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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2,1-11>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1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2,3ㄷ-7.12-13>
형제 여러분,
3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를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갖가지 모습으로 저희에게 오시고 함께 현존하시며 동행하시지만, 특별히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성령께서 오시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놀라운 모습’, 곧 하늘에서 세찬 바람의 소리와 불과 혀의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고요한 모습’, 곧 닫혀진 문을 뚫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숨결의 모양으로 들어오십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늘 문을 열거나, 땅의 문을 열거나 모두 ‘닫힌 문’을 열면서 벌어집니다.
곧 성령의 활동은 ‘문을 여는 일’을 통해 드러납니다.
곧 성령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닫혀진 문을 부수고, 가려진 장막의 휘장을 찢고, 죽음에 갇힌 무덤을 풀며, 우리의 굳은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열리고, 닫힌 문은 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열리는 자리는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그러기에 다른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이 베풀어졌고, 우리는 이미 그분 신비체의 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신비체’는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몸은 바로 성령에 의해 지탱되고 존속됩니다.
그 지체를 서로 결합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평화'를 주시는 장면과 성령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협력자’이시요 우리의 ‘협력자’이신 ‘성령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새 백성이 탄생되고, 새 시대가 열리고,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닫혀진 문’을 열고 들어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닫혀진 문’ 뒤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문을 잠가 놓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닫혀진 문’을 뚫고 들어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보통으로 표현하던 이 인사는 이제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인사가 됩니다.
이제 이 평화는 주님의 축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방황이요 두려움이라면, 예수님의 현존이 곧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으로 이제 공포는 기쁨으로 바뀌고, 혼란스러운 무질서는 질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공포와 두려움에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고서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평화의 전령’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요한 20,21-22)
이제 제자들은 평화의 도구,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이 주신 이 평화를 서로 나누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 이 평화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그런데 이 ‘평화’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우리가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이루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협조자 성령’을 주십니다.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라고 하실 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원어의 번역은 ‘숨을 건네주었다’는 뜻입니다.
곧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모두 용서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를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주며, 그러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용서’를 통해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할 때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먼저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감격스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승복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푹 젖는 성령강림절이 되길 바랍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와 평화의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한 자리에 모여>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읽은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민족에 상광없이 그리고 신분에 상관없이 우리가 모두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고 단언을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민족과 사람들이 하나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현실을 보면 사도의 단언처럼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도의 공동체처럼 하나가 되지 못한 것입니까?
오늘 서간은 그것이 한 성령 안에 우리가 있지 않고 한 성령을 받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의 교회가 처음부터 하나가 된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고 난 뒤에도 할례나 음식 문제로 갈라질 뻔하기도 했지요.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도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도들의 교회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주목을 하는 것은 오늘 사도행전의 다음 말씀입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한자리에 모여 있었기에 한 성령을 받게 되었고, 한 성령을 받았기에 한 몸이 되는 연쇄적인 과정의 그 첫 번째 과정이 바로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인 셈입니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는데, 천릿길의 그 한걸음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고, 하나가 되고 싶은 갈망과 의지로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내용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갈망과 의지 위에 꽃피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하나 되고픈 갈망이나 의지는커녕 서로를 두려워하고 거부하고 밀어내는 상황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무리 일치의 은총을 주시려고 해도 주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공동체처럼 한마음, 한 뜻의 완성된 공동체가 되려면 하나가 되고픈 마음이 우선 각자에게 있어야 하고 또 그 마음이 모아져야 하는데, 모여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도 모여 있었습니다.
실망하고 모두 흩어졌을 수도 있었는데 모여 있었던 것이고,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평화를 주시고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숨을 불어넣어 주실 때 그걸을 같이 들여마신 것을 오늘 바오로 사도는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숨을 들이키는 것이 아오스딩 성인의 말대로 바로 기도인데, 우리의 들숨이 성령을 마시고 날숨이 악령을 내쫓는 것이 되어야 하고, 제자들처럼 같이 성령을 받아 마시는 것이 공동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할 때 맨손 체조로 하루를 시작하고 체조의 마지막 동작이 숨쉬기인데 그때 앞에서 구령을 부쳐주면 그 구령에 따라 같이 숨을 들이키고 내쉽니다.
