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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미학 스타디(2021.10.)
여백의 예술
이우환 지음, 김춘미 옮김, 이태호 발제
◆ 여백의 예술
▶ 여백의 예술 : 예술 작품에 있어서의 여백이란, 자기와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열리는 앙양(昂揚)된 공간을 말한다.
▶ 무한에 대해 : 무한이란 자기에서 출발하여 자기 이외의 것과 관련을 맺을 때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작품은 자기와 타자가 상호 매개를 하는 비약의 장으로 어중간하고 애매하다.
▶ 중간자 : 한국에서 20년, 일본에서 40여 년, 그간에 삼십여 년을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를 뛰어다녔다. 차이성, 외부성, 이태성으로 살아가는 나날은 격렬하고도 슬프다.
▶ 동일성과 차이성 : 동일성과 차이성의 양면적인 제작현장에 선다. 현장이란 나와 타와의 교섭의 장면이며, 그것은 산다고 하는 모순율의 장소에 서 있는 일이기도 하다.
▶ 표현과 신체 : 명료함은 두뇌 중심적 사고에 의해 외부와의 걸림을 끊고 신체를 업신여기고 소외시키는 데서 비롯된다. 신체적 행위를 통해 무한에 닫는다.
▶ 회화의 명운 : 인간은 세계를 만들어 세우려 하고 자연은 그것을 대지로 되돌리려고 한다. 있게 하려는 힘과 없애려는 힘의 맞섬은 아름다운 겨룸이다. 나는 이 밸런스를 그리고 싶다.
▶ ▶ ▶
▶ 관계항(stone, gum measuring, space) : 나의 관심은 이미지나 물체의 존재성보다 만남의 관계에서 오는 현상학적인 지각의 세계에 있다.
▶ 돌을 찾아서 : 돌은 모두 각각의 모습, 색, 이미지, 언어, 역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똑같이 돌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신비이며, 얼마나 넓고 깊고 풍요로운가!
▶ ▶
◆ 여러 작가들
▶ 백남준(白南準) — 비디오를 넘어서 : 친구 요셉 보이스와 페어pair, 비디오와 놀이
▶ 다니가와 간(谷川雁), 혹은 은폐의 몸짓 : 존재는 숨기를 좋아한다. -헤라클레이토스
▶ 후루이 요시키치(古井由吉) 혹은 1970년대의 예술 : 살짝 비켜남과 새로움 창출
▶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 씨 : 투명과 불투명 그 명암의 특이한 앙상블의 두께
▶ 나카가미 겐지의 혼재성 : 빛과 어둠이 착종혼재하고, 질퍽질퍽하면서도 선명한 엑스터시
◆ 예술의 영역
▶ 회화에 있어서의 추상성의 문제 : 내면과 외면이 만나는 장소로서의 회화에는 보다 추상화된 것이나 암시적인 형태의에 의한 매개와 비약이 요청된다.
▶ 시각에 대해 : 나와 외계가 상호관계에 의해 세계한다는 입장을 말한다면 작품 또한 차이성과 비동일성의 일종의 관계항인 것이다.
▶ 외계와 함께 : 제작에 있어서 일방적인 이성의 발로가 아닌, 외계와의 상호교류작용이 비약성과 초월성을 보장한다.
▶ 화가가 맡은 바 : 근대기술의 발달에 의해서 화가는 거꾸로 ‘이념의 실현’이란 속박에서 해방되어가고 있다. 화가는 겨우 스스로 세계를 느끼고 세계와 대응하는 장에 서게 되었다.
▶ 로봇과 화가 : 로봇의 미학은 그 근거율부터가, 불확정한 개성이나 질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화가는 그려야 할 것을 못 가진 표현자이다.
▶ 회화의 설정성(매개성) : 회화의 설정성은 현실 쪽으로도 관념 쪽으로도 비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된다.
▶ 그림이라는 둘레(輪) : 잡다한 물건이 동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이 아니라 일종의 통일성을 강하게 느끼는 것은 역시 회화의 뛰어난 장소성 때문임에 틀림없다.
