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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이기(利他利己)
남을 이롭게 하면 자신도 이롭게 된다는 뜻으로, 남에게 봉사하고 베풀면 나에게도 언젠가는 그 보답을 받는다는 말이다.
利 : 이로울 이(刂/5)
他 : 다른 사람 타(亻/3)
利 : 이로울 이(刂/5)
己 : 자기 기(己/0)
우리는 남을 위해 봉사하기는 어렵게 생각하고, 자신이 도움 받을 일이 생기면 도움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러나 평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을 위해 잘 봉사하면 그 보답은 크게 드러나 나에게 돌아온다.
조선 영조(英祖)때 전국에 금주령(禁酒令)이 내려졌는데 이따금씩 술꾼들이 밀주(密酒: 관계기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만들어진 술)를 담가 먹는 일이 발생했다. 이 소문을 들은 영조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라는 벼슬에 있던 유진항(柳鎭恒)을 불러 암행어사(暗行御史)에 나설 것을 명(命)했다.
유진항은 임금으로부터 엄명을 받고 궁궐을 나서기는 했지만 밀주를 만들어 파는 자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고는 어느 여인숙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많은 돈을 주고 며칠 동안 먹고 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아이고 배야! 사람 죽겠네!" 아침상을 물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항은 배를 움켜쥐고 방안을 뒹굴기 시작했다. 기겁(氣怯)을 하며 달려온 여인숙 주인은 유진항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어서 의원에게 갑시다. 내게 업히시오."
"아니오. 나는 배가 아플 때는 약도 필요 없고, 좋은 술을 조금 먹어야 낫는다오. 아이고! 배야!……."
"거 참 희한한 양반이군. 하필 술을 먹어야 낫는다니!"
주인은 술을 파는 곳을 알고 있는 듯했으나 금주령(禁酒令)이 내려진 터라 얼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이고. 주인장. 나 좀 살려 주시오." 주인의 낌새를 살피던 유진항은 일부러 더욱 큰 소리를 지르며 방안을 뒹굴었다. "알았소. 몰래 술을 만들어 파는 곳을 내가 알고 있으니 조금만 참으시오."
주인이 대문을 나서자 유진항은 몰래 그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몰래 술을 빚어 파는 집을 찾아냈다. 유진항은 재빨리 칼을 뽑아들고 밀주를 파는 집으로 들이 닥쳤다. "네 이놈! 감히 국법을 어기고 술을 만들어 팔다니! 어서 썩 나와서 무릎을 꿇어라."
유진항이 고함을 지르자 방에서 젊은이가 놀라서 뛰어나왔다. 젊은이는 유진항 앞에 무릎을 꿇고는 울먹이며 말했다. "국법(國法)을 어겼으니 이 자리에서 당장 죽어 마땅하겠으나 죽기 전에 늙은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절이라도 올리게 해 주십시오."
유진항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자 안에서 젊은이의 노모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문 밖으로 뛰어 나왔다. "나으리, 제발 이 아이를 살려 주시고 제 목을 베어 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에는 젊은이의 아내가 뛰어나와서 울면서 호소했다. "정작 술을 빚은 사람은 접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나으리."
다시 젊은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집안을 제대로 꾸려 나가지 못한 책임은 모두 저한테 있습니다. 부디 제 목을 치십시오."
서로 죽겠다고 나서는 세 사람의 마음을 읽은 유진항은 결국 칼을 내던지고 말았다. 선량(善良)한 그들을 차마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일로 유진항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 유진항이 10여년 만에 겨우 복직되어 강령(康翎: 황해도) 현감으로 부임한다. 그런데 그만 행정상 실수를 범하여 암행어사가 들이닥쳤다. "그대는 고개를 들라."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유진항에게 암행어사가 말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유진항은 깜짝 놀랐다. 암행어사는 바로 밀주를 만들어 팔던 그 젊은이였던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인데, 그대의 죄(罪)가 그리 크지 않으니 이번 만큼은 용서해 주겠다."