이 숨쉬기의 구령을 주님께서 부쳐주시고, 그 구령에 따라 성령의 들숨과 나숨을 쉬는 우리 공동체가 되고 우리의 공동 기도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바람을 가져보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 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 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불로 표상 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 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 만큼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힘과 능력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야훼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 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 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 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 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 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 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 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끌리또(paraclèto)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요한 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리 하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 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 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공동 소유로 내놓고 나눔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갈라 3,28)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 더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시지 못하십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미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시도록 그 장을 만들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함을 회복하십시오.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성령께서는 당신 은총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고 모든 부분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 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 하소서."
'성령칠은' 카드를 뽑겠습니다.
간략하게 그 은사를 설명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는 참으로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11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개인 성화를 위해 베푸시는 은혜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이밖에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합니다.
1) 슬기 (지혜)
하느님과 하느님께 관한 것들을 올바로 판단하고, 맛들이고, 실천하도록 돕는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며,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아무리 큰 꿈과 희망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2) 통달 (깨달음, 이해)
하느님 계시진리를 깊이 통찰하여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은혜입니다.
성경의 의미, 전례의 의미 등 숨은 뜻을 알게 됩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감동을 얻게 되고 기쁨을 차지하게 됩니다.
3) 의견 (일깨움)
마땅히 해야 할 것,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자기 분수를 알며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의 역할이 있고,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고유 역할이 있습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하게 하는 은사입니다.
4) 지식 (앎)
영원한 생명, 피조물에 대해서 올바로 판단하는 습성입니다.
믿어야 할 진리, 믿지 말아야 할 거짓에 대해서 확실히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연장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분명히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주관하심을 알고 그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는 것이 병’일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5) 굳셈 (용기)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신뢰를 지니고 덕을 실천하도록 성령께서 영혼에게 주시는 힘입니다.
“끝까지 참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지키셔서 복되십니다.
‘초장에 초싹, 파장에 파싹’이라고 하나요?
한번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6) 공경 (받듦, 섬김, 효경)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자녀다운 사랑과 모든 인간 안에 보편적 사랑의 정을 담아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삽니까? 데리고 삽니까?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7) 두려워함 (경외)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죄를 피하는 은혜입니다.
무서움과는 다릅니다.
벌 받을 것에 대한 무서움이 아니라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감각적인 절제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저절로 되지 않으면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전도연은 아들이 유괴되어 잃고 신앙을 가지고 용서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교도소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며 편안해하는 그를 보면서 분노를 삭이지 못합니다.
교회도 나가지 않고 교회에 돌을 던지고 자해까지 시도합니다.
이 영화는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면서도 과연 진정한 용서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왜 전도연은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진정한 용서가 되지 않았을까요?
성령을 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용서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힘이 들면 언젠가는 포기하게 됩니다.
전도연이 진정 기도하여 성령의 힘으로 용서하였다면 상대가 용서받았다고 해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이렇게 힘든데 가해자가 힘들지 않다고 말하니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 가운데 특별히 ‘용서’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이는 분명 교회에 성령의 힘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내려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용서에서도 성령의 힘이 작용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내가 하는 용서와 성령의 힘으로 하는 용서의 차이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하는 용서와 내가 하는 용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령은 불가능한 일까지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한 용서를 하려는 이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트레이 랠포드가 선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2015년에 피자 배달하던 22살 청년 살라후딘 지트무드를 무참히 살해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재판정에서 학교 교장이자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인 희생자 아버지 솜밧 지트무드가 아들을 죽인 살인자에게 증언합니다.
“트레이 알렉산더 랠포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어서요.
내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선량한 시민으로 자라도록 아들을 도운 것처럼요.
살라후딘이 여기 있었다면, 살아 있었다면, 당신을 용서했을 겁니다.
그게 아들의 방식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아들을 해쳤다고 해서요.
나는 악마에게 화가 납니다. 악마를 탓합니다. 당신을 잘못 이끌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인도했으니까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걸 꼭 알아주세요.”
트레이는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것입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말을 이어갑니다.
“아들과 아내를 대신해 당신을 용서합니다. ”
한 인터뷰에서 지트무드는 아직도 아들이 죽은 악몽을 계속 꾼다면 힘들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가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 때문임을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화가 나지 않지만, 저 자신을 탓합니다. 보호해주지 못해서요.
목이 완전히 잘려 나갔어요.
끝없이 슬퍼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죽인 그 남자를 여전히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인생에 우연이란 없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죠.
‘아들은 22세에 죽는 걸로 적혀 있구나.’
알라신이 아들에게 멋진 22년 인생을 내려줘서 감사하다고 느꼈습니다.”
