애와 내게 등을 보이며 달려가는 언니는 내게 빨리 오라는 신호를 손짓으로 보낸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천천히 빛애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데 빛애는 숨을 고르게 쉬고 침착함을 유지한다.
“가……. 가서 의비를 구해줘. 의비의 가슴 속에 있는 상처를 씻어줘.
내가 아니라 의비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너라는 게 불쾌하지만 그래도……이젠 괜찮아.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고 가. 뒤도 돌아보지 말고……당당하게 걸어 나가.”
빛애의 말 한마디는 모두 진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것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적신다.
눈에는 눈물방울이 생기는 게 슬프지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빛애와 내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다.
“응. 꼭 그렇게 할게.”
빛애 네가 나한테 실망하지 않게 하기위해서라도 꼭 의비를 구해줄게.
너의 불쾌한 감정이 헛되지 않도록 내가 꼭 그의 상처를 씻어줄게.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친구의 소원일 테니까……이루어줄게.
몸을 돌려서 109번방이라는 무시무시하고 썩은 냄새가 나는 방에서 나오고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혼란스러운 소리를 따라 뛰어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다리에는 힘이 없고 눈이 풀리지만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텨야한다. 의비의 쪽지……
의비가 이곳에 온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면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 의비를 위해서 여기까지 온 빛애를 생각해서라도……
절대 포기할 수는 없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설령 내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해도 멈추지 않을 거다.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했으니까. 계단 옆에 있는 벽에 기대면서 힘겹게 올라가는데 너무 힘들어서 다리가 주저앉으려고 한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돼! 새애끼! 정신 차려! 제발……이 곳을 걸어갈 수 있게 해줘. 걸어야 해.
쓰러지는 건 용서할 수 없어…….
약해빠진 내 모습에 견딜 수가 없다.
처음부터 내가 약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 왜 이렇게 약한 거지?
서서히 바닥에 주저앉으려는데 머릿속에 나를 기다리겠다던 엉신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따뜻하고 포근한 목소리로 나를 걱정했지만 끝까지 나를 믿어서 기다리겠다고 말하던 엉신이의 그 모습이 아른거리게 떠올라서 무섭다.
두려워진다.
“안 돼……. 누가 나 좀 도와줘요. 제발……도와줘.”
지하라서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고 그저 지상에서 혼란스럽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많이 난다.
바로 조금만 올라가면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데……엉신이를 만날 수 있는데……의비와 더 가까워질 수가 있는데……
모든 게 흐릿해져간다.
“엉신아! 도와줘! 언니! 최현! 신의비! 나 여기에 있어. 빛애도 있고 나도 있다고!”
소리를 쳐도 내 목소리가 지상까지 들리지는 않은 건지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몸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한다.
그 쪽지……나 볼 수는 있을까? 의비야, 넌 그 쪽지를 누가 봤으면 해서 보낸 거야?
그 쪽지를 내가 봤으면 해서 그런 거야? 아니면 갇혀있는 빛애가 보기를 바라서 그런 거야? 이것도 아니면……
그냥 너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왜 여기까지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걸까? 넌 이보다 더 좋은 생각을 하는 아이인데……
그런 현명한 내 후배인데……왜 거기까지밖에 생각이 나지가 않는 걸까? 넌 언제나 내 기대에 미쳤는데……왜 그런 걸까? 이유를 모르겠어.
의비 네가 이유를 안다면 내게 가르쳐줘. 비웃어도 좋으니까 이유만 가르쳐줘. 알려줘. 나 혼자 외롭게 생각하지 않도록……
나 혼자 복잡하게 괴로워하지 않도록 도와줘.
지하의 깊이로는 나보다 빛애가 더 깊었지만 암흑의 깊이는 내가 빛애보다 더 깊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눈을 서서히 감는데 주머니에 꼭꼭 감춰두고만 있던 핸드폰이 나와는 대조되게 밝은 소리를 낸다.
문자 음 소리……. 띠리링거리며 마치 잠을 자려는 나를 깨우는 듯이 울린다.
감기는 눈을 힘겹게 뜨며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 별 같은 사람이라 잡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네요. 그래도 관찰하러 갑니다. 그리고 이제 곧……하나의 별똥별이 떨어지겠네요. 저 때문에……. -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봐서 그런지 그렇게 심장이 크게 반응하지도 놀랍지도 않다.
그저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궁금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정말 궁금하다.
“수신자번호도 없고……사이코인가 봐.”
그렇게 내 눈은 확실히 감기고 무거웠던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는 게 꿈속을 향해 깊이 빠져드는 것 같다.