암행어사는 자리에서 내려와 유진항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결국 두 사람은 죽을 고비에서 서로의 목숨을 한 번씩 구해준 셈이 되었다.
留人情이면 後來에 好相見이니라
모든 일에 인정(人情: 인자하고 따뜻한 정)을 남겨두면 뒷날 (만났을 때) 서로 좋은 낯으로 보게 된다. (명심보감)
이 사건은 법보다 인간미의 따뜻함을 강조하는 사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규정이나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가 성행하는 나라는 부패와 부정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세상이 되며, 그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권력에 의한 부정이나 위법을 감출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가정이나 조직, 나아가 국가는 나름대로의 원칙과 법규가 존재한다. 조직이 계속 이어져 나아가려면 그 조직에 필요한 원칙과 규정, 법규는 지키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그러나 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되지만 원칙에는 반드시 변칙이 있게 마련이고 규정 뒤에는 눈물이 있고, 법 뒤에는 정상참작(情狀參酌)이 있다. 법과 원칙은 고수하되 인정(人情)상의 위규는 법보다 우선이 되어야 되지 않을까? 그래야 사람 사는 맛이 나기 때문이다.
이타적(利他的) 행동
이타적(利他的)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더 꾀하는 것’이라고 나온다. 이기적(利己的)이라는 말은 그 반대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것’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정서적 관점에서 보면 이타적이라는 것은 남을 더 위하는 것, 이기적인 것은 자신을 더 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볍게 생각해 볼 때 ‘이타적’과 ‘이기적’은 정 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되지만 세상을 살면서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끔 들르는 커피숍이 있다. 목이 좋은 곳도 아닌 주택가인데 몇 집 건너 하나씩 커피숍이 있다. 그런데도 필자가 아는 커피숍 중에는 가장 성공한 커피숍이다. 요즘 가장 레드오션이라고 할 수 있는 커피숍을 어떻게 그렇게 잘 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관찰을 해 봤다. 물론 이렇게 성공한 커피숍의 성공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큰 성공요인을 꼽으라면 부부가 다 무척 이타적이라는 것이다. 부부가 다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참 신기하다. 요즈음은 고객 중에 한 분이 커피숍을 냈다고 같이 걱정해주고 도와주다가 건강까지 좀 안 좋아졌을 정도이다. 아마도 도움을 받는 분은 평생 은인으로 살 것이다.
그렇게 기꺼이 도움을 주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조차도 단골이 안 될 수가 없다. 우리 손님들은 의리 있고 좋은 사장님을 소개해주고 싶으니 좀 멀어도, 좀 바빠도 그 커피숍을 가게 된다. 가장 이타적인 행동들이 그 커피숍이 잘 되는 최고의 비결인 셈이다.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정육점이 있었는데 그 점원은 주인에게 불만이 많았다. 주인을 망하게 하고 싶었던 그 점원은 주인이 없을 때 오는 손님들에게는 고기를 넉넉하게 주었다. 고기를 후하게 준다고 소문이 나자 더 많은 손님들이 그 정육점을 찾게 됐다. 점원의 의도는 빗나가고 그 정육점은 점점 더 잘 돼서 정육점 주인은 부자가 되게 됐다. 점원의 이타적인 행동이 주인의 이익이 됐다. 점원의 이익이 되지 못했던 것은 그 이타적인 행동이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장 이타적인 행동이 가장 이기적인 결과를 만든다. 쉬운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내용 같다.