믿음엔 이미 성령의 힘이 작용합니다.
저는 타 종교 안에서도 성령 강림이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위험한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솜밧 지트무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또 무너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자기 아들을 저렇게 무참히 살해한 살인자를 용서하였다면 그것은 성령의 힘입니다.
그가 믿는 종교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또 다른 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해주시는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안아줍니다.
눈물을 닦으라고 수건도 줍니다.
성령으로 하는 용서의 특징은 나의 용서가 힘들지 않기에 상대와 함께 있는 것도 힘들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자기 아들을 죽인 이를 용서한 것은 분명 내 힘으로 한 용서입니다.
비록 그리스도를 믿어도 성령의 힘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며 사는 게 싫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용서입니다.
이 용서에는 힘이 없습니다.
상대를 보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한 용서는 상대와 함께 머물고 싶습니다.
원수를 보는 것이 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바자는 술을 마시다 총기가 오발로 발사되어 절친 도널드 로렌트를 사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죄를 뉘우치며 도널드의 가족이 원하면 평생을 감옥에서 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널드의 부모는 오히려 그의 가석방을 추진하고 그가 나왔을 때를 대비하여 숙소와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면 상대를 보는 것이 매우 괴롭습니다.
하지만 도널드의 부모는 자기 아들을 죽인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오히려 그렇게 용서할 수 있게 만든 힘이 자신들 안에 있음을 되새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정원 씨의 용서도 성령으로 한 용서입니다.
고정원 씨는 유영철을 만나려 했고 유영철을 통해 성령의 힘을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영철을 자기 양자로 삼았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은인으로 여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용서로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나를 위한 내 힘으로 하는 용서여야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위한 주님 힘을 통한 용서여야겠습니까?
성령 강림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용서를 통해 성령을 체험하라고.
마리아 고레티는 자신을 찌른 사람과 천국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성령의 은총을 받게 한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 때문에 그를 용서하는 게 힘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힘들면 안 됩니다.
성령의 힘으로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만 성령을 받으려는 노력은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도’입니다.
제가 보좌 신부 때 한 자매는 일주일 동안 한 시간씩 성당에 앉아 있는 노력을 했는데 바람 나서 나간 남편이 용서되었고, 다른 자매는 일 년 동안 그렇게 했더니 남편이 미워 보이지 않고 불쌍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들어오면 이전처럼 남편을 잘 대해줍니다.
아직도 바람을 피우고 있지만 그를 보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힘으로 하는 용서입니다.
내가 용서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힘들지 않을 때까지 성당에 앉아 있으십시오.
주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 무슨 일을 합니까?
다만 나무에 붙어있는 노력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성령강림이 일어납니다.
성령강림이 일어나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는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맺힙니다.
성령께서는 하려고는 하되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는 이에게 오십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과연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당신의 협조자이자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거듭 약속하시는데, 그 이유는 명료합니다.
자녀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요?
아직도 어리고 연약한 자녀들에 대한 근심 걱정, 노심초사의 결과, 자신을 대신할 성령을 우리의 보호자로 지명하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시기까지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① 폭풍 속에서도 평화로이 살아가도록
예수님께서는 산더미처럼 높은 파도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겁에 질린 제자들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그 한 가운데에서도, 뱃고물을 배게 삼아 태평스럽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당신 내면 깊숙이 성령께서 자리잡고 계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우리 역시 성령과 함께라면 높은 시련의 파도와 고통의 풍랑 그 한가운데서도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동체를 위한 공동선을 실천하도록
주님의 성령께서는 우리 인간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선물로 주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1코린토 12장 8~10절)
성령의 은사는 그뿐이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는 고통을 잘 이겨내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따뜻이 위로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실패 속에서도 희망할 수 있는 은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렇듯이 성령을 통하여 다양한 은총의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유는 다른 무엇에 앞서 공동선을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아무리 특별하고 대단한 은사가 주어졌다 할지라도 결코 우쭐거려서는 안되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신 선물에 깊이 감사드리며, 그 성령의 선물을 이웃과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내어놓아야 하겠습니다.
③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식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도록
때로 우리 인간 공동체는 연구대상입니다.
나치즘처럼 집단 전체가 함께 광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름 배웠다는 집단들 역시 그릇된 판단으로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지혜로움이요 식별력입니다.