서서히 눈을 뜨는 것 같으면 주변이 온통 어두운 게 아직도 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언제쯤 이 꿈에서 깨어나 나를 기다리는 엉신이를 만나고 앞서가던 언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서로 밝게 웃으며 장난을 치는 최현을 보고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혼자서 쓸쓸히 어두운 방안에 손이 묶여 갇혀있는 빛애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수는 있을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쪽지를 보냈다던 의비를 다시 볼 수도 있을까? 마지막으로 동료들과 함께 웃을 수 있을까?
그런데 있지……. 나 이상하게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가 않아.
깨어나면 왠지 내가 바라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아서 깨어나기가 싫어.
무섭고 두렵고……막 떨려. 의비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은 건지도 모르겠고 빛애 말대로 내가 의비를 치료해줄 수는 있을지 모르겠어.
더 상처만 남겨주는 게 아닌지 걱정이 돼. 난 늘 사고뭉치였으니까…….
의비와 빛애 앞에서는 난 늘 상처만 남겨주는 사고뭉치였으니까.
여전히 시간이 지나도 이거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으니까. 난 두려워. 무섭고 떨리나봐.
엉신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나 정말 이 순간 깨어나고 싶지가 않아. 늘 동료들을 지키겠다며……
빛애와 의비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떠들어대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그렇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들을 지키고 행복하게 해줄 수가 있어?
그렇지? 엉신이 네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난……거짓말만 치는 구라 쟁이잖아. 이거 하나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잖아.
변하려고 해도 변해지지 않는 게 현실이잖아. 그렇잖아.
서서히 눈을 감는데 꿈속에서의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촉촉한 눈물의 느낌이 가슴속까지 쓰라리게 느껴진다.
그런데 사회가 모순인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한다면……눈을 떠야한다면 나 달라질 수 있을까?
매번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어이없고 재수 없고 황당하고 기가 막히겠지만……정말 변할 수는 있을까?
그럴 확률은 남아있을까? 과연……그럴까? 그런 확률이 남아있다고 해도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감았던 눈을 다시 뜨는데 이번에는 주변이 그렇게 밝지는 않았지만 내가 힘겹게 오르다가 쓰러진 계단이 보인다.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고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가슴이 쓰라리게 아프다.
“그런데 역시……살아있으니까 죽을 때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외치기는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니까.”
한숨을 돌리고 잠깐 눈을 감고 떠보니 힘이 솟는 것 같아.
이렇게 생기는 힘……한심하게 쓰이면 나 때문에 날라 간 힘이 아깝고 불쌍해지니까 지금 이 순간 힘을 내야해.
그래야 힘이 불쌍하지 않으니까. 힘내자. 새애끼.
벌떡 일어나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숨이 가쁘게 차오르고 힘에 겨워서 쉬고 싶었지만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1층…….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생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면 분주하게 움직이는 많은 동료들이 보인다.
동료들을 본다는 것 자체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게 눈물이 흐를 것 같다. 아니, 지금 너무 기뻐서 눈물이 흐른다.
“도착했어. 나 혼자서……여기까지 걸어왔어.”
새애끼, 해낸 거야!
너무 기뻐서 방방 뛰며 눈물을 닦고 엉신이를 만나기 위해서 아까 헤어졌던 회의실을 향하는데 회의실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의비의 쪽지 때문에 살벌한 건가……?
이상한 분위기에 나까지 초조해지면서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 가는데 그만 어디서 많이 본 빼빼로 같이 마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뭔가 불쾌한 기분에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는데 놈은 나를
아는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내게 집게손가락으로 다가오라는 듯이 손짓한다.
“뭐냐?”
여전히 얼굴에는 뼈가 확연히 드러나는 놈의 얼굴은 마치 해골 같은 인상을 풍겼고
난 놈과 전에 대면한 기억이 생각나 불쾌한 감정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리오라고. 여기서 다 보다니 참 끈질긴 인연이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애인이나 할래? 어차피 새씨 가족은 망했고 넌 쓰레기일 뿐이지 않나?”
변함없이 사람을 갖고 노는 장난감으로 취급하는 놈의 발언에 기분이 나빠져 주먹을 쥐고 놈을 째려보았다.
“째려보면 어쩌려고? 넌 나한테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가? 아님 잊어버린 건가? 머리가 둔한 건가?”
저런 놈한테 이런 소리를 들으니 짜증나.
“역겨워.”
“뭐라고?”
“역겹다고 너 같은 거. 뭔 진 몰라도 날 파리 같은 게 아는 척 하니까 재수 없어.”