▶ 화가와 두 개의 눈길 : 화가는 분열증 환자나 장님이 되지 않을뿐더러, 날카롭고 풍요로운 두 개의 눈초리를 교묘하게 구분해서 능숙하게 다루는 불가사의한 인종인 셈이다.
▶ 일순간에 보이는 것 : 텐션이 높은 찰나적인 어떤 장면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구조화시켜 보편성과 지속성(영원한 지금)을 지니게 하고 싶어하는 것이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 다시 칠하기 : 잘 씻거나 수복했다 해도 일단 손을 댄 것에서는 예외 없이 모조품 냄새가 난다. 원작자의 스피드감이나 호흡, 마음의 진폭이 사라져 버리고 디자인처럼 밋밋해진다.
▶ 모필에 의함 : 나에게 작화(作畵)란 델리케이트하며 마지인 세계와 관련을 맺게 되는 산 단서이다. 나는 모필로 힘들고 불명료한, 바꿔칠 수 없는 산 순간을 깨우치는 일도 잃기 싫다.
▶ 붓의 묘미 : 붓은 쓰는 사람의 생각이나 힘 이상의 그 무엇인가를 수용하게 되고 종이와 붓과 손은 큰 세계로서 공명한다.
▶ 회화의 색채 : 회색은 존재성이 약하고 개념성을 결여하고 있는 대신에 애매하며 변하기 쉬운 미확정적인 세계를 나타내기에 어울리는 색이다. 이 회색은 바로 회화적인 색일 것이다.
▶ 산 손 : 끊임없이 타자와 사고가 내포되는 손이야말로 그림을 새로운 지평으로 이끈다. 산 손이 화가를 낳는 것이다.
▶ 손에 대해 : 신체는 나에게 속하고 있음과 동시에 세계에도 속하고 있는 양의적인 것이다. 이러한 안과 밖을 가르고 맺는 경계영역에 관계되는 신체 중, 그 가장 첨예한 것이 손이다. 손은 뇌의 친구이다. 손을 종속물(수단으)로 간주하려는 생각들(기독교, 데카르트, 마르크스)은 잘못이다.
▶ 회화와 조각의 처소 : 회화에서 이루어진 화면은 내적으로는 열린 투명한 세계이면서 동시에 외적으로는 불투명한 대상으로 타에서 고립한다. 조각은 장소적이며 연관적인 대상이다.
▶ 조각의 모티프 : 내 모티프는 내부와 외부의 마디(결정점)에 상상의 나래를 다는 데 있다.
▶ 조각의 조건 : 살아 있는 조각의 조건은 얼마나 주변 공간과 어울리고 거기에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조각에서 늘 나와 그와 작품은 삼각관계를 엮게 되는 셈이다.
▶ 철판과 돌에 대해 : 철판은 인공에, 돌은 자연에 가깝다. 철판을 인공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 돌을 자연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 거기에 철판과 돌의 만남의 가능성이 나타나게 된다.
▶ 판화라는 것 : 판화의 매력은 오히려 판이라는 무한한 가변성을 내포하면서 동일성을 가장하는 불확정적인 중층성(重層性)에 있다.
▶ 판화에 대해 : 판과 그림의 상호작용은 판과 회화의 만남의 필연성을 소중히 함으로써, 작가와 판과 이미지라는 삼자를 함께 지향하려는 입장이라고 해석된다.
▸ 복제성의 언저리 : 판화를 실체-신앙에 의한 복제성으로 보기도 하는데, 나는 실체주의자도 허상주의자도 아니며, 스스로의 삶의 한순간, 한순간 가운데서 많은 것을 보고자 한다.
▸ 무명성(無名性)의 언저리 : 특정한 이미지나 의미를 지시‧강요하는 데 유명성(有名性)의 특징이 있다. 무명성이란 작가를 넘어설 것, 곧 개인의 이미지를 탈피한 지평에 나타남이다.
