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노년으로 접어들면 가장 많이 부딪히는 문제가 노화현상으로 나타나는 몸의 쇠잔함이다. 당사자는 질병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인생의 긴 여정을 끝내고, 이제는 또다른 준비를 해야하는데, 몸의 쇠약해짐을 느끼면 불안이 엄습한다. 건강 공포증이다. 모든 사람이 갖는다고 하지만, 개개인에게는 심각한 문제이고, 대처하는 방법도 각각이다. 하재열도 이 문제와 맞닥뜨린다. 그가 대처하는 방법이 바로 그의 수필세계를 이룬다.
이 수필은 인생의 변곡점을 보내는 하재열이 어떻게 풀어나가는가를 보여준다. 여름을 보내면서 아내가 입원한다. 입원을 계기로 아내와의 애정을 확인하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여기에 딸과 아들 이야기도 곁들이면서 가족 간의 화목함을 내비친다. 하재열의 수필에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가 많다. 손자와의 시간을 보낸 이야기도 있다. 말하자면 그는 가족을 아우르는 가족중심적인 생활태도를 보여준다. 가족애적인 따스함이 그의 수필세계를 이룬다.
인생의 한 시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야 하는 변곡점인, 은퇴하고 노년기로 들어가는 시기는 여러 면에서 복잡한 시기이다. 앞에서 말한 건강 문제와 더불어 가족 간의 갈등이 표출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황혼이혼이 많아지는 이유라고 한다. 그러나 하재열은 아내의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만 가족 간의 따뜻함으로 극복한다. 결실의 계절인 시월이 손짓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은퇴를 하고 노후 생활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하재열은 은퇴하고 보낼 노후 생활의 계획표를 미리 만들어 둔 듯하다. 그의 계획표에는 수필쓰기, 산행, 집 주변의 산책 등이다.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점이라면 그의 계획표에 그림 그리기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림 그리기는 수필쓰기와는 조금 다르다.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동호회에 나가서 전시회까지 참여하였다. 수필 못지 않은 열정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노후를 보내는 계획표에 올라와 있는 또 하나는 산행이다. 산으로 간다는 것은 성품이 매우 감성적이다 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산의 풍광은 나무와 바위, 그리고 꽃이 있기 때문에 속된 인간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즐겨 찾기 때문이다.
‘봄꽃 하나 붙들려 했는데’에서 꽃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 것은 산행과 같은 맥락으로 읽어진다. ‘산성의 봄’은 가산산성에 올랐던 이야기이다. 대구 사람이 많이 찾는 산행로이기도 하다. 그는 산성을 쌓은 역사적 사실을 짚어보았다. 그렇더라도 노후에 산행을 좋아하여 산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새재엔 비가 내리고’도 산행과 문경 새재의 역사적 뒷 이야기를 함께 담았다. 일반적으로 수필에서 역사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독자에게 가르치려는 느낌을 주어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마치 누더기처럼 덧붙였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하재열 방식의 역사 이야기도 괜찮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불일암에서’도 기본적으로는 산행 이야기로 읽었다.
일반적으로 산행 이야기를 쓴 수필을 보면, 나무와 바위와 꽃을 중심으로 풍광 이야기만을 주로 하였음으로 작가에 따른 차이점을 별로 느끼지 못하였는데, 하재열은 자기의 색깔을 입혀서 표현하였다는 생각이다.
그는 집 주변의 공원에서 산책하는 내용의 글도 많다. 산책을 할 동안에는 많은 생각을 한다고 하니, 그래선지 좋은 수필이 많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노후 생활을, 그림을 그리고 수필도 쓰면서 보낸다. 절기를 따라 산행도 하고, 공원 산책도 하면서 보낸다. 그의 산행 이야기를 쓴 수필 한 편을 보기로 하자.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서너 걸음 옆 의자에 앉은 여자가 내게 물었다. 자주 오르는 산길 중간쯤 그늘 깊은 참나무 아래다. 바람에 일렁이는 연초록 숲이 발정난 것처럼 봄냄새를 쏟아낸다. 옆에서 나를 자꾸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던 차였다. 육십은 넘어 보이는데 간식을 먹으려는지 배낭을 풀고 있었다. 얼떨결에 고맙다는 말부터 해버렸다.