무엇이 더 본질적인 것인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무엇이 진정 인간다운 것인지, 항상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결정할 수 있는 식별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식별력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또다시 맞이한 성령강림대축일,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과연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 은사가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 않고 발휘되지 않았다면 늦게라도 그 작업을 시작해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성령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마음의 평화와 천상 지혜와 식별력으로 무장하여 힘들어하는 이웃들에게 우리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은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 강림>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1)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은 유대인들이(박해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습니다(요한 20,19).
그랬던 그들이 성령을 받은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담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박해자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다 위대하고 용감한 선교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그대로 실행된 일입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마태 10,26ㄱ.27)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내린 일의 첫 번째 목적은 ‘복음 선포’입니다.
그리고 ‘복음 선포’의 목적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가 내린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2)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서 모두 위대하고 용감한 선교사가 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용기를 내서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성령께서 도와주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받는 일은 사람이 로봇처럼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용기를 낸 일, 사람들 앞에 선 일, 복음을 선포한 일은 제자들이 능동적으로 한 일입니다.)
그들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성령을 받지 못하고, 믿음이 있어도 아무것도 안 하면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3)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다음 약속이 이루어진 일입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루카 21,15)
이 말씀에서 ‘언변’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인간적인 말재주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증언할 때 그 증언에 힘을 실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표징이 나타날 수도 있고(마르 16,20), 증언의 설득력을 높이는 어떤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은 더 깊은 믿음과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인간적인 말재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또 ‘삶으로’ 하는 일입니다.
4)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표현으로는, ‘배운 적 없는’(또는 ‘사용한 적 없는’) 외국어로 복음을 선포했다는 뜻인데, 당시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사도들에게 내렸지만, ‘말씀의 은혜’는 복음 선포를 들은 사람들에게 내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내린 ‘성령의 은사’는 그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내린다고 해도, 그 은혜는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받게 됩니다.
성령 강림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사도들의 복음 선포와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들었지만, 놀라기만 하면서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고, 그날 세례를 받은 삼천 명만 그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사도 2,4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1-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첫 선물은(은총은) ‘평화’입니다.
그런데 무슨 물건을 주고받듯이 평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지시는 ‘복음 선포’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지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지시도 복음 선포입니다(마르 16,15).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이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의 목적은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두 번째 선물은 ‘성령’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고, 오순절 때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선포하라는 지시입니다(루카 24,47).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한 채로(구원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용서를(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복음 선포를 하지 않아서 복음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교회와 신앙인들의 잘못이고, 주님께서는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오소서 성령님! 성령을 받아라! - 성령이 희망이자 답이다>
6월 5일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자 환경의 날입니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는 환경의 날을 맞아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주제의 담화문을 통해,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답은 우리 인간의 자발적이자 적극적인 한결같은 응답의 노력이자 실천이요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방금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오소서 은총 주님, 오소서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에 이어지는 참 감미롭고 은혜로운 부속가인 성령송가를 노래했습니다.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도 은혜로웠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마침 성가책을 펼쳐 성령에 관한 성가를 모조리 살펴 봤습니다.
거의 모든 성가가 “오소서,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령이요”로 시작되는 가사였습니다.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성령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이 바로 희망이자 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성령을 받아라” 말씀하시며 성령을 주십니다.
루카복음에서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대목(루카 11,9-13)의 말미에서도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루카11,13)
루카 복음 사가에게 성령은 좋은 것, 하느님의 은혜 그 자체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길 좋아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특징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 성령님의 선물입니다.
매일 강론을 보내달라 청하는 어느 겸손한 '성령의 사제'가 어제 보내준 답글도 감동입니다.
이런 겸손 역시 성령의 선물입니다.
내용이 참 아름다워 소개합니다.
"참행복은, 영원한 행복은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에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의 여정은 주님과의 우정을 쌓으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신부님, 부활시기 막바지, 빛을 세상에 뿌려주시네요!"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우리 함께 하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정말 '신의 한 수' 같은 성령의 선물들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역시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런 자각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정말 살 줄 알면 행복이요 살 줄 몰라 불행이란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인간의 고질적 영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이 궁극의 희망이자 답입니다.
어제 복음 나눔중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공동체적(共同體的)이라는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너와 함께 단수가 아니라 너희와 함께 복수입니다.
함께 모인 제자공동체에 평화를 선물하시는 주님은 이어, “성령을 받아라!” 역시 함께 모인 제자공동체에 성령을 선물하십니다.