▸ 찍는 일의 언저리 : 판화란 찍는 일이 중요한 모멘트이다. 아무리 예쁘게 찍힌 화면이라도 아트가 빠지면 회화가 아니다. 아트란 언제나 심층적인 불확정한 초월 세계의 표출이다.
▸ 사인의 언저리 : 사인이 정확, 명료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것은 사인하는 방도에 따라서는 그것이 기호성을 넘어서 무언가 살아 있는 회화성을 나타내는 점일 것이다.
▶ 재제작 –인터뷰에 응해 : ‘재제작’이 과거의 작품과 똑같이 제작하는 것을 뜻한다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제작되는 ‘것’과 ‘시간’과 ‘장소’가 작품에 크게 작용하고 반영된다는 일이다.
▶ 이케바나[生げ花, 活げ花](꾸밈꽃, 살림새의 꽃) : 이케바나는 옮겨놓는 일이며 다시 짜는 일이고, 꽃을 꽃으로 높이는 일이다. 꽃만이 꽃이 아니며, 꾸미면(살리면) 모두 꽃이다.
▶ 이케바나를 생각하다 : 이케바나가 거대화 현상으로 나아가는 게 퇴행성 같다. 영웅적인 굉장한 공간성보다는 식물 자신의 꾸밈없는 시간성에 좀더 마음을 썼으면 한다.
◆ 새로운 표현의 장을 위해
▶ 20세기의 미술 : 20세기의 미술은 전람회 미술, 미술관 미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은 그 다양화와 실험성, 보존성으로 보아 점점 더 미술관을 필요로 할 것 같다.
▶ 미국의 미술 : 미국의 20세기 미술은 한없이 풍요로우면서도 왠지 공허하다. 미국 미술이 이룩한 위업은 미술 자신의 신화 만들기이며, 상상을 먼 여행길로 나서게 하지는 못했다.
▶ 일본의 현대 미술에 대해 : 일본 미술에 가장 부족한 것은 아마도 문제의식일 것이다. 문명과 생명의 근원을 응시하는 힘에 의한 열린 투쟁의식이 필요하다.
▶ 부정에의 의지 : 문화라는 이름의 환상의 이데올로기성만큼 인간을 장님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제도 속에 가두어 넣는 것도 없다. ‘미술’ 부정에의 의지가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새로운 표현의 장을 위해서 : 자기 확립을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외부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자기를 대하고 표현의 성립과 기원을 묻는 데서부터 시작했으면 한다.
▶ 현대 미술과 일상 : 뒤샹이 변기를 <샘>이라는 이름으로 전람회장에 운반해온 이래 일상이 그대로 예술영역으로 등장했다. 이것은 미술표현의 사멸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 혼돈에의 동경 : 세기말부터 종래의 가지각색의 패러다임의 뒤섞기와 짜바꾸기가 유행했다. 혼란의 앞길에 미지와의 대화의 처사에 따라 현대 미술의 방향과 성격이 정해질 것이다.
▶ 쇠퇴의 미술 : 내가 인류가 머지않은 장래에 끝장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쇠약해졌다는 쇠퇴감에서 온다. 미술 분야에서 파편을 주워 모으는 노인성 취향이 엿보인다.
▶ 위협 : 존재감으로 압도하는 작품이 있다. 독기어린 이미지로 덤벼드는 작품이 있다. 환각작용으로 능락하는 작품이 있다. 이들은 겁주기(위협)이며 무기력한 사디즘에 불과하다.
▶ 이합집산 : 이자(異者)가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공간이 현대이다. 공동환상이 성립하지 않는다. 현대의 작품은 공동체의 상징물도 아니지만, 작가의 자기 표상물이어서도 곤란하다.
▶ 해체를 향해 : 신학 → 인간학 → 인류학 → 생물생태학(생물과의 차별 철폐 : 돼지님, 풀님, 21C) → 자연학(무기물과 함께 평등 : 돌님, 흙님, 22~23C) → 인간의 유기물(30C) 문화라는 양식이 해체로 향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예술은 문화의 무화를 시사하는 표현이 된다.
