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矣.
우리나라 말은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고로,
어리석은 백성이 마침내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이가 많으니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늘 씀에 편케 하고자 함이라.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
세종대왕의 여보적자(如保赤子)마음이 담긴 한글
오늘이 10월 9일 “한글날”이다.
그런데 왜 10월 9일이 한글날이 되었을까?
일제강점기에 “한글날”이라는 명칭은 없었고,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11월 4일에 가갸거겨의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기념식을 거행한 것이 “한글날”의 시초다.
이날을 시작으로 올해(2015년)로 한글날 제정 역사는 89년이 되는 것이다.
“가갸날”을 정한 1926년경에는 조선백성에게도 한글이 보편화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글날(가갸날)”이 정해진 것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지
회갑(回甲60년)이 8번이나 지난 480년 만의 해다.
한글날 하면 훈민정음, 훈민정음하면
지금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창시자 간송 전형필 선생을 이야기 안할 수 없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하고 전쟁에 광분한 왜놈들의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 되어 닥치는 대로 조선의 물건을 집어 삼킬 때다.
늦여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는 말들 듣는다.
전형필은 “훈민정음 원본”이라는 말에 숨이 콱 막힌다.
책주인이 책값으로 “일천 원”을 불렀다.
간송 전형필은
“물건 값을 제대로 주고 사야지” 하면서 책주인에게 1만원을 주었다.
중개인에게도 일천 원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품에 돌아온 것이 유일한 국보 70호 “훈민정음”원본이다.
지금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보존되어 있다.
늑대 이빨 같은 일제치하에서 무사히 보존 될 수 있었던 것은
간송 전형필 선생의 애국심 때문이다.
10월 9일 한글날은 어떻게 해서 정해진 것일까?
훈민정음 원본의 서문(序文)에
“정통 11년 9월 상한(正統十一年 九月 上澣)”에 정인지(鄭麟趾)가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서서 “상한(上澣)”이란 말은 “상순(上旬)”을 뜻한다.
9월 상한(上澣)을 상순(上旬)의 끝날인 음력 9월 10일로 잡고
그것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 기념일로 정한 것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말은 할 수 있어도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만든 글이라는 것은 우리가 학교 때 배워서 안다.
백성들이 글을 몰라 피해를 입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세종대왕의 그 마음을
“여보적자(如保赤子)”로 표현할 수 있다.
“여보적자(如保赤子)”는
유교(儒敎) 경전 오경(五經) 중의 하나인 서경(書經)에 나오는 글이다.
“적자(赤子)”는 빨가벗은 자식이라는 말로,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아서
살색 그대로 붉게 보이는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여보적자(如保赤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어린아이를 돌본다는 말이다.
임금과 국가 정책은 백성을 돌보기를
어머니가 온 정성을 다하여
“갓난아이를 돌보듯이 하라(如保赤子)”고 가르친 것이다.
한글이 점차 보급되면서 일반 백성들은 생각과 뜻을 글로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한글을 사용하면서 서민들의 생활 개선과 의식 성장을 가져왔다.
오늘날 “한강의 기적”이라는 국가발전과 경제성장의 밑바탕에는
한글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과 국가가 발전 한 것이다
한글이 있기 때문에 영어를 바르게 알 수 있고
한글을 알기 때문에 한문(漢文)을 우리 몸에 맞게 사용할 수 있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같이 하라는 여보적자(如保赤子)의 마음으로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정치(民政治)를 구현한 세종대왕을
상기(想起)하면서,
정의로운 우리말 우리글을 마치 “독(毒)”으로 사용하면서
국민을 이용하여 정권욕심과 개인 이익에 정신없는 지금의 정치인들을
본다.
참고로
“가갸날”을 정한 일본강점기인 1926년의 조선의 정세(情勢)는 어쩠는지,
동아일보의 “한국근대인물100년 1876년~1975년”속에 있는 자료에서
1926년 한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정리해 본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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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일어난 일들
1월2일-일본 삼중현(三重縣)에서 교포 1천여명 피살당하다
1월3일-전남 무안군 자은도(慈恩島) 1천여 소작인 일본 경찰과 충돌하다
1월6일-총독부(總督府) 청사 완공 이전(移轉)(경복궁내 중앙청)
1월12일-조선농회령(朝鮮農會令) 조선수산조합령(朝鮮水産組合令) 공포
1월19일-장개석(蔣介石)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장에 피선(被選)
2월27일-조선도량형령(朝鮮度量衡令) 공포(미터법 전용 4월1일 시행)
3월7일-동아일보 2차 정간(停刊)
3월20일-장개석 군내(軍內) 공산당원 체포(중산함(中山艦) 사건)
4월1일-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법문학부(法門學部) 의학부(醫學富)개설
(5월1일 수업개시)
4월5일-양기탁(梁起鐸)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조직
4월14일-화요회(火曜會) 북풍회(北風會)를 정우회(正友會)로 통합
4월15일-김영진(金永鎭)등 상해 일본 영사관에 폭탄 투하
4월26일-융희황제(隆熙皇帝순종황제) 승하(昇遐)
4월28일-송학선(宋學先)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총독암살(總督暗殺) 미수
금호문사건(金虎門 事件)
5월20일-종합지 “동광(東光)”창간
6월6일-6.10만세 운동 계획 탄로나다(천도교 인사(人士) 다수 일본경찰에 잡혀가다)
6월10일-6.10만세 운동 일어나다
6월12일-중국 임시정부 상해(上海)에서 광동(廣東)으로 옮기다
6월21일-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발생
6월?일-동경유학생 전진환(錢鎭漢)등, 협동조합운동(協同組合運動)발기
7월5일-활동사진 필름 검열 규칙 공포(8월1일시행)
7월27일-장개석(蔣介石) 북벌(北伐)개시
8월4일-김우진(金祐鎭) 윤심덕(尹心悳) 현해탄에 투신(投身) 정사(情死)함
9월?일-나운규(羅雲奎) 감독 각본 주연 “아리랑”개봉
11월4일-조선어학연구회(朝鮮語學硏究會) 이날을 “가갸날”로 제정
11월15일-중외일보(中外日報) 창간
12월6일-안광천(安光泉). 김준연(金俊淵)등 조선공산당 재조직(ML당)
12월14일-김구(金九)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
12월25일-일본 대정천황(大正天皇) 죽다. 소화천황(昭和天皇) 즉위
12월28일-의열단원(義烈團員) 나석주(羅錫疇) 식산은행(殖産銀行)과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에 폭탄 투척하다
이해에
*염상섭(廉想涉) 양주동(梁柱東) 등 국민문학(國民文學) 운동 일으키다
*김진섭(金晉燮) 이하윤(異河潤) 등 동경서 해외문학연구회 조직하다
*이병기(李秉岐) 이은상(李殷相) 등 시조부흥(時調復興) 운동 일으키다
*영화 “낙화유수(落花流水)”의 주제가 “강남달”유행
*트럭 자동차가 처음으로 등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