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꽃(花), 하느님의 시(詩) 예수 그리스도님 “믿음의 여정”
2024.9.15.연중 제24주일 이사50,5-9ㄴ 야고2,14-18 마르8,27-35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우리 믿음의 여정에 좋은 참고가 됩니다.
“잘못을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아첨하는 것이다. 아첨은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모두 무너지게 한다.”<다산>
믿음의 현자는 결코 아첨하지 않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논어>
이런 교정의 용기야말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의 거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순교자 성월 9월을 맞이하여 9.2-9.13일 까지 제45차 해외 사목 순례 여정은 그대로 “믿음의 여정”이었습니다. 역시 귀국중 기내에서의 장시간 언론인들과 인터뷰 시간을 가졌습니다. 초인적 힘은 순전히 기도의 힘, 믿음의 힘을 반영합니다. 도착하자마자 설립 500주년을 맞이히여 모인 테아티노 수도 참사 회원들을 향한 연설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쇄신, 친교, 기쁨의 봉사를 실천하십시오.”
“쇄신의 용감한 길을 선택하십시오. 환대의 집은 홀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회원들의 믿음을 촉구하는 말씀들입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믿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도 믿음을 상기시키는 말마디들로 가득합니다.
“깨어 있어라!”
“모두가 지나간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없이 한결같이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맛, 기쁨, 재미로 살아갑니다.”
“어디에서도 인간의 존엄, 품위, 분별의 지혜를 지녀야 비로소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 프란치스코!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어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는 평생 좌우명을 써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붙여놓고 지극히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이제 집무실은 명실공히 지족암(知足庵)이 되었습니다. 엊그제 ‘꽃’에 ‘시(詩)’를 덧붙였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詩같은
하루
詩같이
살자!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하느님의 꽃이, 하느님의 시가 예수 그리스도님입니다. 꽃같이, 시같이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하며 하루하루 날마다 믿음의 여정, 예닮의 여정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사도가 그 좋은 모범이 됩니다. 이런 믿음의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가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믿음의 전통도 정말 중요합니다.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믿음을 살게 하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전통의 깊이, 뿌리의 깊이입니다. 전통의 뿌리 빈약하면 삶의 깊이도 잃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믿음에 관한 세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 신앙 고백입니다.
제자들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아는 것 역시 제자됨에 필수입니다. 따르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이자 답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여기 그리스도의 정체는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영광의 주님에 앞서 고난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런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신원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하느님을 배경한 천하무적, 주님의 종, 믿음의 종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이런 주님 고백을 늘 새로이 하면서 추종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노자의 말씀대로 날로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해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신원을 밝힙니다.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그리스도, 주님의 종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는 것을 제자들에게 명백히 가르칩니다. 곧장 성급한 베드로의 조건반사적 거부 반응이 뒤따르자 주님의 지체없는 호된 질책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미요, 우리 모두에 대한 평생 깨우침이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다 실패한 사탄이 재차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을 유혹한 것입니다. 멋진 신앙 고백으로 반석이라 칭찬받던 ‘주춧돌’ 베드로가 졸지에 ‘걸림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까맣게 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던 것이며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닫고 배우며 성장하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충격요법적 꾸중은 평생 베드로가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런 충격적 깨우침을 받은 베드로인데 후에 세차례 또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셋째,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실천적 믿음입니다.
추상적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 책임을 다하는,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하여 지고 가는 믿음입니다. 제2독서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실천으로, 즉 선행의 실천, 자비의 실천, 섬김의 실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실천으로, 믿음의 정수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마디가 모든 인류에 해당되는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한결같이 추종하는 믿음이, 주님과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순교적 믿음이 진짜 실천으로 보여주는 믿음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이고 어제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오늘 9월15일은 원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본보기가 되는 아들 예수님과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순교적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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