어느 날 한 선비가 길을 가는데 멀리서 한 사람이 등불을 들고 오고 있었다. 벌써 날은 어두워지고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 보고 선비는 깜짝 놀랐다. 등불을 들고 오는 사람은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선비는 시각장애인에게 앞도 볼 수 없는데 왜 등불을 가지고 다니냐며 비웃듯 물었다. 시각장애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 등불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등불은 상대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캄캄해졌을 때 앞을 잘 못 봐서 시각장애인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등불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위험은 없어지게 된다. 이타적인 마음의 아름다운 행동은 부메랑이 돼서 본인에게 복을 가져다준다.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람이 더 잘 사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맞을 수도 있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벌 수는 있다. 하지만 더 행복하지는 않다. 행복은 이타적인 사람들에게 주는 신의 선물인 것 같다. 이타적인 사람은 모두 행복하다.
인간관계와 배려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요즘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은 인간관계의 갈등을 보면서 “과연 갈등 없는 사람 간의 관계정립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 방법론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혼자서 계속 고민해 보았다.
부부 간에도 사소한 일로 자주 다투고, 부모 자식 간에도 상호 몰이해(沒理解)와 자기중심적 사고(思考)로 인해 갈등이 패륜으로 이어지는 사례를 비롯하여 이웃 간의 층간소음으로 인한 갈등이 폭력으로, 직장에서 친구 사이에서, 동료 사이에서 그리고 민족, 종교, 정치적 이념 등 수많은 사람 사이의 갈등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지 않은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종교적, 철학적 가치들이 수없이 제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적, 철학적, 학문적 표현들이 너무 어려워서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행하지 못해서인지 오늘 이 시간에도 지구상 아니 우리 대한민국 곳곳에서도 갈등으로 인한 사건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러한 인간관계의 갈등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인간의 욕심(慾心)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자기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타인의 욕구(慾求)는 자신의 욕구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고 자신의 욕구만이 정당화(正當化)의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지극히 이기적(利己的)인 발상이 모든 인간관계의 근원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성현들의 가르침처럼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산다면 도대체가 싸울 일이 없지 않을까? 남이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타인을 위해 무엇을 해줄까를 생각한다면 다툴 일이 무엇인가? 남편이 아내의 잔소리를 잔소리로 듣지 말고 “아, 저사람이 왜 저럴까?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을까? 내가 아내를 위해 무엇을 잘 못했고, 무엇을 해주면 아내가 편안해하고 기뻐할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아내의 잔소리는 잔소리가 아니라 사랑스러운 노래소리로 들리지 않을까?
자녀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불평을 한다면 “아, 부모로서 내가 아들 딸에게 많이 부족했구나. 모범적인 엄마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부족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아들 딸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다면서 물질적으로 많이 물려주고 스펙 쌓는 것을 도와주는 것에 집착(執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自立)하도록 도와주고 어른이 되어가는 방법을 알려주면 자녀들도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을까?
직장 내에서든 이웃 사이에서든 친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웃 간에도 “이웃이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를 기대하고, 만약 피해를 준다면 내가 그에게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없을까? 이웃에게 좀 더 따뜻하게 다가가면 안될까?”를 생각한다면 서로 조심하게 되지 않을까?
친구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어려운 부탁을 한다면 “저 친구는 맨날 아쉬울 때만 연락해.”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죽했으면 나한테 도움을 청할까?”를 생각하고 선뜻 도움을 준다면 그 친구가 나 힘들 때 과연 모른 척 할까? 물론 친구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면서 그 보답을 바라고 도와줘서는 안될 것이다. 친구 사이든 부모자식 사이든 대가를 바라고 어떤 선의(善意)를 행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선의가 아닐 것이다.
역시 반대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녀는 “엄마 아버지가 나에게 왜 이것밖에 못해줄까?” 보다는 “내가 부모님께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직장상사는 부하에게 “내가 부하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우리 인간관계에서는 도무지 다툴 일이라고는 없지 않겠는가?
