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類의 古典 論語에 對한 小考
石 山 申 恒 烈
“古典은 人類의 永遠한 思想的 遺産이다.
” 古는『옛』것이란 뜻과 동시에 모범이 될 만한 것이란 뜻을 지닌다. 고전은 옛 서적이다. 그러나
그『옛』은 옛 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옛』이라고 해석된다.
孔子가 말한바,
溫故知新은 고전의 의미를 가장 잘 들어낸 말로서 옛것이 옛 것이 아니고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라는 뜻이다.
고전의 생명은 그것이 옛것이라는데 있지 않고 현대에, 아니 만대에 그대로 살아서 우리 사상과 생활을 지배한다는 점에 있다. 인류의 고전에는 인간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남과 대하고,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에 관한 위대한 철학과 윤리를 그 속에서 발견한다.
論語는 孔子의 言行錄이다.
이것은 공자가 스스로 자기 일생을 돌아보고 수양이 높아지는 단계와 인생이 원숙해 가는 과정을 말한 유명한 글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인격, 언행, 생활, 사상을 정성껏 기록해 놓은
萬人의 書요, 曠古無上의 經書이다.
20대에 읽어서 다르고, 30대에 읽어서 다르며, 60대에 읽어서 또한 다른 것으로 인생에 대한 사색과 체험이 달라짐에 따라 전에는 무심히 생각했던 구절이 새로운 감성으로 깊은 의미를 가지고 나타난다. 한 생을 옳게 살기 위한 우리 모두의 必讀書라 여기는 바이다. 西歐의 물질문명이 홍수와 같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우리들의 외적생활은 풍족해지고 여유로워졌지만 내적 생활은 어떠한가, 가정과 사회가 混亂되고 人面獸心 極惡無道한 凶惡犯罪가 속출하고 있어서 세상인심이 凶凶해지니 이것을 법으로 강력히 대처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생활의 근본인 仁, 義, 禮, 智, 信 이 바로 서야 한다.
그러므로 공자의 사상과 생활과 인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仁』이라 할 수 있다.
仁은 곧 남을 사랑하는 것이요, 남을 사랑하는 것은 곧 사람이 사람다운 것이요, 사람의 올바른 길을 의미한다. 仁은 인간사회의 이상이요, 옳은 질서인 것이다. 인간세계는 끊임없이 급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는 과거를 저버리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過去를 受用하는데서 비롯된다고 여겨 고전은 인간다운 참된 삶의 거울로서 人類의 思想的 法典인 것이다. 科學文明의 발달과 최첨단의 情報化로 無限競爭 시대에 접어든 지금 固壘한 思想家 孔子가 무슨 대수냐고 할지 모르나 物質의 豊饒에 反比例하여 더욱 貧困해지고 초라해지는 내면세계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심한 소화불량으로 고통을 받고 있지 아니한가,
論語는 정치와 도덕 사상의 지침서인 동시에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經典인 것이다.
論語의 첫머리는 유명한 三乎롤 시작된다.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悅乎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운 것을 때때로 들추어보는 것도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 정다운 친구들이 먼 데서 찾아와 주니 또한 기쁜 일이 아닌가,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라.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知己와 더불어 친히 사귀면서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學問하는 者 세상의 毁譽褒貶을 超脫할 수 있는 높은 氣槪를 가져야 한다고 공자의 훈계하는 지목이 눈앞에 선연하다.
“德不孤면 必有隣이라”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다. 반드시 알아주는 이가 있는 법이란 뜻이며 이 말은 그의 두터운 인간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다.
“ 巧言令色이 鮮矣仁니라.
” 입에 달콤한 말이나 하고 남 앞에서 阿諂이나 하는 무리들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남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자는 특히 巧言令色하는 阿諂의 徒를 삼가야 하는 것이다. 가난해도 阿諂하지 말고 富해도 驕慢하지 말라, 阿諂은 弱者의 病이라면 驕慢은 强者의 痼疾이다. 아첨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이것이 民主主義의 올바른 人間秩序의 原理인 것이다. 論語에는 민주주의 사회의 對人關係의 옳은 秩序와 態度를 明示한 말이 많다.