그렇게 그냥 지나치려는데 놈의 더러운 손이 내 손목을 세게 잡아 내 걸음을 멈추게 한다.
“다시 한 번 더 말해라. 뭐라고?”
정말 끝까지 귀찮게 하는 파리 같은 인물이다.
“귀 썩은 거 아니면 저리 꺼져. 날 파리야.”
놈의 손을 세게 치며 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고 이상하게 불길한 생각이 나서 회의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째서 나를 죽이려던 놈이 이곳에 있는 거지? 어째서 우리 아빠를 그렇게 싫어하던 놈이 있는 거지?
여기는……이곳은 나와 최현의 기지나 다름없는 곳이잖아. 모두가 내 동료인데 어째서……
불길해. 불안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 예감이 들어. 아주 커다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빨리 놈을 막지 않으면 안 돼. 놈을 이곳에서 멀리 보내야 해!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보니 회의실을 향해서 뛰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회의실의 문을 거칠게 열고 안에 들어가는데 안에는 서늘한 바람만이 창문을 통해서 불고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뭐야. 모두 어디로 간 거지?”
손을 떨면서 연락이라도 했을 거라는 생각에 핸드폰을 열어보는데 핸드폰에는 아까 흐릿하게 보았던 문자가 또 다시 와있다.
내가 눈을 감고 쓰러져있는 동안 또 다시 똑같은 문자가 왔었나 보다. 손을 흔들며 다시 문자를 꼼꼼히 읽는데 너무 불안해서 미치겠다.
별이……반짝이는 별이 자기 자신 때문에 떨어진다는 문자는 마치 나를 무서움에 떨게 만드는 말 이였다.
“별은 누구고……저는 누구야? 수신자번호도 없고……누구야, 이런 장난을 하는 놈이.”
서서히 핸드폰을 닫고 고개를 들어서 들어왔던 회의실 문을 바라보는데 문 앞에는 숨다가 내 소리를 듣고 천천히 모습을 보이는 의비가 보인다.
“신의비?”
그리고 의비의 옆에 천천히 다가오는 커다란 그림자가 완전히 내 시야에 나타나자 난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날 파리…….”
의비는 나를 보며 아무 말도 안했지만 이상하게 이 둘이 나를 죽일 거라는 불안감에 몸이 떨려서
뒤로 주춤거리는데 의비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고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오지 마. 지금의 네 모습……내가 알던 신의비가 아니야.”
왜 의비를 더 갈기갈기 찢는 소리를 하는 건지……의비의 표정은 살인을 하려는 표정이 아니라
마치 슬픔에 갇힌 자신을 내게서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표정인데 왠지 난 그 표정이 미끼라는 생각이 든다.
“신의비! 그렇게 다가오지나 말고 말을 해! 할 말 있으면 말을 하면 될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무섭게 다가오는 거야. 슬픈 표정을 짓고 다가오는 네 모습이 적응이 되지가 않아서 무섭고……
네 뒤에서 너의 행동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날 파리의 표정에 더 무서워져.
“오지 말라고!”
하……. 더 이상 뒤로 주춤거릴 길이 없어지자 소리를 질러버렸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의비는 내게 계속 가까이 다가오기만 하고 난 두려움에 몸을 떤다.
“왜 그래……빛애 때문에 그러는 거야? 빛애는 지하1층에 있어.
그러니까 그런 슬픈 표정 짓지 않아도 돼.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다니까.”
가만히 벽에 몸을 부딪치고 다가오는 의비를 바라보는데 어느새 내 앞에 가까이 다가온 의비가 나를 껴안는다.
“왜…….”
의비의 체온이 온몸으로부터 느껴진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는데……마지막일거란 생각에 이렇게 슬퍼서 울어.”
어린아이 같은 의비의 진심어린 따뜻한 말에 나까지 슬퍼진다. 빛애가 말하던 게 바로 이런 거였구나.
얼마나 아팠으면 겉으로 표현까지 할 정도로 슬퍼하는 거야? 의비야, 너의 암흑의 깊이는 어디까지니?
천천히 손을 의비의 등에 올려놓았다.
“바보야. 울고 싶으면 울어.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 걸 바라보는 게 더 괴롭고 슬프니까.”
“하……미안, 정말 미안…….”
의비 네가 내게 왜 미안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빛애를 시켜서 아빠를 죽이게 한 장본인이 의비고 나를 속인 장본인도 모든 시작의 원인이
의비이기 때문에 내게 미안한 감정이 있을 것은 당연한 건데 난 의비의 사과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니, 이해해도 이해하지 않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해해버리면 정말 그런 짓을 꾸민 게 의비라는 사실이 되어버리니까.
