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46) - 뜻깊게 치른 큰누님 내외의 팔순 잔치
지난 주말에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큰누님 내외의 팔순을 기리는 가족모임이 있었다. 자녀들이 뜻을 모아 마련한 자리이니 아무런 부담 없이 꼭 참석해 달라는 누님의 간곡한 당부가 사촌동생들에게까지 일일이 전해져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회혼(결혼 60년)을 눈앞에 둔 큰누님내외는 7남매를 낳아서 훌륭하게 키워 사회 각계각층에서 한 몫을 감당하는 중견사회인으로 배출하여 다복하고 평화로운 말년을 보내고 계신다. 소박하면서도 뜻깊게 치러진 이 자리에 평소에 써놓은 아래 글을 30여부 복사해 가서 나눠주도록 당부했는데 연회 말미에 가족들이 덕담을 한 마디 하라는 권유를 따라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며 두 분의 다복하고 평안한 삶이 더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기원하였다.
이현택,김인순 내외분의 팔순(八旬)을 기리며
사랑하는 이현택 자형 내외분의 팔순을 맞이하여 이처럼 아름답고 복된 자리를 마련한 가족 여러분들에게 감사와 치하를 드립니다. 두 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1996년 10월 필리핀 여행 때 큰누님께 쓴 편지와 2007년 11월 영광읍 고성리의 자형 댁을 찾았을 때 쓴 글을 통하여 자형 내외분과 자녀들에 대한 축하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1. 고성리 큰 누님 댁을 찾아서
2007년 11월 3일, 재본 아저씨의 장례 조문 차 고산을 다녀오는 길에 영광읍 고성리의 큰 누님 댁을 찾았다. 공음에서 대산으로 오는 중간지점에 영광으로 가는 길이 있어서 4차선으로 뚫린 광주-영광 노선을 타려고 영광 방향으로 차를 몰아 4-5분쯤 진행하니 잘 정비된 하천이 나오고 이어서 ‘영광군입니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어릴 적 고산에서 산아치재를 넘어 고성리에 이르면 하천이 있던 기억이 떠올라 눈을 돌리니 바로 고성리 누님네 집 뒤의 언덕이 보이고 누님 네 집 앞으로 큰 길이 나 있어서 차를 그쪽으로 돌렸다.
집 앞에서 차를 세운 후에 일하는 동네 아저씨를 향하여 허리를 굽히고 이현택 씨 댁이 맞느냐고 물으니 ‘태호 아닌가?’ 하며 아는 체를 하신다.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그때서야 자형의 4촌 동생인 현수 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내를 받아 집안으로 들어서니 어렸을 때 여러 차례 들렀던 풍경이 떠오르고 누님이 거처하던 작은 방도 눈에 익었다.안쪽으로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니 어렸을 적에 보았던 구조와 크게 다른 모습이어서 골조는 놔두고 수리를 하였는가 물었더니 1962년에 옛집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1959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후에는 새 집에 가본 적이 없었던가 보다. 중간에 갑연 할아버지 장례식 때 찾아 본 듯도 한데 그때는 집안을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던 듯,,
현수 씨가 큰 집을 간수하는데 따른 고충을 토로하기도 하였지만 규모가 큰 주택, 넓은 뜰과 주변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계신 깔끔함과 노고가 한눈에 느껴지고 부자 집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아름다운 시골집을 보는 마음이 흐뭇하다.
현수 씨가 말하기를 전에는 자형이 영광군에서는 가장 다복한 분이 아닐까 하였는데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이어서 규모가 큰 부자 집에 시집와 시부모 잘 섬기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으며 가문의 융성과 큰살림을 잘 지탱하고 발전시킨 공이 클 뿐 아니라 지금도 동네 분들에게는 시어른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통 크게 베푸는 큰 누님의 부덕(婦德)과 인품은 사임당에 못지 않는다고 상찬하였다.그 말을 들으니 친정에서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던 큰 누님의 역량과 덕망을 시집 쪽에서 더 크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고맙게 여겨졌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잠언 31장 10절)는 말씀의 주인공이 이러하지 않겠는가? 비단 큰 누님뿐만 아니라 출가한 누나와 동생들, 우리 집안으로 시집 온 분들도 시댁에서 이룬 업적과 공헌을 친정 쪽에서는 잘 모르고 있지 않을는지,,,,,
어렸을 때 큰 누님을 따라 고산에서 고성리를 갔던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공음을 거쳐 산아치재라는 고개를 넘어 40리길을 걸어가는데 어머니와 작은 누님이 배웅에 나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25리 지점에 있는 산아치재까지 동행한 후에 발길을 돌렸다. 그때의 장면이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 있어 지난번 중국여행 때 한용,행진,명희 동생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절반이 넘는 배웅 길‘이라는 제목을 붙여 여행기에 적어 놓았다.
10여일 전 큰 누님이 전주에 입원중인 큰 형님을 문안하러 온 길에 광주에 오시겠다고 하여 어머니 모시고 고창에 가서 국화축제도 보며 서울, 광주, 고창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담소하는 시간에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누님도 그 때 일을 기억하고 계셨다.