“君子는 周而不比하고 小人은 比而不周니라
君子는 和而不同하고 小人은 同而不和니라
君子는 泰而不驕하고 小人은 驕而不泰니라.
” 君子와 小人의 차이는 어디 있느냐하면 君子는 남과 和睦하게 지내되 阿諂하지 않고 小人은 阿諂하되 親하지 않는다. 君子는 남과 和睦하게 지내되 결코 남과 附和雷同하지 않는다. 小人은 남과 附和雷同이나 잘하고 남과 和할 줄 모른다. 君子는 餘裕있지만 驕慢하지 않고 小人은 驕慢할 뿐 餘裕가 없다. 人間秩序의 원리는 和而不同이다. 同而不和가 아니다. 論語에서 周而不比하고 和而不同하고 同而不和하고 泰而不驕한 것이 對人關係의 옳은 原理요, 比而不同하고 同而不和하고 驕而不泰한 것은 그릇된 秩序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간사회의 秩序는 和而不同이다. 同而不和가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君子衿而不爭하며 群而不黨이니라.” 군자는 남과 싸우지 아니하고 여럿이 모이더라도 결코 작당을 하지 않는다.
“君子喩於義하고 小人喩於利하며 見利思義라.” 큰 인물은 義에 밝고 소인은 利에 밝다. 利를 보거든 義를 생각하라. 이 말은 靑史에 빛나는 安重根 의사의 獄中揮毫 見利思義면 見危授命이라. 이 말씀은 이로움에는 의리를 먼저 생각하고 정의로움에 있어서 위기를 당하면 가차 없이 목숨을 주라. 峻嚴하고도 道德的인 節義 정신을 엿볼 수 있지 아니한가. 利權에 있어서 이것이 도덕적으로 위배되지 않고 정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된다는 뜻이리라.
“飯蔬食飮水하고 曲肱而枕之라도 樂亦在其中이니 不義而富且貴는 於我에 如浮雲니라.
” 소찬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베게삼아 사는 간소한 생활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樂이 또한 있는 것이다. 不義한 짓을 해가지고 富貴를 누리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뜬구름과 같다. 富貴가 어찌 만인의 願이 아니리요마는 不義의 방법을 통해서 富貴에 이르는 것은 뜬구름과 같이 虛妄한 짓이라는 것이다.
孔子의 思想과 生活과 人格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仁』이라 할 수 있다.
나 자신이 다스리는 仁의 人이 되고 仁의 生活을 하고 더 나아가서 仁의 社會를 實現하는 것이다.
論語 수천어가 인에서 유래하고 인으로 돌아간다. 인은 공자의 사상이며 예수의 사랑, 석가의 자비, 소크라테스의 아리데(arete : 인간의 도덕)처럼 모두 歸一하는 終局的인 사상은 같다고 하겠다.
“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 예가 아니거든 보지 말고, 예가 아니거든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니거든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거든 動하지 말라. 이것이 공자의 유명한 대답이다.
“仁은 人生 最高의 理想이요 目標이다.”
또 위대한 인물은 殺身成仁 몸을 바치어 仁을 實現한다고 했다. 論語에서 우리는 孔子와 顔淵의 아름다운 師弟愛의 對話를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톤이란 高弟子가 있었듯이 顔淵이란 총명하고 준수한 愛弟子가 있었으니 顔淵은 공자의 대를 이을만한 그릇이었으며 공자가 얼마나 안연의 장래를 촉망하고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다.
“哀公이 問弟子孰爲好學이니잇고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하여 不貳過하더니
不幸短命死矣라 今也則亡하니 未聞好學者也지이다.
” 애공이 공자보고 제자들 중에서 누구가 학문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공자의 대답이 안연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노여운 일이 있어도 남에게 옮기지 아니하고 실수를 두 번 하는 일이 없었는데 불행하게도 단명으로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살아있지 않다. 그 후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듣지 못했다.
