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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는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일이 생기면 그를 억지로 앉혀놓고 술부터 마시자고 했다.
그도 소문난 애주가였기 때문에 술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 무슨 일이냐고 척 봐도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다 죽어가는 사람 살려놨더니, 은혜도 모르고. 세상 참 많이 야박해졌어요. 게다가, 형은 환자들한테도 말투가 그래요?”
그가 맥주를 배꼼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술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마구 신경질을 내며 술을 따르라고 명령했다. 그는 황당해하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쿠션을 던졌다.
“너 내 인간성을 시험하지마라.”
“말로 안 되면 항상 때리더라, 형은.”
내가 기를 세울 때면 그는 사정 봐주지 않고 기를 도로 죽였다. 하지만 처음보단 많이 발전한 셈이다. 스리슬쩍 말도 낳고 말이다.
그를 따라갈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꽤 술을 좋아했다.
“그래서 고민이란 게 뭔데.”
물론 고민은 없었다. 술이 마시고 싶긴 한데, 돈도 없고 해서 고민을 핑계로 그에게 술을 얻어먹자, 뭐 이런 심산이었다. 그는 입 밖으로 말은 안했지만 나를 꽤 신뢰하고 있는 듯 했다. 가끔이지만, 자신의 환자들의 얘기도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툭하고 그의 팔을 치며 물었다.
“형도 첫사랑 같은 거 해봤어요?”
그가 힐끔 나를 쳐다보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없는 걸로 아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이번엔 그가 내게 물어왔다.
“넌? 첫사랑 같은 거 있었어?”
나는 씁쓸해하며 가슴 아픈 시늉을 했다.
“없었어요.”
“솔직히 누가 너같이 촌스런 놈을 좋아하겠냐. 그냥 예의상 물어봐준 거뿐이야.”
그럴 줄 알았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다시금 생각하는 거지만 그는 외모만큼은 환상이었다. 거울로 나를 들여다보다가, 그를 보면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다.
“그래도 짝사랑은 있었어요. 형처럼 무신경하고, 무관심한 남자는 그런 감정 모를 거예요.”
그가 대뜸 말한다.
“좋은 거 아니잖아.”
“그거야 모르죠.”
난 캔 맥주 한 병을, 그는 소주 한 병을 다 비운 채 거실 바닥에 벌러덩 누워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만의 비밀을 그에게 들려줄 생각이었다. 그는 내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끝까지 들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마어마한 비밀을 폭로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건 형한테만 말해주는 거예요.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를 좋아한 적이 있었어요.”
그가 동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빛에 당황하는 기색과 호기심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내가 가슴에 품고 있던 추억을 차근히 얘기해주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호감을 가지고 이것이 좋아하는 마음은 아닐까 라는 괴로움에 시달리게 했던 내 첫사랑이자 짝사랑의 추억을.
“엄청나게 잘생긴데다 싸움도 잘했어요. 우리학교 숨겨진 짱이었거든요.”
“짱이면 짱인 거지 숨겨진 짱은 또 뭐야.”
나는 그에게 뭘 모른다며 손가락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우리 학교에서 싸움을 가장 잘했지만 이른바 폭력써클의 일원은 아니었거든요. 자기보다 약한 녀석을 상대로 괴롭힌 적도 없고, 누구에게나 자상한데다 친절했어요. 못하는 운동도 없죠. 머리도 굉장히 좋았어요. 무두들 녀석을 퍼펙트라고 불렀죠.”
항상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내가 접근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여자 애들에게도 사내놈들한테도 인기가 많았던 내 첫사랑의 주인공은 그 존재감 자체가 모든 이에게 결코 평범하지 못했고 어떤 말도, 특유의 행동 없이도 숨 쉬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것을 나는 마성이라고 불렀다. 나는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어서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절묘한 타이밍으로 매번 녀석에게 접근을 했다.
나는 녀석과 예상보다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종혁이가 친하지 않은 반 아이는 없었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한 녀석이었다. 모두를 똑같이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 의도는 좋다. 하지만 상대방에게는 상처를 떠안겨 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녀석에게도 가장 친하고 가장 신뢰하는 친구 3명이 있었다. 그 놈들이 우리 학교에서 전교생이 다 아는 명물로 이름 높았던 자해 공갈단이었다.