산에서 이따금 커피 한잔 받아들 때가 있고, 막걸릿잔도 건너올 때가 있다. 혼자인 내 얼굴이 말라 보였거나, 옆에 사람을 두고 음식 먹는 걸 켕겨 하는 우리 습속 때문이라 여기면서 눈치도 없이 고맙다는 말과 바꾸곤 한다. 주로 젊은 짝들이나 무리로 왁자한 사람들로부터 받는 호의였지만, 혼자인 여자로부터 권해 받는 것은 생경하다.
“홍차를 탔습니다.” 종이컵을 내밀면서 엷은 웃음을 띤다. 커피보다 이게 아저씨에게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인다. 초면에 내 몸 걱정도 담았다는 뜻이니 눈길이 달리 간다. 얼굴에 검버섯이 나 있지만 희고 맑다. 긴 모자챙 사이로 흰머리가 날린다. 다시 짐을 헤치더니 산 아래에서 사 들고 온 떡이라며 권한다. 나도 가져온 게 있다며 사양을 해도 혼자 다 먹지 못한다면 내미는 것이 억지스럽다. 또 건네받기가 미안해 내가 그쪽으로 움직인 사이 쉴 곳을 찾던 사람들이 내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어물거리다가 그 여자와 둘이서 배낭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강낭콩이 먹음직하게 박힌 개떡이었다. 반을 뚝 잘라 비닐봉지에 넣어 건넨다.
“아저씨는 왜 혼자 왔어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날 말을 찾으려 애쓰는데 어설픈 침묵을 깨고 도발하듯이 묻는다.
“혼자 잘 다닙니다. 그래야 바람 소리, 새 소리도 제대로 듣지요.”
“아주머니는 왜 혼잔데요.”
“친구들에게 연락해 봤는데 다 볼 일이 있다고 해서 혼자 와봤서예.”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자식이 셋인데 잘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이며 웃는 웃음이 허해 보인다. 조금 전 오던 길에 젊은 남자가 작업을 거는 것 같아 피했다는 말도 내놓는다. 엉뚱하다 싶어 갑자기 의문스러워진다. 넘는 말투에다 ‘작업 건다’라는 말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시중의 점잖지 않은 입에서 담아내는 말이어서 혹시나 싶었다. 산에서 남자에게 접근한다는 여자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이 산은 지하철 종점에서 붙은 곳이라 백수들이 많이 찾는다. 생긴 분위기로 보아 그렇지 않으련만, 말이 많을 것 같아 잘 먹겠다는 인사를 건네고는 일어섰다. 때마침 자리가 생겼다며 앉으려던 일행의 한 명이 내 등을 친다. 옛 직장 동료였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었다. 엉거주춤 서 있는 내 옆 여자에게 “사모님 되십니까?” 하며 꾸벅 절을 한다. 이런 일이 싶었다. 설명하고도 말고도 없이 사모님이 되어버렸다. 자리를 같이 떴다.
“아저씨, 몇인데요?”
일이 묘하다 싶은데 캐묻듯 하는 말이 직구처럼 날아온다.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여자에게 나이를 바로 대는 게 뭐하기도 해서 소띠라고 했더니 토끼띠라고 응수해 왔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이지만 많이 젊어 보인다. 같이 오기로 했다가 못 온 친구 이야기며, 멀리 사는 딸 이야기를 흉처럼 꺼낸다. 사람들과 내왕이 뜸해지니 혼자 외롭다고 했다. 내밀해야 할 말이건만 거리낌 없으니 의문표가 더해진다. 마신 홍차는 괜찮은가 싶어 배를 눌러 보았다.