말로는 쉽지만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기애(自己愛)의 본능을 타고난다는 철학적, 심리학적 연구결과들이 그것을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이렇듯 간단한 원리를 마음에 늘 생각하면서 생활한다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사건사고들은 얼마든지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심성을 바르게 하기 위해 교육, 사상, 종교, 문학, 문화예술 분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구와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어느 것을 하더라도 아주 간단한 한 가지 ‘배려(配慮)’ 이 한 단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배려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로 정의되어 있다.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는 마음 이것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겠는가?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배려’라는 한 마디를 우리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핀다면 우리 사회는 더 없이 행복지수가 높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혹시라도 암(癌)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 병원에 가서 정기검진을 하지 말고 평소에 즐겁고 활기차게 생활하면 아무 질병이 생기지 않고 장수한다.”라고 누군가 명언을 남긴 것처럼 나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살지 말고 타인을 배려하면서 생활한다면 너도나도 우리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에게 불리하게, 상대를 이롭게
골프 룰과 관련해 가끔 시비가 붙는다. 이게 옳네, 저게 옳네 하면서 캐디에게 심판을 봐달라고 하고, 아니면 얼굴 붉히며 한바탕 입씨름을 한다. 한 타에 1만 원짜리 내기를 하면 룰 자체를 가지고 시비가 붙기도 한다. 한 푼이라도 잃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판정을 기대하는 심리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보기 플레이어 시절 어떤 친구가 러프에 들어간 공을 치려고 연습스윙을 하면서 주변의 키 큰 잡초들을 다 쓰러뜨렸다. 보통 연습스윙은 두세 번 하는데, 이 녀석은 열 번 넘게 연습스윙하면서 인근 잡초를 아이언으로 다 쓸어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제거해놓으니, 일견 치기가 쉬운 듯도 했다.
이 상황을 두고 시비가 붙었다. 벌타를 받아야 한다. 아니다, 무벌타다. 캐디에게 물어보니 할 말이 없단다. 자연훼손이므로 당연히 벌타다. 아니다. 그럼 연습 스윙하면서 디보트 낸 것도 자연훼손 아니냐. 설왕설래하다 프로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내가 아는 프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단한 대답이 돌아온다. 당연히 벌타 받아야죠. 하지만 룰 가운데 최고 룰은 합의 룰입니다. 그 아래가 로컬 룰이고 그 밑이 시합 룰이에요. 공식 경쟁이 아닌 아마추어 간 시합에서는 합의 룰을 적용하세요. 그래서 내가 간단하게 정의했다. 합의한다. 무벌타다! 단 다음부터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벌타 두 개다. 규정대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자연을 훼손한 경우 벌타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그래서 그 상황은 넘겼지만 뭔가 찜찜했다. 룰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아봤다.
1744년 스코틀랜드 리스라는 고장에서 사상 최초로 골프클럽 조직 ‘오너러블 컴퍼니 오브 에든버러 골퍼스(The Honorable Company of Edinburgh Golfers)’가 탄생했다. 그와 동시에 골프 룰 13개항이 제정됐으나 현재 내용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후 1754년 영국 세인트앤드루스에서 문을 연 골프클럽이 1834년 윌리엄 4세로부터 ‘Royal · Ancient’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영국왕립골프협회(The Royal · Ancient golf club of St. Andrews·R·A)로 발족해 영국 골프클럽 조직과 룰을 총괄하는 권한을 갖게 됐다.
홀 수도 제각각이었다가 1764년에야 22홀로 정해졌다. 골프 성지인 세인트앤드루스 코스도 22홀로 구성돼 있었다. 현재와 같은 18홀 경기는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1858년에야 비로소 시작됐다. 당시 룰을 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은 인간과 자연의 합일, 젠틀맨의 요건 등이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 그리고 젠틀맨
1800년대 중반부터 골프는 룰대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현재 세계 골프의 총본산은 R·A로, PGA(미국 프로골프협회)와 협의해 4년마다 룰을 개정하고 이 룰을 둘러싼 의문이나 문제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룰이 제정되면서 골프는 단순한 놀이 차원을 넘어 예의와 체력, 자연과의 투쟁으로부터 인생을 배우는 젠틀맨의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됐다. 현재의 골프 룰은 34개 조항이 근간을 이룬다.