▶ 현대의 키워드 : 현대의 키워드는 짜바꾸기, 차연(어긋나기), 되풀이이다. 철학자나 예술가의 모티프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도 지겨워지면 하늘이라도 바라보고 멈춰 있을까.
▶ 뇌 중심 사고 : 뇌 중심 사고의 성과로 콜론(복제)인간이나 합성인간이 출현할 것 같다. 콜론은 동일성이, 합성인간론은 비동일성이 떠오른다. 자기와 신체와의 관계가 위태롭다.
▶ 관리 밖 : 아드르노의 말처럼 관리되지 않는 외부로서의 자연성의 가치에 대해 인간은 너무나도 무지하고 오만한 것이 아닌가.
▶ 상상력 : 내면성과 외부성의 만남 가운데서 자기는 타자성에 눈뜨게 된다. 상상력이란 타자성에로의 눈뜨는 일이며, 그것은 무한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다.
▶ 깨우친다[悟, 覺]는 것과 안다[知, 識]는 것 : 인간은 깨친다는 타력본원(수동성)적인 힘과 알 수 있다는 주체적인 구축 논리도 지니고 있다. 깨우침과 앎의 짜모임 가운데 살고 있다.
▶ 투명하다는 것 : 자연의 힘에 의해 내가 투명해질 때와 나의 힘에 의해 사물을 투명하게 할 때가 있다. 나와 자연의 접점을 찾아 상호작용에 의한 반투명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 요리의 짜냄 :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이 각각 전혀 다른 장소에 있었던 것들이, 한 표현자의 영감으로 발견되고 모아져 연결되어 요리가 된다. 조각, 음악,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 동아시아의 요리 : 일본 A+b=A’, 한국 A+B=A’B’, 중국 A+B=C. 요리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보이는 특징적인 성격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 눈의 섭리 : 제각기 무관계로 있는 공간이나 돌이나 철판이 하나의 작품으로 결부될 때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경험, 사색, 부단한 훈련에 의해 초래되는 번뜩임이라고 해도 좋다.
▶ 명암 : 여백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공백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이 서로 호응하여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빛에도 어둠이 포함되어 있고, 어둠에도 빛은 들어 있다.
▶ 작품의 장소성 : 작품의 제요소가 사건적인 서로 관계지움으로 인해 거기에 바이브레이션이 일어나고 시공간이 열려 장소가 된다. 회화적 세계에서는 이를 여백이라고 부른다.
▶ 미술관의 역할 : 미술관은 정보센터라기보다는 미술적인 것에의 게몽이라든가, 또는 미술적인 것과의 보다 직접적인 맞닿음의 장이 될 것이다.
▶ 동양적이라는 말 : 동양적이라는 말만큼 미심쩍은 것은 없다. 나는 ‘동양적-오리엔탈’이라는 말에서 해방되어 한 작가로서의 존재와 그 개인적인 일을 묻는 지평에 세워지기를 바란다.
◆ 사물과 말에 대해
▶ 모노파(もの派)에 대해 : 모노파는 내부와 외부와의 대화를 낳고 아득한 신화작용을 증폭해간다. 해방의 표현세계를 추구하는 한, 놀라움과 상기(想起)의 몸짓 가운데 살아 있을 것이다.
▶ 기원 또는 모노파에 관해 : 모노파에는 고정과 중심이란 없다. 따라서 구심성도 없다. 모노파가 한 일은 역사의 연속성에 균열을 넣는 일이었으며, 내적인 전체성을 분해한 일이다.
▶ 근대의 초극 : 근대의 초극은 특정한 보편신앙에 의한 세계지배의 사상과의 투쟁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술가로서는 외부나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초월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억측 비평 : 억측 비평은 주관이나 이데올로기인 체하면서 어쨌든 상대를 깎아내리고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악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 친절심 : 무언가를 주어도 그것을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 홀로서기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경우 은혜가 원수가 되기 쉽다. 친절심이란 억제하지 못하는 나르시즘의 말로와 비슷하다.