초등학교 시절에 법성 작은 아버지 댁, 고성리 큰 누님 댁, 대마 외가집, 복산치 한용 동생 외가집 등을 순례하던 일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어서 기회가 닿으면 그 길을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오늘 고산 가는 길에 법성포를 거쳐 공음면 산아치재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구수리 산소에서 노랗게 핀 국화꽃도 사진에 담았다..
이 글을 적노라니 우리 고장 출신 서정주 시인의 명시, ‘국화 옆에서’의 구절이 생각난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은 꽃이여’
사랑하는 큰누님,
이제 멀고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고결하고 아름다운 삶,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날을 가꾸어 가소서.
(2007년 11월 13일)
2. 필리핀 여행 때 쓴 글에서(1996년 10월)
사랑하는 누님에게,
오늘은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개천절인 10월 3일, 엊저녁 천둥 번개 치며 세차게 내리던 비도 그치고 밝은 해가 떠오르는 아침에 김포공항 출국장에서 이글을 씁니다.
매번 여행할 때마다 가족들에게 여행기를 겸하여 편지를 써 왔는데 이번 여행은 누님과 함께 하는 셈이 되겠군요.
사랑하는 누님,
누님에 대한 저의 가장 오랜 기억은 벌써 46년이 지난 6.25 전쟁 전후의 6,7세 때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제 나이도 50이 넘어 중년에서 노년이 다가오는 생의 황금기를 거의 다 보내는 이때에 저보다 더 빨리 황혼녘에 이른 누님께 이글을 쓰노라니 여러 가지 상념이 착잡하게 뒤얽히는 듯 합니다.
저희가 어려서 누님 댁에 걸어갈 때 40리 걸이 한 나절 걸렸는데 서울에서 마닐라까지 2500km, 6000리 길을 한 나절에 날아가고 있습니다. 여행은 항상 가벼운 흥분과 약간의 긴장, 호기심이 뒤따라 우리 삶에 활력과 생기를 돋아줍니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여름이나 겨울방학의 모처럼 나들이는 영광 고성리 누님 댁을 필두로 하여 대마 외가 집, 조금 더 멀리가면 장성 삼계면 한용 네 외가 집까지가 저희들의 여행 코스였지요.
사랑하는 누님,
6.25 전쟁이 나던 해, 작은 누님과 우성 형(자형도 그때 동행하셨지요?)과 서울을 떠나 도보로 고산까지 피란 가며 겪었던 전쟁의 쓰라린 경험이 우리 민족 모두의 고통이면서 우리 가족에게도 많은 시련을 안겨주었는데 근 50년이 지난 지금도 남북 간의 대치와 긴장은 가시지를 않고 있으니 우리 세대 삶의 삭막함과 고달픔이 언제나 사라질까요?
저의 초등학교 시절의 많은 추억들은 누님과 관련된 부분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이던가, 한 겨울에 행진 한용 명희랑 넷이서 눈이 펄펄 쏟아지는 가운데 영광읍에서 고성리까지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 명희는 저보다 네 살이 적은데 눈은 오고 날씨는 추워서 제가 업고 가기도 하였지요. 그때던가, 제가 누님 댁 큰 질그릇을 잘못 건드려 깨뜨린 적이 있습니다. 누님도 시집살이 중이어서 당황하셨겠지만 어려운 내색하지 않고 괜찮다고 그랬습니다.
자형은 그 시절 어린 저희들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방문할 때마다 용돈도 주시고 처가인 고산에 오시면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며칠씩 묵고 가셨는데 한번은 자형 따라 사랑방에 놀러갔다가 잠이 들어 자형 등에 업혀 온 기억이 납니다. 자형과 함께 저희들의 어린 시절을 살찌고 즐겁게 해 준 좋은 추억들을 갖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게 여깁니다.
7남매를 다 고등교육까지 마치게 하고 사회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느라고 얼마나 힘드셨던가요? 그러나 저는 누님께서는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많은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할 도리와 본분을 잘하였을 뿐 아니라 나름대로 모두 사회생활의 한 몫을 감당하는 훌륭한 자식들로 키워내셨고 자식들과 더불어 화목하고 평안한 여생을 보내실 수 있으니 어찌 큰 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누님,
짧은 여행이라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글 쓰는 시간은 제약되어서 생각이 훨씬 앞서 가고 내용은 이를 다 나타내지 못하여 아쉽지만 누님 내외와 조카들에 대한 저의 사랑과 호의를 마음 속 깊은 데서 보내드립니다. 사는 동안 좋은 동생과 처남, 외삼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자형에게도 남은 때에 더욱 건강하시고 복된 일이 많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누님께 글을 쓰며 보낸 필리핀 여행은 즐거웠습니다. 사랑과 행복, 소망의 삶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펜을 놓습니다.
1996년 10월 6일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사랑하는 동생 태호 드림‘
첫댓글 많은 형제자매간의 우애와 친목이 돈독함에 부러움과 아울러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평균수명이 7,80대로 높아지면서
회갑잔치는 물론 칠순 희수년 차림도 범상하게 지내는 시류이지만, 팔순잔치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귀하고 복된 잔치 아닙니까? 김교수님 내외분의 팔순을 기리며 더욱 다복하고 강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 손위 누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솔깃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