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크 (외 2편)
권혁웅 눈꺼풀은 몸이 우리에게 선물한 이불이죠 그것도 두 장이나 그가 이불 한 장을 뺏어 갔어요 오늘 밤 나는 편히 자기는 틀렸어요 동물의 왕국 ―동물계 소파과 의자속 남자 사람 소가 트림의 왕이자 이산화탄소 발생기라면 이 동물은 방귀의 왕이자 암모니아 발생기입니다 넓은 거실에 서식하면서 소파로 위장하고 있죠 중추신경은 리모컨을 거쳐 TV에 가늘게 이어져 있습니다 배꼽에 땅콩을 모아두고 하나씩 까먹는 습성이 있는데 이렇게 위장하고 있다가 늦은 밤이 되면 진짜 먹잇감을 찾아 나섭니다 치맥이라고, 조류의 일종입니다 이 동물의 눈은 카멜레온처럼 서로 다른 곳을 볼 수 있죠 지금 프로야구와 프리미어리그를 번갈아 보며 유생 때 활발했던 손동작, 발동작을 회상하는 중입니다 본래 네발 동물이었으나 지금은 퇴화했거든요 이 때문에 새끼를 돌보는 건 흔히 어미의 몫이죠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큰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급격한 호르몬 변화 때문인데요 이를 월급이라고 합니다 이 동물은 성체가 되자마자 수컷끼리 모여서 각축을 벌이는데 이런 집단이 군대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거기를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거기서 축구 한 얘기는 자꾸 떠벌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여자가 어딜 감히, 이런 소리도 어쩌다 내지만 대개는 빠지고 없는 털을 곤두세우는 것과 비슷한 과시행동입니다 실은 그래서 남은 솜털마저 죄다 뽑혔습니다만 가끔 퇴화한 앞발을 들어 사타구니를 긁거나 화장실 변기 주변에 오줌을 묻혀 영역을 표시합니다 아 방금 까무룩 눈이 감기기 시작했군요 짧은 주기의 동면이 시작된 모양입니다 곧 변태를 한 후에 먹이를 구하러 나서야 하거든요 저 증세를 월요병이라고 합니다 잠시만 더 그 잠을 지켜보기로 하지요 전설의 고향 송림원에서 구미호와 오향장육 먹는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식탁 앞에서 오래돼서 삐걱대는 윤회전생 앞에서 회향, 계피, 산초, 정향, 진피 인생의 아니 호생(狐生)의 독한 맛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우리는 고량주를 홀짝이고 내가 이렇게 된 건 행운의 편지 때문이야 아흔아홉 명에게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편지지가 한 장 부족했어 창밖에는 죽은 자의 골분(骨粉)이 흩날리고 있었다 구미호는 춥다고 아홉 개의 꼬리를 방석 대신 깔고 앉아서 나나 너나 뭐가 달라, 너도 생간 좋아하잖아? 구미호의 눈은 접시 바닥에 깔린 오이처럼 금세 축축해지고 이 집에선 해삼주스도 파네? 무서워서 못 먹겠다
나는 플레이팅한 오향장육이 이계의 문 같다고 생각하며 그의 혀가 꼬부라져 원산지를 닮아 가는 동안 이 접시에서 튀어나올 신물들을 생각한다 계단식 논이 흉내 내는 주름을 마파두부처럼 닮아버린 연골을 세숫대야보다 반질대는 정수리를 난자완스처럼 튀겨진 조그만 삶을
변신도 변심도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닫고 그는 힉스 입자처럼 놀라서 점점 무거워진다 구미호는 지금 아홉수에 걸린 것이다 재작년에 세례를 받아서 이미 거듭날 찬스는 써버린 것이다 —시집 『세계문학전집』 2024.2 ---------------------- 권혁웅 / 1967년 충북 충주 출생.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소문들』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세계문학전집』, 평론집으로 『미래파』 『입술에 묻은 이름』, 연구서로 『시론』, 산문집으로 『꼬리 치는 당신』 『외롭지 않은 말』 『몬스터 멜랑콜리아』 『생각하는 연필』 『미주알고주알』 『원피스로 철학하기』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