난 이해를 안 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처음에는 사과를 받으면 되게 기쁘고 용서를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사과를 들어보면 빛애 때와 같이 기분이 좋지가 않다. 더 답답하고 무게감 있고 괴로울 뿐이다.
“미안하면 그만 여기서 일어나자. 그만 여기서 끝내자. 우리 행복해지자, 의비야.”
서로가 행복하다면 그게 미안하다는 사과보다 몇 배나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과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아니까……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애끼……. 선배…….”
의비가 오랜만에 내 이름을 불러준다. 내게 선배라고 불러준다.
“그거 모르지?”
응. 다 모르겠어. 지금 의비 네가 하는 행동도……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하는 말도 다 계획된 것 일까봐 솔직히 두렵기도 한 면이 있어.
그런데도 너의 말을 믿는 나 자신이 비쳐져서 너무 모르겠어.
“미안하다고 한 건 너한테 한 게 아니라 내 심장한테 한 소리라는 것을……넌 모를 거야.”
순간 또 의비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내가 잘못들은 거겠지 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뚜렷하게 들어버려서 의비의 등에 올린 손에 떨림이 간다.
“내 심장이 미치도록 새애끼라는 여자에게 반응해서 미안하다는 거야.
내 심장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는 거야. 난 그렇게 심장을 또 버릴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는 거야.”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의비의 가슴 아픈 말에 위로를 해줄 말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나도 의비를 사랑한다는 그 말만이 의비를 위로해줄 수 있는 말일 테니까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엉신이를 사랑하기에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의비에게 또 다시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
천천히 의비를 떨어트리고 계속 회의실 문 앞에서 나와 의비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리는 놈을
지나쳐 회의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의비가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내 손목을 붙잡는다.
“가지마.”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비를 바라보는데 의비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잇는다.
“가면 너 죽어. 죽을 수밖에 없어. 여기서 나가면 끝나는 거야.”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신의비, 자꾸 어린애같이 굴래? 내가 안 나가면 내 동료들은 어쩌라고……동료들은 나를 찾을 텐데……
내가 없으면 걱정하잖아. 어떻게 그래.”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 파리가 나를 지켜보고 있어서 불쾌하단 말이야.
저 미소……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고……. 놈한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
이렇게 나를 지켜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한숨을 쉬며 의비의 손을 내려놓으려는데 의비가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아! 신의비!”
“지금 전쟁 중이야.”
“뭐?”
“지금 전쟁 중이라고. 가면 너 죽어. 지금 네 동료들 내 동료랑 싸우고 있어.”
이번에도 내가 무슨 소리를 잘못들은 것 같아서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는데 의비의 표정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심각하다. 불안하다.
“혹시 거기에……엉신이도 있어? 엉신이도 싸우고 있는 거야?”
천천히 표정을 굳히고 말을 하는데 의비가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뭐야, 말을 해. 말을 하란 말이야! 사람 이렇게 애간장 타게 만들어 놓고 갑자기 말을 안 하는 게 어디 있어.
의비가 나를 잡은 손에 힘을 뺄 때 의비에게서 떨어지고 난 날 파리를 지나쳐서 회의실 밖으로 나오는데 뒤에서 의비가 소리친다.
“끝까지 그래! 내 앞에서 그 자식 생각하고! 그 자식 편들고! 그 자식 말하고! 그렇게 내 가슴 후벼 파고……잔인해, 정말.”
미안……. 미안해, 의비야. 그렇게 회의실 밖으로 나와 날 파리를 무시하고 뛰는데 뒤에서 작게 의비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 고백은……별 것도 아닌 게 되는 거잖아. 하…….”
의비야, 정말 미안한데……지금은 너를 생각할 시간이 없어. 나 미친 듯이 심장이 그 사람을 향해서 반응해.
내 발이 그 사람을 향해서 뛰고 있고 내 눈이 그 사람을 향해서 바라보고 있고 내 귀가 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렇게 내 온 몸은 그 사람의 것이 되어버렸어. 정말 미안해……. 빛애 너한테도 미안해. 지키지도 못할 약속 지켜서……
난 의비를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어. 내가 보기엔 빛애 네가 의비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야. 미안해. 정말 다들……미안해.
미안해! 그러니까 무사해줘. 그 때처럼……그렇게 늦고 싶지 않아!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가 않아!
“제발 늦지 않게만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