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앞에 서는 바른 태도 (눅 3-79)
2025년 2월 24일 (월요일)
찬양 : 영혼의 햇빛 예수여
본문 : 눅 10:25-29절
☞ https://youtu.be/0d4iwqo4QhI?si=6QMTppNVn9e58Y0I
주일 사역을 은혜로 마쳤지만,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해야 함을 배운다. 이번 주 중보기도 세미나 교재를 완성해야 하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에는 한 율법 교사의 예수님을 시험코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기록되고 있다. 25절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삶에서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일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교만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배우려는 마음으로 겸손히 질문하는 태도는 아름다운 일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한 율법 교사>라고 한다. 그는 율법을 가르칠 만큼 율법에 대해 정통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질문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오늘 성경은 <예수를 시험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율법 교사의 질문이 겸손한 알고자 하는 질문이 아님을 드러낸다.
실제로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ἐκπειράζων (ekpeirazōn)>으로 "시험하다, 테스트하다, 속마음을 떠보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상대의 반응을 떠보거나 함정을 놓는 의도를 가진 질문을 뜻한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몇 차례 등장하는데, 특히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눅 4:12, 마 4:7) 같은 어근 πειράζω (peirazō) 가 사용되었다.
이런 단어적 의미로 봐서 율법교사는 배우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뭔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모순이나 허점을 찾아 논쟁을 유도하려고 했거나, 혹은 자신의 삶을 인정받으려는 의도에서 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또 하나의 단어는 <선생님>이란 단어다. 이 <선생님(διδάσκαλε, didaskale)>이라는 호칭도 진정한 존경심이 담긴 호칭이라기보다, 자신과 동급 또는 아래의 선생으로 평가하는 뉘앙스를 가질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선생님이란 호칭을 붙인 것이지 배움을 배우기 위해 이 호칭을 사용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율법 교사의 무례한 의도를 아셨을 터인데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눈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주님은 영생을 무엇을 하여야 얻느냐는 질문에 율법은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묻고 그것을 너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이해하고 있느냐? 물으신 것이다.
율법교사인 이 사람의 지식과 역량을 마음껏 말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율법교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27절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닿며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율법의 핵심을 스스로 고백하게 하시는 최고의 교육방식이었다. 그런데 율법 교사의 대답도 신명기 6:5 (하나님 사랑)와 레위기 19:18 (이웃 사랑)을 결합한 최고의 율법 교사다운 대답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주 간단한 대답을 하신다.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순간 여전히 율법적 행위(율법 준수)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율법 교사의 대답을 가지고 그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순간 율법의 본질로 그를 초대하신 것이다. 율법은 본래 인간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율법을 자기 의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의 참된 의미를 다시 가르치신 것이다. 바울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지혜로우신지 그리고 그 긍휼하심이 얼마나 큰지 감동이 된다.
이 정도 되면 시험하려는 의도를 내려놓고 주님을 배우려고 하면 참 좋은데 인간이란 존재가 자기를 놓지 못하곤 한다. 이 율법 교사는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 교사는 배우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 ‘내 이웃’의 범위를 좁혀 자신의 율법 준수를 드러내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질문을 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는 자신만만하게 이웃의 범위를 정해서 말해달라고 한다. 당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웃을 동족 유대인으로 한정하려 했다. 그들은 죄인, 세리, 이방인들, 심지어 사마리아인들을 이웃으로 보지 않았고 원수처럼 대했다.
그는 끝까지 율법을 논쟁의 꺼리로 만들려 한 것이고, 그것을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무모함을 발휘하면서 말이다.
오늘 아침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예수님은 율법 교사가 이미 알고 있는 답을 하게 하심으로, 그의 신앙이 머리 지식에만 머물러 있음을 드러내셨다. 그가 알고 있는 율법이 실제로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발견한다. 그렇다. 주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은 자랑거리나, 누군가를 시험하고 심판하는 근거가 아니다. 구체적인 삶의 실천해야 할 이유일 뿐이다.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의로움과 특별함을 증명할 기회로만 사용한 율법 교사의 모습이 내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는 아침이다.
율법은 누가 내 이웃인가를 규정하는 근거가 아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이웃으로 인정하며 이웃이 되어주는 삶이 되라는 것이다. 오늘 나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찾기보다, 먼저 누군가의 이웃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오늘 하루 내가 의도적으로 섬길 한 사람을 정하고 실천해 보자.
주님, 이 하루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율법교사처럼 무엇인가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려는 마음들이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겸손히 주님을 듣고 따르려는 마음을 주사 이 하루가 주님의 뜻에 굴복되어 주님처럼 세상의 이웃이 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오늘 내가 의도적으로 섬길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알게 하시고 실천되게 하소서.
중보기도 제목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 중보기도 세미나 교재가 3번째 수정을 마치고 정식 출판되도록
1. 웨이브리즈 플랫폼의 콘텐츠 제작이 원활하게 이루어져 정상화되도록
2. 목회사관학교 12기생 20명이 모집되게 하소서.
3. 30억의 재정공급을 통해 선교회 사역이 새로운 옷을 입도록
4. 라마나욧선교회 행정 시스템이 섬김을 위한 최적의 구조를 찾도록
5. 스페이스 알 사역을 통해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만의 방식을 세워가도록
6. 틴케이스가 2025년 세운 계획들이 세워져 가도록
7. 작은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져 가도록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도록
8. 충주 라마나욧이 구체적인 사역 방향을 정하여 세워지도록
9. 박정제목사를 비롯한 팀원들 모두가 성령안에서 충만하도록
삶에 적용하기 : 다음 질문을 통해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께 배우려는 자세가 아니라, 나를 증명하려는 태도로 신앙을 대했던 적이 있는가?
2. 오늘 나는 ‘이웃을 찾으려는 신앙’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이웃이 되려는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3. 오늘 하루, 내가 의도적으로 한 사람을 섬기며 이웃이 되는 실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