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급성 백혈병) 투병 팔백아흔일곱(897) 번째 날 편지, 4 (이슈-issue, 정치) - 2023년 2월 21일 월요일
사랑하는 큰아들에게
2023년 2월 20일 월요일이란다.
유언장이란 일상에서 떠올리기엔 낯선 단어지만, 죽음 이후를 고민하기에 이른 때는 없고, 특히 비혼이라면, 죽음 뒤에도 자신답게 기억되고, 영향을 미치기 위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한데, 가족구성권연구소가 2009년 발행한 <‘비정상’ 가족들의 ‘비범한’ 미래기획: 찬란한 유언장>에서는 유언장의 의미를 살펴보자구나.
사랑하는 큰아들아
“유언장은 죽음 뒤 발자취를 본인 스스로가 결정하는 중요한 문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정상 가족제도 때문에 차별받고, 혼란스러워하는 정상 가족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은 구성원의 죽음에 직면할 시에 장례 절차뿐만 아니라, 상속문제 등 여러 문제에서 혈연가족이 아니라는 것으로 배제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유언을 통해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소개한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작년 가을, 낙엽 지는 수목원에서 사목(死木) 여러 그루를 보고, 죽은 나무 또한 탄소를 저장하거나 작은 생명체에게 보금자리가 되는 등 숲의 일원으로서 삶을 이어간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도 유언장을 써둬야 하지 않을까?”라고 친구가 말했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우리는 막연한 고민을 구체화해주는 도구이자 그 자체로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를 써보기로 했고, 변호사 한 분을 모시고, 사람들을 모아 집에서 작은 워크숍을 열고, 빵과 과일, 따뜻한 차를 두고 앉아 워크숍에 참여한 이유를 나누고, 유언장의 구조, 효력 발생의 조건과 한계에 대한 강의를 들은 뒤 거실과 부엌 여기저기 흩어져서 각자의 유언장을 적었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가장 먼저 작고 귀여운 재산 목록을 만들었고, 다음으로 생전의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기억하는 사람 중 이 고생스러운 일을 기꺼이 맡아줄 사람을 유언을 집행해줄 사람으로 같이 사는 친구들 이름을 적었는데, 내 ‘유언집행자’들을 생각하니, 든든했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누군가에겐 쓰레기일 수도, 의미 있을 수도 있는 물건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어떤 것은 개별적으로 또 어떤 것은 포괄적으로 ‘유증’하겠다고 자필로 적소, 원하는 장례 방식도 덧붙여 영정사진이 따로 없을 때 SNS 프로필 사진 중 유언집행자들이 보기에 나은 것으로 써달라 했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장례식장 음식은 비건으로 부탁했고, 주검은 대학병원에 기증했고, 화장 뒤 유골은 영산강에 뿌려지고 싶다고 했는데, 무언가 빠진 듯했는데, 성당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며 생전에 몰랐던 분들의 장례미사에도 참석해봤는데, 그때마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깨달음이 진실처럼 다가왔기 때문에 천주교 장례예식에 따라 미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유언장을 쓰며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하는 거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장 실감 나게 고민하는 시간으로, 내가 맺은 관계를 돌아보며, 무엇을 누구에게 주고,, 누구에게 내 죽음을 알리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건 정말이지 머리 아픈 일이었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우리의 삶이 이어진 만큼 죽음도 서로 이어져 있으니, 자기 자신인 채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행운이 모두에게 주어지길 바라며,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마주한 “끝까지 나답게 살다가 아는 얼굴들 사이에서 죽고 싶다.”라는 문장을 되새긴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유언은 민법에 정한 5가지 방법으로 해야 하는데, 그 외 방법으로 하면 효력이 없다네.
첫째,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입니다.
유언자가 유언장을 직접 작성하고, 작성일 자, 주소, 성명을 직접 쓰고, 마지막으로 도장을 날인하는데, 컴퓨터 출력은 안 되고, 자필증서 유언은 반드시 본인이 직접 수기(手記)로 작성해야 하며, 작성 일자, 주소, 성명, 도장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무효가 되므로, 이런 문제 때문에 자주 법률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네.
둘째, 녹음에 의한 유언입니다.
유언자는 자신의 육성으로 유언의 내용을 말하고, 자신의 성명과 날짜를 말해야 하는데, 녹음에 의한 유언을 할 때는 반드시 증인 이 1명 있어야 하며, 그 증인은 “본 유언은 유언자의 뜻이 정확히 만영 되었 다. 본 증인은 ooo 이다.”라는 내용을 같이 녹음해야 된다네.
셋째, 공증서에 의한 유언입니다.
법률사무소에서도 ‘공증’이라고 표시된 공증인이 있는 곳에 가야하는데, 유언자는 증인 2명을 데리고 가서 공증인 앞에서 유언의 내용을 말로 하면, 공증인이 이를 필기해 공증인과 증인으로부터 확인받은 후 참여자들이 모두 서명날인하는 방식으로, 가장 확실한 유언 방식이라 할 수 있다네..
넷째, 비밀증서에 의한 유언입니다.
유언자는 유언 내용을 기재한 후 이를 밀봉하고, 날인 후 증인 2명이 봉투표면에 일자를 기재하고, 서명 날인을 하는 방식으로, 5일 이내에 공증인이나 법원 서기에게 제출해 그 봉투에 확정일자인을 받아야 한다네.
다섯째, 유언자가 병이 위증할 때 쓰는 방식으로, 2명 이상의 증인을 참석시켜서 유언자는 유언 내용을 말로 하고, 증인 중 1명이 그 유언 내용을 받아쓴 다음 그 유언 내용을 유언자에게 확인시킨 후 관련자들이 서명 날인을 하는 방식인데, 이때는 7일 이내에 가정법원에 그 유언장을 제출해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네..
사랑하는 큰아들아
아무튼, 오늘 오후 편지 여기서 마치니, 오늘 하루도 안전하고, 건강하고, 늘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안녕히…….
2023년 2월 20일 월요일 오후에 혈액암 투병 중인 아빠가
핸드폰에서 들리는 배경음악-[외국곡] Ventures-Jan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