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2일 대림 제 3주일 자선주일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고 있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신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신앙 행위이다.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특별 헌금을 통하여 자선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선이라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0-18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자선은 가장 값진 일입니다.
일본의 선학도인 데쓰겐(鐵眼道光)은 거대한 사업을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중국어로만 읽을 수 있던 경전을 7천 권 복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업을 위해서 기금을 모으려고 일본 전역을 구석구석 돌아다녔습니다. 어떤 부자들은 금을 백 냥씩이나 희사했으나, 대부분은 농부들한테서 몇 푼씩 받았답니다. 데쓰겐은 희사한 액수와는 상관없이 각 희사자들에게 똑같이 감사를 표했답니다.
십 년이란 긴 세월을 여행한 후에, 그는 드디어 그 사업에 필요한 기금을 모았답니다. 바로 그때 우지 강이 범람해서 수천 명이 양식과 거처를 잃어버렸습니다. 데쓰겐은 그의 소중한 사업을 위해 모은 돈을 모두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답니다. 그러고서 그는 다시 그 사업을 위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답니다. 다시 한 번 필요한 돈을 모으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답니다. 그러자 전국에 전염병이 번졌고, 데쓰겐은 모은 모든 돈을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서 주어 버렸답니다.
또다시 그는 여행을 떠났고, 20년 후에는 일본어로 된 경전을 만드는 그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답니다. 그 경전의 초판을 찍어 낸 인쇄판이 교토 오바꾸 산(黃檗山)에 있는 만복사(萬福寺)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데쓰겐은 그 경전을 모두 세 번 만들었는데 첫째와 둘째 것을 볼 수는 없지만 셋째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개구리의 기도 제 1권, 앤소니 드 멜로 지음/이미림 역)
오늘은 자선주일입니다. 자선은 ‘불쌍히 여겨 사랑을 베푼다.’는 뜻입니다. 본시 ‘사랑 자’(慈)자는 어미가 자식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형국을 형상화한 글자입니다. 그래서 사랑 자는 어머니를 표현하는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어머니를 불러 자당(慈堂)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대학에서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위인부, 지어자’(爲人父, 止於慈)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듯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여 어려운 사정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로 곤란을 받고 있으며 빈부의 격차는 점점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정부와 정치가들은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한 보편적 복지는 선거에서 표를 노리는 정치가들의 협잡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는 이런 야합적인 정치적 노름에 고통 받고 있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복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의 반값등록금제도를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반값등록금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많은 세금이 투여된다면 반대합니다. 부자들에게는 반값 등록금이나 보편적 복지가 조금 벗어나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부자는 돈을 더 내도 됩니다. 그것이 복지의 보편적 평등입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에 금년도 모금 목표액이 55억 원이 밑돌거라고 합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기부금을 내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선냄비에 기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여유 없는 사람들이 자선냄비에 기부합니다. 부자들은 외면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문이나 TV에 광고하듯이 선전하고 자선에 임합니다. 물론 그렇게라도 자선에 응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헌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 집니다. 자선주일이라고 특정한 날을 정해서 헌금하고 자선을 마음에 새기게 하는 것은 평생을 그렇게 살라고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한 복자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을 생각하면서 자선이 우리의 평생 과제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자선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4,4-7
형제 여러분,
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축일12월 12일 복자 토마스 홀랜드 (Thomas Holland)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 지역 : 영국(UK)
활동 연도 : 1600-1642년
같은 이름 : 도마, 토머스, 홀란드, 홀란트, 홀런드
토마스 홀랜드는 아마도 상류 계층에 속한 리차드 홀랜드(Richard Holland)와 앤(Anne)의 아들로 1600년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셔(Lancashire)의 서튼(Sut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의 생토메르(Saint-Omer)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621년 8월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영국 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프랑스어, 플라망어(벨기에 북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네덜란드어), 에스파냐어 그리고 라틴어에 유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도서관’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박식하였다. 1623년에 제임스 1세(James I) 왕의 아들인 찰스(Charles) 왕자가 결혼 문제로 에스파냐에 왔을 때 그가 대표로 뽑혀 마드리드(Madrid)에 가서 라틴어로 연설하기도 했다.
1624년 그는 플랑드르(Flandre) 지방으로 돌아와 예수회에 입회하고 와텅(Watten)에서 예수회 수련기를 마쳤다. 이어서 리에주(Lieg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품을 받은 그는 오늘날 벨기에 북서부 헨트(Gent) 지역에서 잠시 활동하고, 생토메르에서는 신학생들의 영적 지도를 맡기도 했다. 1634년 헨트에서 종신서원을 한 토마스 홀랜드는 이듬해에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는 1635년 잉글랜드에 도착해 7년 동안 런던(London)과 고향 등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가톨릭 사제의 사목과 선교 활동이 금지된 상황이라 가명 등을 사용하며 비밀리에 움직였고,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기에 때로는 외국인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1642년 10월 4일 런던 거리에서 체포되어 클러컨웰(Clerkenwell)에 있는 뉴 프리즌(New Prison)에 갇혔다가 뉴게이트(Newgate)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2월 7일 재판에서 ‘가톨릭 신자이고, 사제이며, 더욱이 예수회원’이란 죄목으로 반역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12월 10일 토요일에 감옥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날인 주일과 월요일 미사를 감옥에서 봉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 12일 그의 마지막 미사는 처형장인 타이번(Tyburn)으로 이어졌다. 그는 처형장에 모인 많은 이들 앞에서 설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 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토마스 홀랜드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12월 12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토마스 홀랜드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오늘 축일을 맞은 토마스 홀랜드 (Thomas Holland)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