사람 사는 세상의 룰은 도덕에 기초한다. 이를 압축한 것이 법이다. 법에 따라 세상살이 틀이 정해지며 이것이 기초가 돼 규정, 조례 등으로 불리는 단체 법이 운영된다. 자그마한 시비의 원인도 도덕이다. 도덕은 천도지덕(天道地德)의 준말이다. 하늘의 길을 도라 하고 땅의 후덕함을 덕이라 하는 바, 결국 자연 이치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도덕이요 법이다.
자연은 또 무엇인가. 명사로서의 자연은 사람 외의 대상을 뜻하지만, 철학적 의미로 따져보면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뜻한다. 즉 자신을 드러내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들꽃도 자신을 드러내려 피며 물도 자신을 나타내려 흐른다. 바람과 구름과 비도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작용한다.
태양은 빛나고 달빛은 반사한다. 동물은 먹이를 잡고 잠자고 교미한다. 인간도 이 범주에서 보면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자연 법칙을 따르는 존재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모든 룰은 이 자연 상태를 온전하게 유지하려고 온갖 의미를 갖다 붙인 것이다. 문화라는 것도 그렇다.
이러한 의미에서 골프 룰을 음미해보자. 34개 조항으로 구성됐다고는 하지만 단 하나의 의미만 제대로 새기면 구태여 다 공부할 필요가 없다. 자연 상태, 있는 그대로가 규칙이다. 자신을 드러내되 욕심을 내지 말라는 뜻만 제대로 이해하면 별도로 규칙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이를 한 꺼풀만 더 벗겨보자. 하나의 기본 틀이 있으면 이를 세분화한 룰은 셋으로 나타낸다. 하나의 틀이 세 개의 룰로 이해되는 것이다. 삼일신고(三一神誥)! 우리 조상의 철학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 있는 그대로가 하나의 틀이라면 여기서 두 개가 불거져 나온다. ‘나에게 불리하게, 상대를 이롭게’가 그것이다.
나에게 불리하게 적용하라는 것은 남에게 이롭게 적용하라는 뜻과 같다. 여기서 남이란 동반자뿐 아니라 모든 자연 상태를 이른다. 이유 없이 나무 꺾지 말고 물 훼손하지 말고 잔디 파지 말라는 것이다. 내 공이 치기 어려운 자리에 있다고 주변을 고르고 수정하면 당연히 벌타가 부여된다. 인공적인 수정을 하지 말라는 얘기다. 동반자끼리 합의한 사항도 이 범주를 벗어나면 합의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남을 이롭게’가 어려운가. 나는 아주 쉽다.
남을 이롭게 배려하라는 것은 동반자가 잘 칠 수 있게 도와주라는 얘기다. 살벌한 인간세상, 경쟁과 투쟁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경쟁이 아닌 서로 도움을 주는 골프를 하라는 것이다. 동반자가 샷을 할 때는 소리와 움직임도 그쳐야 한다. 아울러 미스샷이 나오면 같이 안타까워하고,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멀리건을 주는 것도 한 방편이다. 실수한 스윙은 빨리 잊어버리라고 격려하는 배려. 이것이 남을 잘되게 하면 내가 잘된다는 비결이다.
아무리 모호한 상황이라도 이 기준만 적용하면 다 해결된다. 예를 들어보자. 벙커 고무래에 공이 걸렸다. 고무래를 치우자 공이 굴러 벙커에 빠졌다. 이런 경우 원래 자리에 놓아야 하나, 아니면 벙커에서 쳐야 하나. 이 중 나에게 불리한 상황이 어느 것인지를 적용하면 쉽게 판정할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친구의 러프 풀 깎기도 이 기준에서 보면 당연히 벌타 대상이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인공적인 수정을 가했으니 그 자체가 도덕에 위배되는 것이다. 어프로치하다가 스윙 한 번에 공이 두 번 맞았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공이 와서 맞았는가. 무벌타다.