더불어의 여정에 더불어의 성령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로 현존하시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에 모인 당신 제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성령을 선물하십니다.
이제 응답의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있음을 봅니다.
주님께서 모두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우선 떠오른 '벽이 변하여 문으로'라는 말마디입니다.
주간 첫날 저녁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뀌는 기적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성령의 선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주님의 선물,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 말씀을 근거로 몇가지 성령의 선물을 소개합니다.
첫째, 소통의 선물입니다.
바로 성령의 선물이 소통입니다.
소통의 반대가 불통입니다.
불통에서 모든 병도 생깁니다.
육신의 경우도 호흡기, 순환기, 소화기 등 모두가 잘 통해야 건강이지 막혀 불통일 때 온갖 병이듯 영혼도 공동체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오순절날 성령강림의 선물과 더불어 각양각색 불통의 사람들이 하나로 통하지 않습니까!
창세기 바벨탑 사건 이후 불통으로 산산히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로 통하는 소통의 시대, 성령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숙원 사업이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이뤄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며 인내해온 하느님이신지요!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말로 들으며 소통하니 참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제가 들은 이와 흡사한 두 예화도 생각납니다.
프랑스에 유학중인 어느 자매의 노모가 한동안 와서 딸과 함께 지내는데 프랑스말은 하나도 모르는 노모가 날마다 이웃집 프랑스 노인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하며 그 유학중인 자매에겐 영원한 불가사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느 형제가 노모를 모시고 인도를 순례하던 중 힌두어를 하나도 모르는 자기 노모가 어느 힌두 노인의 사정 이야기를 오랫동안 듣고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여 후에 물으니, 그 노모는 “얘, 그분도 나처럼 고생 많이 한 것 같더라.”라고 답하더라는 것입니다.
분명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성령이 주신 소통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일치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 일치입니다.
일치의 반대는 분열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마음이 갈리는 내적 분열입니다.
공동체의 고질적 어려움도 내적 분열입니다.
사실 대부분 공동체나 나라도 외부의 침입보다는 내적 분열과 부패로 망했습니다.
참으로 내적으로 다양성의 일치를 이룬 공동체는 아무리 약하고 작아도 누구도 다치지 못합니다.
참 아름다운 것이 다양성의 일치와 조화입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평생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가 되어 전우애, 학우애, 형제애로 일치를 이룬 주님의 공동체는 얼마나 견고하고 아름답겠는지요!
언젠가 자기 남편을 전우(戰友)라 하며 영적(靈的) 전우애를 과시하던 자매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악마가 즐겨하는 것이 이런 분열이라면 성령의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일치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 바오로가 일치의 성령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형제 여러분,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공동체의 일치는 순전히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각에서 비로소 감사요 겸손입니다.
자랑할 것은 내가 아니라 나에게 은사를 주신 성령님임을 깨달으니 겸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여기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정주의 수도생활을 하면서 형제들을 통해 깨닫는 진리입니다.
그 많은 좋은 장점과 업적을 냈어도 도대체 자랑하기는커녕 장점이나 업적도 모르거나 잊고 지내니 정말 이것이 놀라운 겸손입니다.
완전히 겸손이 생활화된 것이요 몸에 밴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인 겸손이 공동체의 일치를 견고히 합니다.
정말 무섭고 두려운 것이 분열입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얼마나 분열과 극단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인지요!
이념에, 종교에 중독되어 광신(狂信)이 되면 답이 없습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런 경우 진정 회개가 참 절실합니다.
바로 이런 분열을 치유할 최고의 처방은 겸허히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을 모시는 일뿐이겠습니다.
분열 상처의 힐링에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셋째, 평화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우선적 공동체적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평화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짧은 복음에 연거푸 두 번이나 나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니 평화에 뒤따른 기쁨의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그대로 이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당신 제자들처럼 주님의 '평화의 사도'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창세기의 창조로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하시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의 은총이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새삼 용서 역시 평화와 기쁨에 이어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듯 성령의 선물에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성령께 마음을 여는 것이, 성령께 나를 온전히 내 맡기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인 지혜인지 깨닫습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비울 때 존재의 빈터에 가득한 성령입니다.
텅빈 허무을 텅빈 충만으로 바꿔주는 성령의 사랑입니다.
