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주님,
성자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루신 파스카 신비로
저희 안에서 죄의 율법을 없애셨으니
저희에게 지워진 그 멍에도 치워 주소서.
제1독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체를 영하는 마음과 잠을 청하는 마음은 같다.
저는 성체를 영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을 먹이시고 이어 오늘 복음처럼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이 이야기 다음에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성체 성사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와 같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의 40년을 버틸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가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바로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은 마치 풍랑 가운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처럼 두렵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남도 처음엔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걱정, 근심, 두려움, 염려를 당신만 받아들이면 사라지게 하시는 분으로 오십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을 때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는 곳에 가 닿았다고 말합니다. 더는 큰 바람이 일으키는 큰 물결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오며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과 근심은 내가 죽어야만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나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해주시기 위해 오시는 분이십니다. 성체는 그렇게 내가 죽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김으로써 인생의 무게가 가벼워지게 하는 효과를 줍니다.
저는 성체를 영하는 이 순간이 ‘잠’을 자기 전의 기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잠은 상당한 모험입니다. 잠은 죽음과 가장 가깝습니다. 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잠을 청할 때마다 두려움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잠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날 상쾌한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힘 있게 하루를 또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잠에 관한 두 개의 영화를 소개하려 합니다. 하나는 ‘슬리핑 뷰티(Sleeping
Beauty)’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루시는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학생입니다. 아무리 죽도록 일을 해도 나아지는 게 없습니다. 월세도 못 낼 정도입니다. 그런데 고액 알바가 들어옵니다. 그냥 수면제를 먹고 한숨 자고 나오면 됩니다. 신체의 어떤 손상도 입지 않습니다. 그녀는 점점 부유해집니다. 그러나 어떤 알바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자신이 잠잘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봅니다.
알고 봤더니 돈은 많지만 잠이 오지 않는 노인들이 자신 옆에서 잠을 청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노인들은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불안하여 잠이 오지 않습니다. 구약의 다윗도 젊은 여인을 옆에 두고 잠을 청했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어떤 노인들은 그녀 옆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잠이 곧 죽음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잠을 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모험을 하려면 자신을 언제나 받아줄 것만 같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노인들은 잠자는 젊은 여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영화는 ‘세븐 파운즈(Seven Pounds)’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수로 7명의 가족과 애인을 잃게 됩니다. 잠도 안 오고 두려워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 때문에 생명을 빼앗긴 사람이 일곱이니 자신도 일곱 명에게 새 생명을 주기로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심장까지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심장을 내어주며 편안히 죽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잠이 들기 전에 내 죽음을 책임져 줄 누군가를 원합니다. 위 영화에서는 자신을 받아줄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잠 자기 두려운 것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며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받아들이면 물에 빠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분은 죽음이라는 물 위를 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죄책감’ 없이 죽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세븐 파운즈에서는 일곱 명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며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역할을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성체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잘해서가 다니라 그분이 의로우셔서 우리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과 죄책감을 성체로 해결하면 우리는 편하게 잘 수 있고 편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진정한 목적지입니다. 결국 우리 모든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편하게 잠들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 안에 성체로 들어오십니다.
https://youtu.be/pFfoGmQDm9E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쉼 없이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정신없이 바쁩니다. 조금 쉬면서 일하라고 하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삶을 즐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삶의 여유가 생겼을 때 즐겼던 것보다, 삶이 고단할 때 마주한 아름다움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시간이 더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멈췄지만, 그전에는 일 년에 한두 번 꼭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출발 전까지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제가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지순례를 다녀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지순례를 통해 얻은 힘으로 더 열심히 그리고 힘차게 살 수 있었습니다.
삶이 고단할 때 오히려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나의 삶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드는 시간임을 깨달을 때 지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여유’가 지치지 않는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열정적인 삶을 만듭니다.
우리의 삶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신 하느님이셨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보시니 참 좋은’ 참이 될 수 있을까요? “힘들어, 어려워”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고단하게 만드는 삶이 아닙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드는 삶이어야 좋은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유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삶을 지금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을 찾고 그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이 나의 주님이며, 이웃이 나의 주님이며,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주님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 어디서도 누리지 못했던 진정한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둠 속에서 작은 배에 탄 채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물 위를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이 모습에 제자들은 주님이 아닌 유령인 줄 알고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 상황이 지금의 우리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과 같은 고통과 시련으로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다가와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움 속에 빠질 뿐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 뵙고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자,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함께 하려는 마음만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을까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에만 집착하며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희망은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콜레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