같이 사는 세상 반드시 필요한 룰
이 룰을 인생에 대입해보자. ‘있는 그대로, 남을 배려하고, 나에게 불리하게.’ 이 세 가지만 준수한다면 삶이 팍팍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단체나 조직, 국가라 해도 이 룰만 준수한다고 가정해 보라. 현재 한국 사회가 가진 여러 문제, 즉 환경이나 성문제, 노인문제, 경제문제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골프 룰을 상기하고 환경에 접근하면 인공적인 제재도 필요 없다.
성문제? 있는 그대로 접근해 보자. 난 네가 싫은데 넌 내 몸만 보고 덤비느냐. 나에게 불리한 상태로! 덤벼드는 놈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태지만 당하는 나는 인공적으로 불리한 상태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태로 덤비는 친구에게는 2벌타를 부여해야 한다.
그래도 같이 사는 세상인 만큼 함께 라운딩하는 정신으로 징역살이라는 벌타를 베풀어 주는 것이다. 많이 가진 자가 없는 놈 것을 빼앗아 먹는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아닌 인공적인 수정 상태다. 2벌타에 추후 골프장 출입금지까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한 뿌리에서 나온 다른 열매다. 그 어떤 미물도 하늘의 다른 분신이다. 좀 고급스럽게 표현하면 빛의 원질에서 다양한 색깔이 나오고 그 색의 조합이 만물을 다르게 나타내는 것이다. 빛의 삼원색만 알면 다 아는 이론을 우리는 왜 잊고 사는가. 우리는 다른 존재가 나의 또 다른 분신이란 사실을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나’라는 단어에 네모를 붙이면 ‘남’이 된다. 그 네모가 나를 닫아버린 것이니, 모든 갈등과 투쟁이 여기서 나온다. 나를 여는 세 가지 방법이 골프 룰과 직통한다. 있는 그대로, 남을 배려하고, 나에게 불리하게 하라.
▶️ 利(이로울 리/이)는 ❶회의문자로 勿(물)은 여기에서는 쟁기와 흙을 나타내는 모양이며 논을 갈아 엎는 모양이다. 禾(화)는 벼라는 곡식을, 利(리)는 곡식을 만드는 밭을 가는 쟁기로, 쟁기날이 날카롭다, 나중에 날카롭다는 것과의 관계로 부터 勿(물)을 刀(도)로 쓰게 되고, 또 刀(도)는 돈과 관계가 있으므로 이익의 뜻으로도 쓰여지게 된 듯하다. ❷회의문자로 利자는 '이롭다'나 '유익하다', '날카롭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利자는 禾(벼 화)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벼와 칼을 함께 그린 것이니 利자는 벼를 베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利자는 본래 칼이 벼를 벨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다'라는 뜻을 위해 만든 글자였다. 利자에 아직도 '날카롭다'나 '예리(銳利)하다'라는 뜻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利자는 후에 '이익'이나 '이롭다'라는 뜻이 파생 되었는데, 벼를 베어 추수하는 것은 농부들에게 수익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利(리)는 ①이롭다, 이하다(이익이나 이득이 되다) ②이롭게 하다 ③유익하다 ④편리하다 ⑤통하다 ⑥날카롭다 ⑦이기다 ⑧날래다 ⑨탐하다 ⑩이자 ⑪이익(利益) ⑫승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더할 가(加), 더할 증(增), 더할 첨(沾), 더할 첨(添), 더할 익(益),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해할 해(害)이다. 용례로는 편리하게 씀을 이용(利用),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탬이 된 것을 이익(利益), 이익을 얻음을 이득(利得), 남에게 돈을 빌어 쓴 값으로 무는 일정한 비례의 돈을 이자(利子), 돈벌이를 하는 동안에 남는 돈을 이윤(利潤), 적을 이롭게 함을 이적(利敵), 자기 이익만 꾀함을 이기(利己), 이익을 탐내는 욕심을 이욕(利欲), 다른 이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이타(利他), 겨루어 이김을 승리(勝利), 이익이 있음을 유리(有利), 편하고 이로우며 이용하기 쉬움을 편리(便利), 빌려 준 돈의 이자를 금리(金利), 조건이나 입장 따위가 이롭지 못함을 불리(不利), 날이 서 있거나 끝이 뾰족함을 예리(銳利),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이익을 폭리(暴利), 이익을 얻음을 득리(得利), 실지로 얻은 이익을 실리(實利), 이해 관계를 이모저모 따져 헤아리는 일을 일컫는 말을 이해타산(利害打算),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 입을 것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나아지게 함을 이르는 말을 이용후생(利用厚生), 이로움과 해로움 이나 얻음과 잃음을 일컫는 말을 이해득실(利害得失), 이익과 손해가 반반으로 맞섬을 일컫는 말을 이해상반(利害相半), 