▶ 말과 침묵 : 데리다와 라캉 등은 여백을 논해도 난외(欄外) 같은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칸트, 하이데가, 스피노자, 석가 등은 공백의 울림이 침묵의 소리가 된다.
▶ 일본어와 번역 : 일본어(혹은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모국을 떠난지 오래고 나의 부평초 같은 삶의 방식이 언어의 존재를 위태로운 것으로 만든 것 같다.
▶ 언어에 대해 : 언어란 원래 어딘가에 편재하거나 머릿속에서 그리는 컨셉의 언표와는 다른, 제3의 무엇이 아닐까. 언어란 순수하게 인간의 일방통행적인 제품이라고 할 수 없다.
▶ 언어가 : 언어가 사고 형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언어가 주어중심이나 술어중심을 넘어 다이내믹한 관계성의 두드러짐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좋겠다.
▶ 사막에서는 : 사막에서는 직선적인 상황판단과 오성을 작동하여 스스로 헤쳐가야 하며, 숲에서는 곡선적인 친화와 감성을 작동시켜 이자(異者)와 함께 가야 한다. 그럼 도시에서는?
▶ 베르가모의 저녁 무렵 : 저녁 무렵 큰 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한 노인이 하늘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괴테는 이 동네의 저녁 무렵을 좋아했을 것이다.
▶ ▶ ▶
▶ 자연이라는 것 : 자연은 끊임없이 자극적인 타자이며 영원히 대상화되지 않는 외부이다.
▶ 한국인의 문화와 자연 : 한국의 자연이라는 단어가 도피를 위한 길이 아니라, 큰 다이내미즘을 표현하는 것이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에 대한 엄격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 풍화로부터 : 오랜 세월에 걸쳐 풍화되어 당시의 완성도는 허물어졌지만, 계속 예술이고자 하는 힘과 자연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힘의 날카로운 대립이 나에게는 매력적이다.
▶ 미지와의 대화 : 모든 가치와 예술의 중심을 인간이 만든다는 의식에서 조금 비켜나자. 자연으로 인간을 해방시키자. 만들지 않은 것에도 가치를 인정하고 외계와의 연계를 모색하자.
▶ 그림을 배우는 소년에게 -어느 중학생에게 보내는 편지 : 그림을 배운다는 것은 보는 일의 근사함, 세계의 비밀에 접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가 경이롭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다.
◆ 화집(畫集)의 단장(斷章)에서 : 1~100
◇ 제1화집(미술출판사)에서 : 1~58
▶ 1~10 :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장으로서 다시 짜세우고, 주객의 논리를 넘어선 작품을 다루려고 한 것은 현대미술사 가운데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1) 나는 얄궂게도 형태도 색도 있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세계로 녹아들게 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2) 존재한다는 것은 점이며 산다는 것은 선이다. 나 또한 점이며 선이다.(8)
▶ 11~20 : 종이는 점의 언저리에서 바다가 되어 퍼지고, 점은 섬으로 바꾸어 거기 떠 있데 된다. 예술이란 이러한 번저의 구조가 낳는 세계감이다.(11) 자연의 얼룩은 그것이 아무리 굉장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인간의 영위가 결여되어 있다. 작가의 피가 통하는 표현을 통과한 얼룩일 때, 비로소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자기의 무의식을 깨어나게 하고 한층 더 깊은 자연으로 이어지는 길이 될 것이다.(19)
▶ 21~30 :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자에게 예술은 무용지물이다.(21) 켠디션이 좋고 기력이 충일하며, 호흡에 확연히 세계의 리듬을 느낄 때 좋은 작품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일은 놀이나 노동의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수양과 연마 가운데서 기가 무르익어 생기는 터트려짐의 차원의 것이라고 할 TN 있다.(27)