오르막길이다.
“아저씨, 아까부터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았는데요.”
뒤처지기를 바라며 속도를 높이는데 숨가쁘게 따라오며 하는 말이다. 다시 힐금거리며 뜯어보았지만 낯선 얼굴이다. 서먹함을 감추려는 괜한 말인지, 수작을 걸어보려는 말인지를 헤아리며 듣고만 있었다.
“아저씨는 배도 안 나왔고 홀쭉해서 걸음도 잘 걸으시네요. 너무 좋아 보입니다.”
“아주머니 얼굴 참 곱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발림 같은 말을 걸기에 곱다는 말로 대답하니 키득 웃었다. 언변이 직설적이어서 만약에 남자를 호릴 그런 여자라면 하수라는 생각이 들다가 혹시 무녀리는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을 끈다. 고개 하나를 다 넘어가는데 산 아래로 빠져나가는 지름길이 없느냐고 묻는다. 여자의 보폭에 맞춘 느린 걸음이 되레 힘이 들던 때라 잘 되었다 싶었다. 왜 그럴까 싶으면서도 지름길을 찾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이윽고 갈림길에서 팻말을 가리키니 정작 머뭇거린다. 이 길이 맞느냐며 시간을 끌 듯 나를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내려갔다. 또 한 번 뒤돌아보고는 숲으로 사라졌다. 다시 오르막길이다. 뒤에 따라오던 한 장년이 “저 길은 좁고 호젓해 여자 혼자 가기에는 좀 그런데요” 하며 지나간다. 일행으로 보였는지 의아스럽다는 어감도 섞였다. 나도 한 번도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아차! 싶었지만 따라가 부를 수도 없는 일, 내가 잘되었다고 여겼듯이 목석 같았을 내가 별 볼 일 없는 남자로 보여 내려갔을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휘적휘적 혼자다. 다시 찾은 내 걸음이 시원했다.
늘 쉬던 장소에서 점심을 꺼내서 먹고 있는데 다시 만난 직장 동료가 사모님은 어쩌고 혼자냐고 묻는다. 그 일행도 짐을 푼다. 산에서 만난다면 다 사모님이냐고 했더니 모두 한바탕 웃었다. 받은 떡을 한 조각 떼고 넘겼더니 차반이냐며 또 껄껄댔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다’는 여자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누구나 겪는 풋풋한 삶의 말이 유혹의 끈일지를 셈해야 하는 일을 씁쓸해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아무래도 내가 아는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나도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냥 지나치면서도 궁금증의 여운이 남는 일이 여러 번이었다.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말을 건네고 싶은 사람이 있다. 더구나 남녀 간이라면 막힌 기억을 풀어보려 더 애를 쓰기도 한다. 상, 하행으로 교차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트에서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사람이 본 듯도 하여 멀어지면서도 서로 고개를 돌려 좇아보던 일이 있었다. 그쪽은 엷은 웃음도 짓는 것도 같았다. 끝내 기억해내지 못한 그 여자가 며칠이나 나를 붙들었다. 만남의 인연을 숱하게 얽혀있겠지만 기억이 까마득한 것은 전생의 연이어서 그러려니 싶고, 이생의 연이라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게 좋겠다는 하늘의 섭리가 아니려나 여긴다.
갈림길에서 떠난 그 여자에게 나는 무슨 인연으로 본 듯한 사람이 되었을까. 몇 마디 언어의 불편함만으로 선뜻 산을 배회하는 그런 여자로 예단한 것 같아 미안해진다. 머뭇거리며 뒤돌아보던 그녀의 눈빛에서 아니라는 기운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능선으로 몰려가는 송홧가루처럼 기억의 편린들이 날리기만 한다. 주말에 자주 이 산을 찾는다고 한 내 말을 그 여자가 새겨들었을까 싶어진다.
(201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