이욕은 사람의 밝은 지혜를 어둡게 만듦을 이르는 말을 이령지혼(利令智昏),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일컫는 말을 이국편민(利國便民), 이를 찾는 문과 명예를 얻는 길을 일컫는 말을 이문명로(利門名路), 이가 되든지 해가 되든지 간에를 이르는 말을 이불리간(利不利間), 적을 이롭게 하는 짓을 이르는 말을 이적행위(利敵行爲), 이로움이 있는 곳을 말함을 이르는 말을 이지소재(利之所在), 이해를 따지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이해불계(利害不計), 이해에 관하여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따진다는 뜻으로 인색함을 가리키는 말을 이석추호(利析秋毫) 등에 쓰인다.
▶️ 他(다를 타)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뜻을 나타내는 也(야, 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它(타)의 옛날 자형(字形)은 사람의 발과 뱀으로 이루어졌다. 뱀이 무서운 짐승이므로 사고(事故), 별다른 일, 다른 것의 뜻으로 되었다. 他(타)는 후일 다시 사람인변(亻=人; 사람)部를 붙여 뱀과 구분되는 다른 사람, 다른 일의 뜻으로 쓰인다. ❷형성문자로 他자는 ‘다르다’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他자는 人(사람 인)자와 也(어조사 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다르다’라는 뜻은 본래 佗(다를 타)자가 먼저 쓰였었다. 佗자에 쓰인 它(다를 타)자는 뱀의 형상을 본뜬 것으로 ‘다르다’나 ‘뱀’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佗자는 이렇게 ‘다르다’라는 뜻을 가진 它자에 人자를 더한 것으로 ‘다른(它) 사람(人)’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었다. 그러나 소전에서의 它자와 也자가 혼동되었었는지 지금은 也자가 들어간 他자가 ‘다르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他(타)는 (1)타인(他人)의 뜻을 나타냄 (2)어떤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다른의 뜻을 나타냄 등의 뜻으로 ①다르다 ②간사하다(마음이 바르지 않다) ③겹치다 ④짐을 싣다 ⑤남, 다른 사람 ⑥다른 곳, 다른 데, 다른 방면(方面) ⑦딴 일 ⑧두 마음, 부정(不正) ⑨겹쳐 쌓이는 모양 ⑩그, 그 사람, 그이 ⑪누구 ⑫다른, 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를 별(別), 다를 차(差), 다를 수(殊), 다를 리(異),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스스로 자(自)이다. 용례로는 다른 나라를 타국(他國), 제 고장이 아닌 다른 고장을 타향(他鄕), 다른 사람 또는 자기 이외의 사람을 타인(他人), 타향의 달리 일컫는 말을 타관(他關), 남이 죽임 또는 남에게 당한 죽음을 타살(他殺), 동작이 다른 데에 미침을 타동(他動),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을 타자(他者), 다른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뜻을 타의(他意), 자기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남의 명령이나 속박에 따라 움직임을 타율(他律), 미래의 세계를 타세(他世), 남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타견(他見), 다른 까닭이나 사고를 타고(他故), 남의 영토 또는 영역을 타령(他領), 어떤 물건이나 장소 등의 다른 쪽을 타면(他面),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기타(其他), 남을 반대하여 내침을 배타(排他), 자기와 남을 자타(自他), 나머지 다른 것을 여타(餘他), 남에게 의지함을 의타(依他), 다른 이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이타(利他), 집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나감을 출타(出他),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남의 활을 당겨 쏘지 말라는 뜻으로 무익한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을 타궁막만(他弓莫輓), 다른 것은 말해 무엇 하랴는 뜻으로 한 가지 하는 일을 보면 다른 일은 보지도 않아도 미루어 헤아릴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타상하설(他尙何說),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음을 염불급타(念不及他),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아주 확실함을 보무타려(保無他慮), 남에게 더 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자기 것으로 넉넉함을 이르는 말을 불필타구(不必他求) 등에 쓰인다.