제가 요즘 절실히 깨닫는 것이 삶은 선물이자 동시에 과제요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도, 생명도, 사랑도, 희망도, 행복도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과제요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탓하거나 원망할 수 없습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좌절하거나 낙심할 것이 아니라 매일 선택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이런 선물을 기꺼이 선택하여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하는 것이야 말로 지혜중의 지혜요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선물인 소통도, 일치도, 평화도 끊임없이 깨어 선택해 공부해야 하고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배움에 있어서 영원한 초보자이며, 훈련에서는 영원한 훈련병일 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기쁨으로 지내온 50일간의 부활 시기는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로 막을 내립니다.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오순절 체험을 이야기하고, 제2독서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하느님 백성으로 새롭게 탄생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은 세상 창조 때 성부 하느님께서 하셨듯,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는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미사 때 듣게 되는 성경 구절들을 잘 귀기울여 듣다 보면 '가득'이라는 말씀이 자주 반복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채운 주님의 영(입당송), 온 집안을 가득 채운 성령의 현존(제1독서), 성령으로 가득 찬 제자들(제1독서), 온 세상이 당신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하다는 시편 저자의 고백(화답송), 우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워달라는 청원(복음환호송),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영성체송까지...
이 말씀들에 머무르며 온 세상 만물, 공기와 사물, 사람, 모든 존재를 가득 채우고 계신 성령께 머무릅니다.
과연 온누리는 성령과 함께 새로워지고 기쁨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 곁을 떠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시고, 그렇게 오신 보호자, 주님의 영께서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 온 누리 어디든 현존하시고, 무엇이든 가르치시며, 만물을 지탱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2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의 숨이 그분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옵니다.
숨이 곧 영입니다.
진리의 영, 사랑의 영, 평화의 영, 용서의 영...
그분 육신과 존재 안을 내밀하게 채워 흐르던 숨이 고스란히 내게로 흘러들어와 나를 채웁니다.
나의 것이 됩니다.
숨을 나누어 받는 것은 호흡을 주고 받는 것이고, 생명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랑은 이처럼 근원적이고 절실합니다.
숨이 곧 생명이니까요.
주님께서 내게 숨을 불어넣을 때 그 거룩하고 복되고 선한 숨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이려면 나의 내부가 가능한 최대로 비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비운 만큼 주님의 숨결, 주님의 영이 가득 채워질 수 있으니까요.
그분으로 가득 찬 여기에 지금 "우리가 있습니다!"
'가득'이란 말씀에서 성령의 속성을 봅니다.
가득 찼다는 건 빈 곳이 없다는 뜻이지요.
온전함을 가리킵니다.
일부만, 절반만, 거의... 처럼 부분적으로 점유된 상태가 아니라, 그야말로 통째로, 싸그리(몽땅), 남김 없이 채운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성령과 함께 주신 '평화'(요한 20,19)에도 적당선은 없습니다.
조금만 평화롭게 살자든가 약간 평화롭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평화는 성령의 속성처럼 온전해야 하고 가득 채워야 평화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령과 함께 주신 '용서'의 권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쯤 용서한다든가 조금만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는 그 자체로 온전히 베풀어져야 하고, 한 존재를 해방과 감사의 영으로 가득 채우는 힘입니다.
"새로움", "사랑의 불", "기쁨"...
이처럼 다양한 성령의 자취는 선하고 진실되고 아름다우며 복됩니다.
'성령'에 힘입어 '성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1코린 12,3 참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우리가 성령을 통해 얻은 은사와 직분과 활동이 '공동선을 위한'(1코린 12,11)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이는 그 숨결이 내게 불어넣어지기 전에 거쳐 온 모든 이웃, 모든 피조물, 온 누리의 기쁨과 행복은 물론 고통과 슬픔에도 함께 감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온 존재가 이미 한 성령의 숨결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현실에는 처절한 비극과 고통어린 절규, 집단 이기주의적 정치 다툼이 여전한데도 온 우주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 사랑의 기운이 나의 세포 속속들이 머금어지는 것은 놀라운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부족한 나에게도 오시는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께서 내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기를, 그 불이 온전히 나를 차지하시기를 함께 청합시다.
용서와 화해와 치유가 필요한 곳으로 흘러드는 새 창조의 숨이신 성령께서 나와 모든 이웃, 모든 피조물, 온 누리를 사랑의 끈으로 이어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특별한 은사가 벗님을 가득 채워주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교회의 생일이요 우리 모두의 생일인 오늘 기쁨 가운데 축하드립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뉴욕에서 뉴저지로 넘어가는 길은 막히기로 유명합니다.
