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비공개 입니다
신마을탐방 [191] 동이면 남곡리(3) 살골 | ||||||||||||||||||||||||||||||||||||||||||||
석탄리와 횃불싸움 경로당 추억으로… | ||||||||||||||||||||||||||||||||||||||||||||
| ||||||||||||||||||||||||||||||||||||||||||||
지난 호에 소개한 개미재에서 수북리 쪽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살골이다. 지금은 20호 정도가 옹기종기모여 살고 있다. 따뜻한 오후 볕이 마을 구석구석까지 비춰 전체적으로 포근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오후 2시, 마을회관 문을 열 시간이 되자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 든다. 할머니 방에는 살골에 사는 주민들이 모여 10원짜리 민화투를 치며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옆에 붙어 앉아 귀찮게 하는 낯선 이에게 할머니들이 유일하게 들려준 동네얘기는 이랬다. “우리 동네는 남자들이 장수하는 동네여. 그래서 과부가 없어. 아마 물이 좋아서 그런가봐.” 이 이야기를 바로 옆에 있는 할아버지 방에 가서 하니 모두 고개를 갸웃 거린다. 처음에는 ‘그런가?’하는 반응을 보이다가 동네 전체를 죽 훑어보더니 두 집정도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이 있다고 고쳐 잡는다. 그래도 남자가 장수하는 동네라는 것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싶었다. ◆아름드리 살구나무가 있었다 “그 때는 석탄리 사는 게 쉽지 않았거든. 지금 다리(석탄교)가 그 때는 없어서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했어. 애들 교육 생각해서라도 여기로 이사 오는 게 좋겠더라구. 그래서 산얼기로 안가고 이리로 이사를 왔지. 근데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어. 교통편은 그 쪽이 더 좋아.” 김동일씨의 얘기다. 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마을 토박이 여동철(73)씨가 회관에 들어선다. 얘기가 좀 더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미나리꽝 농사를 짓지 않을 때는 거기서 많이 뒹굴었지. 씨름도 하고. 마을 뒷동산 묏등도 단골 놀이터였어.” ‘살골’이라는 마을이름 유래에 관한 흔적도 여동철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마을 주민들 중 살골에 살구나무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둘레가 한 아름이 되는 큰 살구나무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을 수 있었다. 키도 꽤 컸던 것으로 여씨는 기억했다. 그 아름드리 살구나무가 마을 공동우물 근처에 있었다는 증언이다. “그거 본 사람들이 거의 없지. 지금 마을에 살고 있는 토박이라고 해봐야 나하고 이상철(72), 조남희(71) 정도니까. 우리 어렸을 때 봤거든.”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커다란 살구나무도 살골이라는 마을 이름을 갖게 된 흔적 중 하나는 아닌지 생각해 본다. ◆김응영을 추억하다 김동일씨의 얘기에 여 반장은 바로 발끈한다.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급기야 정월에 즐기던 ‘횃불싸움’(주민들은 해불쌈이라고 줄여 불렀다)으로까지 번진다. 여동철씨가 회관에 오기 전 김동일씨는 이미 ‘석탄리가 근방에서는 최고로 드세 횃불싸움에서 당할 동네가 없었다’고 한참 이야기를 꺼내 놓은 터였다. 그런데 여씨가 와서는 “살골과 개미재 사람들이 모여 해불쌈을 하면 석탄리나 꾀꼬리 애들이 모두 줄행랑을 놓기 일쑤였다”라고 말을 해버렸다. 당연히 그 얘기를 듣고 김씨는 “말도 안된다”며 발끈했다. 여씨도 지지 않았다. 당시에 석탄리가 100호가 넘는 큰 동네였지만 해불쌈에서는 살골과 개미재를 이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얘기 끝에 결국 살골에 살았던 ‘김응영’이라는 구체적인 인물까지 등장했다. “그 양반이 나보다 세 살 위였는데 학교 다닐 때부터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지. 씨름도 잘하고. 항상 그 양반이 앞장서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가지고 해불쌈을 하러갔어. 근데 누가 당해?”
◆살구대신 달디 단 홍시 “처음엔 신씨네 재실 주변에만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캐다 심어서 저렇게 번진 거지. 옛날에는 대나무 쓸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 보리타작, 벼타작 할 때도 필요했고. 지금도 대비를 만들어 쓰고 있어. 사다 쓰는 건 영 못 쓰겠더라구.” 대비까지 중국제가 넘치니 아예 직접 만들어 쓰는 것이 훨씬 좋다는 얘기였다. 여씨네 집에 들어서니 집을 지을 때 함께 심은 감나무가 집 뒤뜰에서 하늘에 그물을 쳐 놓고 있었다. “동네에서는 아마 제일 오래된 감나무 일 것”이라며 여씨가 건네 준 그 감나무의 홍시는 달디 달았다. ◆겨울에도 봄 같은 인생 사는 시인
어려서 한자를 공부하긴 했지만 한시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었던 최선기씨는 독학으로 한시의 어려운 규칙을 하나 둘 깨우치기 시작했다. “옥천에 한시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어요. 동이면 임용재씨나 안남면 유동혁씨 등 몇 명 있었을 뿐이죠. 지역에서 한시회를 만들고 싶어도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전에 있는 모임에 다녔어요.” 얼마 전 최선기씨는 자신의 한시가 수록된 작품집 수백 권을 장계리 향토자료전시관에 기증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한 권, 두 권 쌓여가는 작품집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었다. 결국, 동이면 정수병씨에게 조언을 구해 기증을 결정하게 되었다. “내 자식들도 그렇고 요즘 젊은 사람들 어디 한시에 관심이나 있겠어요. 그냥 두면 불쏘시개로 없어질 것 같아서 그리 했죠.” 작품집을 모두 기증했다고 최선기씨의 작품 활동이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대전유림회에 한 달에 한 번씩 다니며 작품을 제출하고, 대회 참가 요청 서신이 오면 꾸준히 참가한다. “한시를 쓰면 다른 잡념이 없어져요. 까다로운 규칙을 하나 둘 맞춰가며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재밌죠. 국문시하고는 또 다른 맛이 있어요.” 최선기씨의 호는 동성춘(冬成春)이다. ‘겨울에도 봄을 이룬다’는 뜻으로 추운 겨울에도 항상 봄처럼 활기차고 즐겁게 산다는 의미다. 살골에서는 제일 나이가 많은 최선기씨지만 지금도 꼿꼿한 자세로 한시를 지으며 인생을 즐기고 있는 그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호다.
줄무늬 선돌이라는 특징이 있다. 옥천문화원에서 발간한 ‘옥천의 문화재’라는 책자에 따르면 줄새김은 같은 줄무늬 선돌인 수북리 동정선돌과 반대로 왼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에 8∼10cm를 남기고 쪼기 수법으로 새겼다. 모두 45개의 줄새김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선돌을 ‘장승’이라 칭했다. 이 선돌 말고도 지금은 수몰된 지역에 네댓 개는 더 있었던 것으로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근데 그 장승이 다 어디 갔지?”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주민은 없었다. 어디 잘 지은 주택의 정원석으로 주저앉아 있는 건 아닌지, 씁쓸함이 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