▶ 31~40 : 예술에서는 틀린 표현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것이라면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가치가 있는 것은, 삶의 의욕과 동시에 죽음의 욕구를 수반하는 모순된 양상을 지니는 것이다.(34) 종이와 나와의 가장 생생한 맞닿음, 그 교섭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실천이 드로잉인 것이다. 그것은 계획이나 구조로부터도 자유로우며 자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참으로 화가의 영위에 어울린다.(35)
▶ 41~50 : 조각작품은 틈새가 많은 유기적인 구조체로서 보다 큰 세계를 끌어안은 것이어야 한다. 작품이 완결화를 싫어하고 임시방편적인 짜세움의 양상을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44) 내 일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게 하는 양의적인 전이작업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접점이야말로 작품이라고 하는 ‘즉卽’의 차원인 것이다.(45)
▶ 51~58: 최고의 표현이란 무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것을 비껴놓음으로써 한층 더 선명한 세계를 보이게 만드는 일인 것 같다. 예술가의 일이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로 하는 데에 있다.(52) 작품이 작품 자체보다는 크고 완벽한 세계를 개시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도달되어진 어중간함으로 짜여질 것이 바람직하다.(57)
◇ 제2화집(도서출판사)에서 : 59~100
▶ 59~70 : 필경 작품이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며 관념의 덩어리도 될 수 없다. 그것은 현실과 관념 사이에 있으면서 양쪽에서 침투당하고 또한 양족에 영향을 미치는 매개적인 중간항이다. 이 중간항적인 요소야말로 작가를 넘어서는 것이며, 일상을 높인 작품인 것이다.(63) 외부는 무한하다. 물론 침투당하는 내부 또한 무한에 이어져 있다.(66) 끝없는 여백에의 탐구가 나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한다. 여백은 현실이니 관념이니 하는 말을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퍼짐, 번뜩임과 예감의 화면이 불러낸 종잡을 수 없는 타자의 나라이다.(68)
▶ 71~80 : 점에서 시작하여 점으로 돌아간다. 점의 이합집산이 삼라만상의 양상이고 그 반복이 우주의 무한을 가리킨다. …… 곧 무한이란 나의 아이디어나 일반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의 밖, 장의 무한정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리라.(71) 보는 것에는 몇 개인가의 단계가 있다. 대상의 언어를 본다. 대상을 본다. 대상을 무로 본다. 제1단계는 언어론적이고, 제2단계는 실존론적이며, 제3단계는 장소론적이다. 미술에 어울리는 것은 장소론적인 보기이다.(75)
▶ 81~90 : 최근에는 자기 주장을 접어 줄임으로써 점덤 더 표현이 단순화되고, 한층 더ㅗ 크게 바탕이 활성화되는 여백의 역학에 무게가 놓이게 된다.(83) 내 작품은 여러 가지 틈새로 짜여져 있다. 따라서 안쪽의 공기가 바깥쪽으로 흐르고, 바깥쪽 공기가 안쪽으로 침투아여 언저리에 불학정적이며 미지먹인 존zone이 퍼지는 세계이다. 드디어 언쪽만의 문명이 산소결핍상태가 될 때, 외부와 컨텍트를 지니는 작품의 진가를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90)
▶ 91~100 : 작품과 보는 사람 사이에 공백 같은 침묵이 퍼져 나갔으면 싶은 바이다.(91) 산뜻한 한 장의 철판이 있다. 그 건너편에 답답한 몇 개인가의 돌이 있다. 멈추어 있던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짜임새가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리라. 산뜻한 한 장의 철판은 하나의 생각이라도 좋다. 답답한 몇 개인가의 돌은 공기라도 좋다. 이윽고 언어가 그치고 언저리에 여울여울 공백이 퍼져간다.(99)
◆ 후기 : 여기에 모은 단문을 중심으로 하는 문장들은 1967년부터 최근까지 여기저기서 써낸 것 중에서 고른 것이다. 내용은 제작하면서 틈틈이 그때그때의 나의 미술 표현에 대한 단상(短想), 현대 예술 일반에 대한 견해, 유럽이나 한국, 일본의 문화감각DP 대해서 등 잡다한 것의 그러모음이다. <2002년 8월 이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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