아직까지 나와 친분을 가지고 있는 정훈이는 종혁이의 사촌으로 녀석의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나는 그런 정훈이를 부러워하고 시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훈이를 향해 웃고 있는 종혁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웃음은 내게 보여주었던 미소와는 사뭇 달랐다.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던 미소가 아니었다. 그렇게 즐겁게,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종혁이가 베풀었던 그 친절은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나는 알았고 실망했으며 괴로워했다. 종혁이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가지거나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녀석이 웃고 있으면 보조개가 생긴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딱 한사람에게만 보여주는 미소. 내 첫사랑이 유일하게 정을 주고 사랑했던 건 내가 아닌 정훈이었다.
“정훈이라면 진원이 과외 선생이었던 네 친구?”
나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자식이에요.”
“걔 얘기는 진원이한테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걔 얘기만 나와도 벌벌 떠는데 한번 만나보고 싶은걸.”
“내가 말했잖아요. 성질머리가 장난 아니라고. 그리고 진원이는 형도 무서워하잖아요.”
“그럼 전에 말했던 바이라는 친구가 그 종혁이란 놈이고?”
“맞아요, 맞아. 기억력 되게 좋네요. 형하고 닮은 구석이 있죠? 근데 이런 말도 있어요. 무관심은 악의 온상이지 선이 아니다. 내가 그때 녀석의 관심을 끌기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건 사랑이기 보다 동경이었던 거 같아요.”
나는 어느새 진지해졌고 내 얘기를 듣고 있던 그의 태도도 진지해졌다. 그와 얘기를 하면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이 채워지는 거 같아서, 그 느낌이 기분 좋아서 그에게 곧잘 매달려 재잘거리곤 했다. 그도 나도 많이 취한상태였다. 술기운이 돌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우리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진지한 대화가 오가서인지 분위기는 이상하게 점점 고조되어갔고 묘하게 돌아갔다. 그가 갑자기 무방비하게 누워있던 내게 덤벼들었다. 내가 깜짝 놀라서 그를 보고 있을 때 그는 나와 몸을 밀착시키고 키스를 퍼부었다. 깜짝 놀라서 술이 다 깰 정도였지만 난생처음 해보는 그 키스가 짜릿하고 달콤해서 그를 밀쳐 내거나 피하기는커녕,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멍하게 있는 내 팔을 잡고서 그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처음으로 그의 방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는 나를 넓은 침대위로 밀어 넣었다. 술 때문에 그도 나도 제 정신이 아니었다. 다만 안겨있는 그의 품이 너무도 따뜻해서 도무지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사람의 몸은 가끔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행동을 한다.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갔다.
내가 깨어났을 때 그는 팬티만 입은 채 괴로워하며 앉아있었다. 물론 나는 팬티 한 장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몸으로 누워있었다. 신음을 내며 괴로워하고 있는 그의 등에 내가 손을 얹었다.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며 내 어깨를 잡았다.
“어린놈을 상대로 무슨 짓을 했는지.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다. 내가 잠시 동안 미쳐서 손을 댔어. 그러니까 그냥 잊어버려 응?”
그가 처음으로 내게 미안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그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나지막이 질책했다.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하네.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었어요? 강간해놓고 미안하다면 그걸로 끝인 줄 알아요? 잊어버리라니, 잊을 수 있는 일이냐고요.”
“미안하다.”
또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는 그를 껴안으며 속삭였다.
“책임만 져요. 그럼 되니까.”
나는 지금까지 내 자신을 속여 왔다. 그의 오만함과 불손함을 사랑했고 얼마 전 그가 처음으로 내게 보여주었던 나약함 마저 사랑했다. 아니. 어쩌면 이 집에 온 그 순간부터, 거만한 태도로 나를 내려 보고 있던 처음부터 그에게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그는 더 이상 고약한 집주인이 아니었고, 그에게 있어 내가 일 잘하는 동생 같은 존재가 아니길 바랬다.
“내 아이를 낳아주세요.”
당신을 사랑해요. 내 마음을 받아주세요.
그런 로맨틱한 말은 흔하고 평범해서 싫었고,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라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쑥스러웠다. 분명 농담조로 말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나는 나만의 말로 그에게 고백을 했고, 그도 그만의 말로 내 고백을 받아들였다.
“난 그런 재주는 없다.”
그렇게 우리들의 동거생활은 시작되었다. 연인으로서.
14.