다리는 적은데 넘어가는 차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뉴욕에서 뉴저지로 넘어가는 길에 다리가 100개 정도 있으면 아무런 막힘없이 뉴욕에서 뉴저지로 넘어갈 수 있고,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넘어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뉴욕과 뉴저지의 만남은 지금보다 훨씬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와 앞으로 사용하게 될 양자컴퓨터는 부품이나 기능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다만 연산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합니다.
기존의 컴퓨터는 1과 0으로 연산하지만 양자컴퓨터는 1과 0 그리고 1일 수도 있고 0일 수도 있는 방식으로 연산한다고 합니다.
기존의 컴퓨터가 왕복 2차선이라면 양자컴퓨터는 왕복 50차선이 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컴퓨터로는 계산하기 힘든 것들도 아주 쉽게 계산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양자 컴퓨터가 일상의 생활에 등장한다면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700만 년 전의 인간의 뇌와 2022년 인간의 뇌는 그 기능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뇌는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이 조화를 이루도록 합니다.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을 운동기관이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의 뇌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바로 그런 진화의 방식으로 몇 억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연에 적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양자컴퓨터가 새로운 방식으로 연산하는 것처럼 인간은 연결을 통해서 더 풍요로운 삶을 구축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연결은 언어와 문자였습니다.
언어와 문자는 신화와 전통을 부족과 부족을 넘어 하나로 만들어 줄 수 있었습니다.
언어와 문자는 혁신과 역사를 후손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언어와 문자는 왕복 2차선이던 인간의 역사를 왕복 4차선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언어와 문자는 사상, 문학, 예술, 건축, 종교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인간의 역사에 언어와 문자가 등장하는 것은 농사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고 합니다.
10,000년 동안 언와와 문자의 세계에 의지하던 인간의 역사는 변화의 폭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에 언어와 문자에 버금가는 새로운 혁신이 생겼습니다.
1980년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개인 컴퓨터의 등장과 개인 컴퓨터를 연결해 주는 인터넷의 등장입니다.
이제 왕복 4차선이던 인간의 관계는 왕복 10차선이 넘는 길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생소했던 것들이 지금은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집에서 인터넷 쇼핑을 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결재를 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가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뉴스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30년 후에 우리는 또 다른 혁신의 시대를 보게 되었습니다.
스마트 폰의 등장입니다.
전에는 집에서 하던 검색과 쇼핑을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움직이면서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하는 모바일의 등장입니다.
우리는 장소와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서 이웃과 연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관계는 왕복 10차선에서 왕복 20차선이 넘게 발전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든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합니다.
‘메타버스’의 세상입니다.
이제 인간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넘어서 가상현실의 세상을 눈으로 체험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문자와 언어가 인류의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개인컴퓨터와 인터넷이 인류를 검색의 시대로 만들었습니다.
스마트폰이 모바일의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메타버스의 시대를 시작하려 합니다.
2000년 전 교회는 성령의 강림으로 신앙의 인터넷 시대를 체험했습니다.
신앙의 모바일 시대를 체험했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는 신앙의 메타버스를 체험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해 줍니다.
성령은 절망은 희망으로, 분노는 용서로,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오해는 이해로, 욕망은 겸손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오소서 은총 주님,
오소서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습니다.
전국대회에서도 늘 좋은 성적을 거뒀기에 자주 응원하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응원을 열심히 하면 멋진 플레이도 많이 나오고, 또 승리할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분명히 실력이 더 중요할 텐데, 응원으로 더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반의 야구부원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응원하면 정말로 힘이 나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편의 응원이 더 크고, 야유가 쏟아지면 괜히 화가 많이 나고 실수도 잦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분명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 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 편이 없고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고 있다고만 생각되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응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응원이 꼭 경기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친구들과의 관계 안에서, 신앙 공동체 안에서…. 등등.
응원할 곳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말은 어떤 말인가요?
혹시 응원이 아닌 야유의 성격이 더 짙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도 우리를 계속해서 응원하십니다.
실력 발휘를 잘 할 수 있도록,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면서 지켜주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지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위치가 나옵니다.
바로 가운데에 서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가운데 서신다는 것입니다.
계속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멈추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천지창조 때의 인간 창조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을 불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지요.
예수님과 깊은 일치 속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힘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응원하는 주님의 활동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 담긴 이 응원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우리는 결코 주님과 정반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응원에 힘을 얻어,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의 죄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 응원의 힘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응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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