또 공자, 顔回(顔淵과 同一人)를 칭찬하여
“子曰 賢哉라 回也여
一簞食(사)와 一瓢飮으로
在陋港을 人不堪其憂어늘
回也不改其樂하니 賢哉라.” 회야여 안연은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이다. 그는 일단사 일표음의 적빈한 생활 속에서 남 같으면 赤貧苦에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지만 안연은 티 없이 처신하니 참으로 슬기로운 자다. 그러나 안회는 불행하게도 가난하여 삼십이세의 젊은 목숨으로 요절하였다. 공자의 슬픔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顔淵이 死커늘 子曰 噫라 天喪予삿다 天喪予삿다.” 안연이 죽으니 공자께서 하늘이 나를 망쳤도다 하늘이 나를 망쳤도다. 두 번 외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을 놓아 통곡했다. 통곡이 그친 뒤에 제자들이 말한다. 선생님께서 이제 통곡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했느냐 내가 顔回를 위해서 통곡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서 통곡 하겠느냐?
“顔淵이 死커늘 子 哭之慟하신데 從子曰 子慟矣사소이다.
曰 有慟乎아
非夫人之爲慟이오
而誰爲리오.
” 안연이 죽으니 공자께서 哭하심을 哀慟해 하시니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너무 애통해 하십니다.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것이 지나침이 있느냐? 이 사람을 위하여 애통하지 아니하고 누구를 위하여 애통해 하리요. 자기 思想과 學問의 後繼者로 指目하고 그 人格과 將來를 한없이 아끼고 囑望했던 高弟子 顔淵을 잃고 하늘이 나를 망쳤다고 목메어 慟哭한 공자였다.
스승이 제자를 사랑하던 정이 이렇듯 두터웠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요, 그 제자에 그 스승이라고나 할까. 만일 顔淵이 오래 살아서 孔子의 사랑과 學問을 繼承하였던들 儒敎는 좀 더 다른 內容과 方向으로 展開하였을지 모른다. 昨今의 世態에서 師弟之間의 無禮함을 目前에서 보면서 어떤 느낌으로 여길 것인가, 이는 人間秩序 基本이 되는 道德性의 缺如로 나타나는 부작용임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孔子는 참으로 學을 좋아한 분이었다.
論語 첫머리가
"學而時習之 不亦樂乎로서 시작한다.
學은 곧 行이요, 行은 곧 學이었다. 學行一致할 때 참된 學이라 할 수 있다.
“吾嘗終日不食하고 終夜不寢하여 以思호대 無益이라 不如學也라.
”내가 온 종일 먹지 않고 밤이 새도록 자지 않고 생각하였으나 유익한 것이 없는지라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學而不思則罔하고 思而不學則殆니라.
” 배우기만 하고 제 머리로 생각지 않는 사람은 어둡고 또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 사람은 위태롭다. 사색이 없는 독서와 독서가없는 사색의 부당함을 지적한 말이다.
논어에는 神秘超絶한 종교의 深奧한 哲理가 있는 것도 아니요. 지극히 平凡한 인생의 眞理를 淡淡하게 말할 따름이다.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倫理規範이 되는 古典 論語 1권에
“子曰 溫故知新이면 可爲師矣이니라.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것을 演繹하여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溫故知新 이것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古典의 생명은 溫故知新에 있다.
論語는 萬古不變의 규범으로 인간생활의 指標가 되는 孔子의 言行錄이다.
句節句節이 사람이 살아가는 참된 길이 어디에 있는 가를 제시해 주는 捷徑의 經典으로 누구나 인생을 진실하고 참되게 살려면 이 고전 논어는 인생 必讀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강독을 마치는 바이다. 끝으로 삼가 본 졸문 내용에 未洽한 점이 많음에 諒解 있기 바라면서 이만 줄인다.
<論語 經書講讀을 마치며>
大邱 大明洞 自家 養德堂 (世傳堂號) 懸板題下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