▶️ 己(몸 기)는 ❶상형문자이나 지사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래 구불거리는 긴 끈의 모양을 본떴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모양에서 일으키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일으키다의 뜻은 나중에 起(기)로 쓰고, 己(기)는 천간(天干)의 여섯번째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己자는 '몸'이나 '자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몸'이란 '나 자신'을 뜻한다. 己자의 유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사람이 몸을 구부린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굽의 있는 새끼줄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己자와 결합한 글자를 보면 새끼줄이 구부러져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다만 己자가 단독으로 쓰일 때는 여전히 '나 자신'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己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상용한자에서는 뜻과 관련된 글자가 없다. 다만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새끼줄이나 구부러진 모양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으니 상황에 따른 적절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己(기)는 ①몸 ②자기(自己), 자아(自我) ③여섯째 천간(天干) ④사욕(私慾) ⑤어조사(語助辭) ⑥다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여섯 번째를 기사(己巳), 열여섯째를 기묘(己卯), 스물여섯째를 기축(己丑), 서른여섯째를 기해(己亥), 마흔여섯째 기유(己酉), 쉰여섯째를 기미(己未)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물건을 기물(己物), 자기 마음을 기심(己心), 자기가 낳은 자녀를 기출(己出), 자신의 의견이나 소견을 기견(己見), 자신의 초상을 기상(己喪), 자기의 소유를 기유(己有), 자기의 물건은 기물(己物), 제 몸이나 제 자신 또는 막연하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자기(自己), 자기 이익만 꾀함을 이기(利己), 자신의 몸을 닦음을 수기(修己), 안색을 바로잡아 엄정히 함 또는 자기자신을 다스림을 율기(律己), 자기 몸을 깨끗이 함을 결기(潔己), 몸을 가지거나 행동하는 일을 행기(行己), 신분이나 지위가 자기와 같음을 유기(類己), 자기를 사랑함을 애기(愛己), 자기 한 몸을 일기(一己), 자기에게 필요함 또는 그 일을 절기(切己), 자기가 굶주리고 자기가 물에 빠진 듯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함을 일컫는 말을 기기기익(己飢己溺), 중종때 남곤 일파 조광조 등을 쫓아내어 죽인 사건을 일컫는 말을 기묘사화(己卯士禍), 기미년 3월1일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국의 독립운동을 일컫는 말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 봄을 일컫는 말을 자기관찰(自己觀察), 모든 사고와 판단과 행동을 자기 중심으로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기본위(自己本位), 자기의 이해와 쾌락과 주장을 중심으로 삼고 남의 처지를 돌보지 않는 주의를 일컫는 말을 애기주의(愛己主義), 자기 존재를 인정 받으려고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는 심리적 경향을 일컫는 말을 자기과시(自己誇示), 스스로에게 황홀하게 빠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자기도취(自己陶醉), 자신의 생활은 검약하게 하고 남을 대접함에는 풍족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약기유물(約己裕物)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