사실은 그와의 동거 13이 완결입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후딱 써버린 거 같아서 여운이 남네요. 그래도, 항상 꼬리말 달아주시던 분들을 위해서, 일단은 완결까지 낸 것입니다. 글을 더 쓰면 질질 끄는 것 같아서 도무지 내키질 않더라고요. 아, 그리고 이건 조금은 다른 쪽으로 변형된 저의 실화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형은, 제가 얹혀사는 맨션의 초특급 싸가지 주인이죠. 주위에서 모델이 아니냐는 질문 공세를 받을 정도로 상당한 미남입니다.(실제로, 모델 제의도 들어왔었어요.) 뛰어난 것이 하나 있으면 떨어지는 것도 있어야 세상사 공평한일 아니겠어요. 그게 바로 제멋대로인 그의 성격이죠.
그리고 그와는 아무 일도 없었고, 사귀는 사람은 더욱이 아닙니다. 그냥 재미를 위해서, 살짝 바꾼 거예요. 여기에 나오는 이서진이라는 남자도, 저인 박성현(가명)도, 그리고 아주 가끔 출현 하는 진미령이라는 누나도 실존인물이라는 거죠. 실제로 그는 정신과 의사였고, 지금은 병원도 차려서 원장이 되어있습니다. 그와의 동거 11편의 반쯤까지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그를 위해서 못해본 짓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미남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거절을 할 수 없었죠. 물론 재미가 뒤따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돈이나,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여장도 해보고, 거짓말도 해봤습니다. 아 그리고 그 목욕탕에서는 참 난처했죠. 원래는 1년만 그의 집에서 얹혀 살고나면 원룸을 구할 예정이었는데, 그게 조금씩 틀어져 저는 아직도 그의 집에서 얹혀살고 있습니다. 그의 집이 부산에 있는 우리 집보다도 훨씬 더 편하고 좋았거든요. 부자들의 집이란 그런 거죠. 없는 게 없으니까요. 냉장고에는 항상 먹을 것이 넘쳐나고, 심부름 시킬 때도 돈을 많이 주기 때문에 떼먹었던 적도 많았고, 또 무언가를 사고 싶은데 주머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으면 그에게 투정을 해서, 사고는 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아주 그의 집에 눌러앉기로 작정을 먹었던 겁니다.
“너 군대는 안갈 거야?”
“내가 얘기 안했던가. 나 선천적으로 척추뼈 하나가 없거든요. 그래서 가고 싶어도 못가요. 대신 방위정도?”
저는 선천적으로 허리에 뼈 하나가 없어서 살아가는데 별 지장은 없지만, 오랜 시간 동안 앉아있는 건 몸에 부담이 와서 불가능했습니다. 쪽팔리는 말이지만 저는 방위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해병대를 나왔던 그는 아주 오랫동안 저를 놀려먹었죠. 어쨌거나 나는 지금까지 그의 집에 얹혀살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허락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와 나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레슬링이란 걸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을 겁니다. 나는 숀마이클스의 팬이었고 그는 스톤콜드의 팬이에요.
“악당은 악당 편 일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요.”
“하고 싶은 말은?”
“악당한테 마저 비난받는 에볼루션이 불쌍하다고요.”
그와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넓은 거실에서 이불하나만 달랑 펴놓은 채 레슬링 놀이를 즐겼는데 물론 나는 숀마이클스의 이름을 사칭했고, 그도 자기가 좋아하는 스톤콜드의 이름을 사칭했습니다. 그날은 이불도 하나 펴놓지 않고, 서로 레슬링 경기에 열중이었는데, 처음에는 장난으로 했던 공격이, 한번, 두 번이 서로 오가고 나니까 끝에는 정말로 아파서 나도, 그도 화가 잔뜩 나있었어요. 우리 둘 다 오를 대로 오른 거죠. 우리는 나이 차 만큼이나, 체구 차이도 컸는데 정말로 열 받은 그가 나를 번쩍 들더니 맨 바닥에 파워밤을 먹였습니다. 그때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수술까지 할 뻔했는데 그런 내게 미안했는지, 내가 자신의 집에서 대학교를 다 끝마칠 때까지 있어도 좋다는 결론을 그가 내렸던 거죠. 얼마 전 야참을 먹고 있던 그에게 내가 불쑥 말했습니다.
“내가 요즘 소설을 쓸 생각인데요, 특별히 형을 주연으로 넣어줄게요. 어때요? 고맙죠?”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역인데?”
“좋은 거예요. 좋은 거. 형하고는 징하게 잘 어울리는 역할인데, 용돈 주면 더 멋있게 해줄게요. 네?”
“…….”
<후반전에서 계속됩니다......>
첫댓글 실화가 있군요 오~